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긴 꼬리 (1)
한 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갑자기 ‘팟’ 하고 빛나는 나비가 인편(鱗片)을 뿌리기 시작했다.
아주 희미한 광원 아래에 나비의 날개 문양이 새겨진 망사 망토를 입은 나비령이 있었다.
나비령이 손을 살며시 내밀자 나비는 기다렸다는 듯이 팔랑거리며 그 안으로 날아들었다.
사정 범위 안에 들어오자 나비령은 곧바로 주먹을 움켜쥐어 나비를 으스러뜨렸다.
파스스!
조각조각 난 나비의 잔해는 빛의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나비령은 권속과 감각을 공유할 수 있었지만, 공유되는 부분은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나비령은 이렇게 권속을 흡수하여 그 기억과 생생한 감각을 읽어 내곤 했다.
권속을 흡수한 나비령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마치 그 자리에서 직접 보는 것처럼 권제인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나비를 발견한 직후 권제인이 작게 벌리는 입술, 떨리는 눈동자, 하얗게 질리는 피부.
그럼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맑고 아름다운 연주까지.
‘혼자 있었다면 분명 제인이의 연주도 흔들렸을 텐데.’
그 자리에는 권제인만 있는 게 아니었다.
측근인 재러드 리부터 간부급 고참, 권제인의 광팬인 팀원들이 있었다.
그들이 그 자리에서 함께 연주하는 한, 나비령의 권속 하나 정도로는 권제인의 연주를 흔들기는 어려울 거다.
나비령은 아주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나비령은 권제인의 연주를 몹시 아끼지만, 완벽한 연주는 많이 들었기에 망가진 소리도 듣고 싶었다.
나비령은 권제인 본인이나 그 팬들이 알면 질릴 생각을 아련하게 했다.
‘그래도 내 권속의 존재를 확실히 인식했어. 제인이에게 메시지는 잘 전달됐구나.’
나비령은 권제인이 대나무 숲을 주목하게 만들었다.
대나무 숲에서 무슨 일을 벌일지, 그자로부터 직접 들은 건 아니었다.
나비령이 모시는 그자는 오랜 시간 그를 따른 그녀에게도 많은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다.
각각 명령을 하달하고, 거래를 한 후 그 경과를 지켜볼 뿐.
그래서 나비령은 그자의 부하, 거래 상대에게 접근해 정보를 캤다.
기척에 둔한 자에게는 나비를 보내고, 허술한 자를 상대로는 꾀를 부렸으며, 무언가가 결핍된 자에게는 달콤한 독으로 속을 채워 줬다.
이번에 나비령이 대나무 숲에 관해 알게 된 것도 그 결과물이었다.
‘그 남자는 참 쉬웠지. 다른 쪽도 그렇게 쉽다면 좀 더 일이 수월했을 것을.’
나비령은 그자에게 받은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남자와 헤어지기 전,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남자는 나름 임무에 관해 함구한답시고 자세한 사항을 떠벌리지 않았지만, 나비령 앞에서 아무런 경계 없이 단서를 흘렸다.
―걱정하지 마라. 태만한 호족의 결계에 손을 대고, 물건 하나를 찾으면 내 임무는 끝이다. 별로 위험하지 않아. 금방 네 곁으로 돌아올 거다.
보기와 다르게 남자는 결계를 다루는 데에 능했다.
작년 은광고 입학시험 당시, 본래 저강렵이 12지 결계를 제어해 안으로 침입할 예정이었다.
저강렵은 이미 지맥 끊기 건으로 은광고에 손을 대고 있으니 그가 담당하는 게 옳았다.
그러나 저강렵은 결계 제어에 어려움을 호소했고 남자에게 그 역이 돌아갔다.
남자가 결계에 손을 댄다는 말을 듣고 나비령은 남자의 부하들의 움직임을 확인했다.
남자의 부하들은 결계가 열리는 순간, 서문 쪽에서 일을 벌일 예정이라고 했다.
‘학생들과 교직원을 처리하고, 안에서 움직이는 건 웅족과 마족이야. 학교 주변에 몰려올 플레이어들과 용족을 막는 건 돈족과 천계의 수군. 그렇다면 당신과 부하는 무엇을 위해 움직이는 걸까?’
