83. 학교 밖 (15)
거주 구역, 지익회관과 천익산 사이에 발생한 이계 주변.
성시완의 공격대가 이계 공략에 성공하여 이계의 틈이 사라진 시점.
공격대가 공략에 성공했다는 걸 알았지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수비대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이윽고 이계의 틈 사이로 나타난 이들의 모습에 수비대들이 안도했다.
“공격대가 돌아왔어!”
“이계의 틈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계 공략을 마친 공격대가 귀환했다.
제일 앞에 선 건 공격대를 이끌었던 전 지익회장, 성시완이었다.
다친 곳 없이 돌아온 성시완과 공격대를 보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방어구가 좀 더럽혀진 사람이 있긴 한데, 눈에 띄게 다친 사람이 아무도 없어. 학생들로만 공격대를 편성해서 SSR급 이계를 공략하긴 쉽지 않을 텐데.’
성시완은 당선 후에도 매주 이계 공략을 하는 성국언 국회의원의 영향을 받은 건지, 3학년 중에서 이계 공략 경험이 가장 많았다.
단순한 강함, 재능, 이능의 희귀한 정도를 따지면 그냥 상위권 수준이지만, 이계 공략 경험만큼은 성시완이 1등일 거다.
성시완 본인은 어차피 이계 공략 경험은 졸업 후에 격차가 좁혀질 거라며 겸손해했지만.
“시완이 형!”
“성시완 선배님!”
성시완은 다친 곳 하나 없었다.
워낙 후배들이 잘 따르는 좋은 선배라 수비대로 있던 지익회 아이들이 우르르 그를 향해 달려갔다.
그 선두에는 성시완더러 형 소리 하는 걸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계’새끼도 있었다.
계이담은 성시완의 모습이 보이자 해머를 아이템 카드로 바꾼 후, 제일 먼저 ‘시완이 형!’이라고 외치며 뛰쳐나갔다.
성시완은 제일 먼저 제 앞에 도착한 계이담에게 말을 걸었다.
“이담아, 어디 안 다쳤지? 수비대 애들은 다 무사해?”
“네.”
“해머를 실전에서 쓰는 건 저번에 나랑 이계 공략한 이후로는 두 번째인데 어때? 손에 익었어?”
“저번보다 실수가 줄었습니다.”
“잘했어.”
어쩐지 예전보다 성시완의 잔소리가 늘어나고, 계이담은 고분고분해진 것 같다.
분위기는 예전과 비슷하니 위화감은 없는데, 달라진 것 같았다.
수비대를 둘러보던 성시완은 나를 발견하고 내 쪽으로 왔다.
“의신아, 어서 와. 출발 전에는 거주 구역에 없지 않았어?”
“이변이 시작될 때에는 1학년 구역에 있었어요.”
“그래…….”
성시완은 나를 반갑게 맞이했지만, 얼굴이 다소 어두워졌다.
내가 거주 구역 쪽으로 온 이유 중 하나는 지익회의 위기 때문이었고, 성시완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1학년 구역에 있던 내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주변에서 듣던 지익회 학생들이 의아하게 여기는 것 같긴 했다.
하지만 0반이 이해하기 어려운 짓을 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라 그런지 딱히 추궁하거나 의심하려 들지는 않았다.
“먼저 중앙 구역 상황을 전해 드릴게요. 도원우 선배님이 진행한 방송은 들으셨나요?”
“응, 이계 공략 사이에 방송이 또 나왔으면 못 들었겠지만.”
성시완이 이계 공략을 개시한 시점에서 일어난 일을 요약해 정리했다.
마신의 사제, 마족이 등장했다는 말을 전하자 지익회 소속원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은광고가 위기에 빠진 건 알고 있었지만 학교 내부에 마족이 등장한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
강력한 진족이 학교 어딘가에서 또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건지 겁에 질린 학생도 있었다.
“그래도 외부의 지원이 올 거야. 통신이 끊기기는 했지만, 밖에서 줄 서 있던 사람도 있었고. 누군가는 신고했겠지! 여차하면 비상구로 탈출을 하고…….”
박승현이 지극히 상식적인 말을 했다.
플마고 속의 은광고인들도 다 저런 헛된 희망을 잡고 끝까지 버텼다.
하지만 은광고 결계 내부는 시공간이 왜곡되어 시간이 흐름이 다르고, 현시점에선 외부의 도움을 기대하기 힘들다.