나비령은 서문에 있는 것들 중, 남자와 그 부하까지 동원해 가며 그분이 노릴 만한 것을 찾아냈다.
결계에 연관된 것으로 한정하니 어렵지 않게 답을 찾아냈다.
나비령은 그자의 다음 수가 대나무 숲과 연관되었음을 짐작했다.
대나무 숲은 은광고 결계를 경계로 천익산과 이어지는 곳이자 호족의 수석 주술사 죽호가 관리하는 공간이었다.
‘그분은 호족의 수석 주술사를 처리하고 싶어 했어. 하지만 호족의 수석 주술사가 죽림 안에 있는 한, 처치하기 까다로워.’
하지만 그 죽림이 은광고 결계와 맞닿아 있는 한, 결계를 망가뜨리면 죽림도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호족은 이 사태에 대응하기 바쁠 텐데, 죽림에 얼마나 신경을 쓸 수 있을지 의문이다.
호족이 이번 건을 미리 알고 대비했다면, 주요 전력을 대부분 학교 내에 배치했을 게 분명했다.
호족은 학교 내에 대기하여 학생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싶을 테니까.
그리고 결계를 통한 출입은 불가능하니, 결계에 맞닿아 있기는 하나 은광고 내부에서 학교의 결계 밖에 있는 죽림에 지원을 보내는 건 불가능했다.
‘내부에서 결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겠지만, 밖으로 나갈 수 없는 한 호족의 수석 주술사는 홀로 암살자들을 맞이해야 할 거야. 아니, 혼자는 아닌가?’
나비령의 머릿속에 잠시 그녀가 가호를 내렸던 목련의 화신, 김유리를 떠올렸다.
김유리는 청소년 수련회 사건을 계기로 죽호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것 같으니 어쩌면 오늘도 함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유리의 진정한 힘은 물이 있는 환경에서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죽호의 죽림은 물을 흡수해 김유리의 힘을 억누른다.
폭주를 방지하기 위한 선택이었겠지만, 큰 위험이 닥친 상황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비령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남자가 임무를 무사히 완수하리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까마귀 가면이 또 무언가를 하지 않았을까?’
나비령은 황호와 권제인과 함께 있던, 까마귀 가면을 쓴 플레이어가 떠올렸다.
작년까지만 해도 호족의 상황은 엉망이었고 나비령은 크리스마스에 이르면 호족 중 몇 명은 그자의 수에 죽음을 맞이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나비령의 예상은 크게 바뀌었다.
나비령은 그 이유가 호족의 수장과 나란히 서 있던 그 까마귀 가면이라고 짐작했다.
황호의 곁에 갑자기 까마귀 가면이 나타났고 그 후에 모든 게 바뀌었으니, 당연히 변화의 원인은 까마귀 가면일 게 분명했다.
까마귀 가면을 보면 예의 그 침묵과 방관의 마왕이 떠올라 꺼림칙하긴 했으나, 그가 있는 한 그자의 계획이 쉽게 돌아갈 것 같진 않았다.
적어도 나비령에게 살아 있는 나비로 정원을 가득 채워 주겠다던 그 남자는 무사하긴 어려울 것 같았다.
‘당신이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겠어.’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자의 수가 하나 줄어서 좋고, 돌아온다면 큰 공을 세운 남자를 이용해 또 정보를 빼낼 수 있으니 나쁘지 않다.
어느 쪽으로 일이 굴러가든 나비령은 기꺼이 이를 받아들이고 이용하기로 했다.
나비령은 남자의 생각은 밀어 두고 자신의 임무에 관해 생각했다.
나비령의 임무는 협회를 방해하는 것.
이를 위해 내부에 사람도 심어 두었고, 플레이어 위성 신호을 교란시키고 협회 주변의 디바이스 통신 장애를 발생시켰다.
그러나 협회의 위성 팀은 현재 어떤 경로로 위성 정보를 입수한 후, 전서구 아이템을 통해 프로 플레이어 팀과 언론에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후후후. 어떻게 위성 정보를 수신한 걸까? 협회가 그 달토끼들이랑 손이라도 잡은 걸까?’
위성 정보 건은 만우절에 토족을 전멸시키지 못한 웅족 탓을 하면 된다.
그러나 그렇게 임무를 마무리 지으면 큰 질책은 면해도 무능하다고 취급당해 주요 임무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컸다.