나는 우선 지익회 측에서 또 헛된 시도를 하기 전에 말했다.
“탈출은 어려워. 방금 비상구 주변에 이계가 발생했지. 아마 이계가 발생한 여파로 이능파 흐름이 흐트러져 비상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거고, 또 이계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어.”
“그건, 그렇긴 한데…….”
“결계 상태도 이상하고, 은광고를 습격한 누군가는 학교를 고립시키려 하고 있어. 학교 밖에서의 도움은 없거나 아주 늦는다는 전제하에 대비해야 해.”
냉정한 말에 지익회 학생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벌써 몇 시간 째 통신이 복구되지 않고 외부에서 지원이 올 낌새가 없으니 슬슬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을 거다.
내 말에 그 불안감이 실체화된 듯했다.
‘시간의 흐름 차이를 고려해 봤을 때, 아직 밖에서는 30분도 채 지나지 않았겠지.’
괜히 지익회 학생들을 긴장하게 만든 건가 싶기도 했지만, 아무 대비도 안 된 상태로 전멸의 위기를 맞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계’새끼는 내가 말하는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는데 표정은 별 변화 없었지만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눈 밑이 거무죽죽해지는 게 이제야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한 것 같았다.
정말로 학교 밖 상황을 잘 몰랐나?
아니면 벌써 모든 상황이 해결되어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나?
어느 쪽이든 지금 저놈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던 성시완이 말했다.
“의신아, 너는 마족이 또 등장할지도 모르는 중앙 구역 대신 여기로 왔어. 의신이가 친구를 두고 마족을 피해 도망쳤을 것 같지는 않고, 비상구를 이용하기 위해 여기에 온 것도 아닌 것 같아.”
성시완은 크리스마스에 무슨 일이 터진다는 걸 알고 있고, 지익회가 위험에 처할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 위험에 관해서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이므로 구체적인 경고를 할 수도 없었다.
정보나 준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위기를 맞이해 상당히 초조할 텐데도 성시완은 굉장히 침착했다.
성시완의 태도에 이끌려 다른 지익회 학생들도 덩달아 침착함을 되찾는 것 같았다.
“이쪽에 중앙 구역에 있었던 것보다 더 큰 위험이 닥칠 예정이니까 싸우러 온 거지? 나도 같이 싸우고 싶어.”
성시완은 내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말했다.
과연 이계 공략 베테랑, 관록이 느껴지는 전 지익회장 성시완다웠다.
높은 희귀도의 이계 공략을 부상자 없이 완전히 수행한 것도 그렇고 지금 위기에 대처하는 자세도 그러했다.
현 지익회장이 성시완의 반만 했으면 지익회 상황이 더 나아졌을 텐데 아쉬운 일이다.
참고로 현 지익회장 ‘계’새끼는 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별 도움이 되는 말도 못 하고 얼굴색만 컴컴하게 바꿔 갔다.
‘여기에 오긴 했지만, 대략적인 예상을 해도 확실한 건 없어.’
나는 크리스마스 이벤트에 대비할 때, 지익회가 맞이할 위기에 관해 계속 생각했다.
지익회는 전멸했다는 사실밖에 알지 못했다.
아무리 플마고 속 기억을 되짚어 봐도 ‘어떻게’ 전멸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기에, ‘왜’ 전멸했는가에 관해 생각했다.
‘첫 번째 생각한 건, 지익회에 소속한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일 가능성.’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익회에는 노릴 인물이 없었다.
플마고 기준으로 지익회에는 플레이어블 캐릭터도, 눈에 띄는 NPC도 없었다.
기껏해야 옛 한국 지부장의 손주인 성시완 정도가 주요 인물이었다.
성시완은 우수한 플레이어임은 틀림없었으나 흑막에게 방해될 만한 이능을 갖고 있거나, 지식이 있지는 않았다.
‘성시완이 옛 한국 지부장의 손주라서 죽였다고 생각하기엔 이상한 점이 있지.’
성시완은 활발하게 이계 공략을 해 왔다.
성시완이 가장 잘하는 건 흔히 말하는 솔플.
처음 옛 한국 지부장의 이계 시뮬레이터를 공략할 때 성시완이 그랬던 것처럼, 홀로 이계를 공략하는 것이다.
성시완은 혼자서 이계를 공략한 적이 많은데, 내가 흑막이라면 그때 성시완을 죽였을 거다.
혼자서 이계 공략을 하다 사망하면 목격자도 없고, 흑막의 손이 닿았다는 흔적을 지우기도 쉽다.
굳이 지익회를 몰살시키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지익회 자체를 없애기 위해서일까? 하지만 그것도 마음에 걸렸지.’
지익회가 흑막 계획에 방해될 만한 짓을 한 건 사실이다.
지익회는 돈족이 부리는 멧돼지를 퇴치해 지맥 끊는 걸 늦춰 왔다.
하지만 그걸 방해하기 위해서라고 하기엔 이상했다.
왜냐하면 플마고 시점에서 지익회의 고문은 최편득이었으니까.
‘이미 손에 넣은 거나 다름없는 지익회를 굳이 날려 버릴 필요가 있나?’
여차하면 최편득의 추종자가 교지 편집부를 상대로 그랬던 것처럼, 지익회 학생들의 약점을 쥐고 이용하는 방법도 있을 텐데.
기껏 김신록을 처리해 지익회 고문직까지 따냈는데 이를 없애는 건 뭔가 이상했다.
‘플마고에서는 그 여파가 눈에 보였지.’
플마고에서 멧돼지 퇴치 퀘스트의 보상은 몹시 구렸는데, 은광고의 재력이나 지익회의 예산 규모를 생각하면 너무 적었다.
멧돼지 퇴치 퀘스트의 보상이 그렇게 나빠진 건 최편득이 손을 써서 그렇게 된 게 아닐까?
실제로 몇 안 되는 플마고 유저들 중에 그 퀘스트를 꼬박꼬박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천익산이 나중에 다 죽은 걸 생각하면, 결국 돈족의 지맥 끊기는 성공한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왜 굳이 지익회를 전멸시켜야 했을까?
자치 기구 중 하나를 노린다면 학생회나 선도부를 전멸시키는 게 낫지 않을까?
지익회의 숫자는 지금보다 훨씬 적어 힘이 없었는데, 왜?
오랜 고민 결과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흑막의 주요 타깃은 지익회가 아니었을 거야. 다른 걸 노렸는데, 지익회가 이를 막으려 했다가 전멸당한 게 아닐까?’
성시완의 성격을 고려하면, 눈앞에서 학교가 위험해지는 위기가 닥치면 목숨을 내놓고 싸우려 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플마고에서 지익회가 움직였을 예상 경로를 추정해 보았다.
아마 플마고속 지익회는 지금 이 세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비상구로 향하려다가 이계 공략을 하게 되었을 거다.
플마고 속에서는 학교 상황이 점점 좋아지지 않고, 지원이 오지 않아 이들은 계속 탈출로를 찾아 헤매었을 거다.
그리고 그들이 헤매는 장소는…… 천익산일 가능성이 컸다.
쩌적, 쩌저적…….
마치 공기가 얼어붙어 얼음이 되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지익회 사람들은 놀라 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소리가 들린 곳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은광고를 감싸는 결계였다.
은광고의 결계 곳곳에 성에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결계가 얼어붙는다……!”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갑자기 공기가 크게 차가워진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런 기분이 아니라 실제로 기온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사정없이 몸을 파고드는 한기에 신체 능력치가 낮은 학생들은 벌벌 떨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학교 안이 다 성에로 뒤덮일 거야!”
“대체, 무슨 일이…….”
학생들이 패닉에 빠지기 전, 주변을 살피던 성시완이 다독이듯 말했다.
“이건 거대한 규모로 발동하는 이능일 거야. 움직일 수 없기 전에 한기의 근원을 찾아서 없애야 해! 성에가 뒤덮은 정도를 보니 그 근원은 거주 구역에 있을 가능성이 커.”
성시완은 성에로 덮은 은광고의 결계를 가리켰다.
과연 성시완의 말대로 거주 구역 쪽 결계의 천장을 덮은 성에가 훨씬 많았다.
지익회 학생들은 한기의 근원을 찾아 통찰계 스킬을 발동하고,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기의 근원을 가장 먼저 찾은 건 나였다.
나는 천익산 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천익산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천익산에서 이어진 대나무 숲에서 한기가 퍼져 나가고 있어요.”
내가 보유한 ‘안광’ 스킬로 본 천익산 저편, 대나무 숲이 한기로 얼어붙어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