나비령은 아직 그자의 계획을 무너뜨릴 만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럼 그분의 뜻을 받들러 가야지.”
나비령은 사뿐사뿐하게 정원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
나비령은 한 걸음씩 내디디며 나비가 새겨진 망사 망토를 아이템 카드로 변화시켰다.
정원 밖으로 나갔을 때, 나비령은 어디를 봐도 평범한 인간이 할 법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나비령이 향하는 곳은 플레이어 협회 한국 지부 본부 건물이었다.
* * *
한파의 원인, 문제를 알게 된 성시완은 즉각 지시를 내렸다.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이능파로 몸을 감싸고 이동할 거야! 나머지는 지익회관으로 대피해. 바리케이드를 더 쌓고, 실내 온도를 유지하면서 대기하고 있어!”
방한 아이템을 착용하고도 한기가 몸을 파고들었다.
그냥 평범한 한기가 아니라 이능 현상으로 인해 공기가 얼어붙어서 그런지, 아이템이나 이능파로 대처하는 수밖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전투 능력이 떨어지거나, 이능파 컨트롤에 미숙한 학생들은 지익회관으로 대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밖에 남은 건 열 명도 되지 않았다.
적은 숫자에 성시완의 표정이 조금 흐려졌지만, 그건 아주 잠시였다.
“의신아, 대나무 숲이라고 했지? 천익산에 그런 곳이 있었나…….”
“천익산과 결계에 맞닿아 있는 부분에 대나무 숲으로 이어지는 곳이 있어요. 결계 안에 있는 건 대나무 숲의 일부예요.”
숲과 산의 경계는 칼로 가르듯이 나눌 수 없다.
결국 경계가 정해져 있긴 하지만, 경계선 주변을 보면 거기가 대나무 숲인지, 천익산에 들어온 건지 판단하기가 어려울 거다.
그 주변을 보면 판단하기 어렵지만, 은광고의 결계가 그 둘을 완전히 갈라놓고 있었다.
“그럼 서문 쪽에 대나무 숲이 있던 거야? 3학년이 되도록 모르고 있었다니…….”
성시완이 당혹스러워하며 내가 가리킨 방향을 봤다.
그야 알기 어려운 게 당연할 거다.
그 죽림은 호족의 수석 주술사, 죽호가 직접 관리하는 곳으로 인식 저하 주술이 걸려 있을 테니까.
인식했다고 해도 그 안에 들어가는 건 불가능할 거다.
그저 천익산의 산자락 일부가 결계 밖에 나온 걸로 인식하고 지나치고 말 것이다.
‘지금 향하는 곳은 아주 위험할 텐데, 정말로 같이 가도 될까?’
성시완의 존재는 든든했지만, 저 앞에 있을 존재를 생각하면 그렇지 않았다.
이 정도의 규모로 일을 벌였다는 건 진족일 테고, 내 예상이 맞다면 아마 지금 죽림 저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지금 가는 곳에는 긴 꼬리가 있을 거야.’
작년 입학시험에 은광고 결계에 손을 댄 그 긴 꼬리.
13조 학생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김신록을 살해하려고 했던 12지 동맹의 배신자.
그자라면 결계에 손을 대고 호족의 정예를 노릴 법했다.
죽림을 건드렸다는 건 호족의 수석 주술사, 죽호를 상대해야 한다는 건데 얕은수로 그를 노리진 않았을 테다.
높은 확률로 그의 부하도 이끌고 왔을 거다.
호족을 상대할 만한 수준의 진족들을.
‘긴 꼬리의 수장이 없더라도 분명 그 부하들이 기다리고 있겠지.’
나는 내가 준비한 수를 곱씹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괜찮아, 함께 싸울 수 있을 거야.’
이 자리에 있는 나 자신과 내가 뒀던 수를 믿기로 했다.
어차피 저 한기의 근원을 없애지 않으면, 지익회 사람들은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
“한기의 근원을 없애서 은광고가 얼어붙는 걸 막자.”
성시완은 다정하게 학생들을 다독였다.
이미 바닥이 얼어붙은 건지,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자박자박하고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성시완의 목소리와 섞여 들렸다.
“……!”
그때, 계이담이 손을 들어 지익회 학생들을 제지시켰다.
나도 계이담이 손을 들기 전에 인기척을 감지했다.
숲에 누군가가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