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624화 (620/925)

84. 긴 꼬리 (3)

은광고, 동문 주변.

용족과 제천대성의 분신이 하늘에서 달아나는 천계의 수군을 공격하고 있는 가운데, 은광고의 결계가 하얗게 변했다.

은광고의 결계는 동결형 이계에서 뿜어진 냉기로 인해 조금씩 얼어붙는 기미가 있었으나, 저강렵이 아이템 카드를 사용한 이후 그 속도가 폭발적으로 빨라졌다.

새하얀 성에는 은광고를 얼려 버릴 기세로 결계를 뒤덮어 갔다.

쩌적, 쩌저적…….

눈꽃 모양으로 퍼지던 성에는 몇 차례 겹치고 나니 얼음 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제천대성은 눈가리개를 착용하고 있었으나 넘치는 신격과 신성이 그의 시야를 오히려 더욱 넓혀 주고 있어 그 광경들을 전부 지켜볼 수 있었다.

제천대성은 저강렵이 저지른 우행을 전부 지켜보고 탄식했다.

저강렵은 정체불명의 아이템 카드를 매개로 제 이능파를 전부 쏘아 보냈다.

저강렵은 결계를 잘 다루지는 못한다고 하나 일단 그도 12지 수장 중 하나로, 결계에 직접 간섭할 능력이 있었다.

눈에 띄지 않는 방법으로 섬세하게 은광고의 결계에 개입하던 또 다른 배신자와 달리 저강렵은 이런 무식하고 비효율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던 것 같지만.

제천대성은 이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저런 아이템 카드는 어디에서 난 거지? 뒤에서 팔계를 움직이는 자가 준 건가? 마치 팔계가 패배할 것을 알고 넘겨 둔 것 같군……!’

저강렵의 허술함은 제천대성이 잘 알았다.

중요할 때마다 그놈의 욕심 때문에 일을 쳐서 제천대성이 뒷수습을 해야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제천대성도 저강렵이 실패할 것이라는 가정하에 일을 도모하여 대비를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뭔가 이상했다.

‘팔계가 실패할 거라 예상했으면, 실패한 후에 살길을 열어 줄 대책을 세웠어야지. 지금 팔계는 동귀어진을 한 거나 다름없다. 저 아이템을 사용하자 이능파를 다 빨려 버리지 않았나!’

제천대성에게 흠씬 얻어맞고 바닥에 누워 있는 저강렵은 이능파가 전부 빨려 나가 있었다.

오래 산 진족다운 생명력이 그의 이능파를 다시 끌어올리고 있으나 그뿐이었다.

지금이라면 은광고에서 가장 약한 학생도 저강렵을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저강렵 뒤에 있는 누군가는 그를 버리는 패로 사용하려 했던 게 분명했다.

“못나고 우둔한 놈아, 어쩌자고 그런 자를 믿고 일을 벌인 거냐!”

“크억…….”

퍼억!

제가 내린 결론에 화가 난 제천대성이 여의봉으로 저강렵을 패는 대신 발로 걷어찼다.

얻어맞는 내내 소리를 죽였던 저강렵이 신음을 내뱉었다.

이능파를 다 쏟아부어 결계를 어그러뜨리는 바람에 참을 힘이 사라진 것이다.

저강렵이 제천대성에게 얻어맞는 동안 신음을 참은 건 자존심이나 체면, 위신 탓이 아니었다.

“돼지 멱따는 소리 내지 말고 입을 다물어라!”

“커억…….”

“내 말이 우습게 들리는 거냐? 다물라 했다!”

퍽! 퍽!

예상대로 저강렵이 입을 다물 때까지 제천대성이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제천대성에게 덜 맞으려면 맞는 동안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건, 저강렵이 오랜 경험 결과 터득한 요령 중 하나였다.

제천대성은 그렇게 저강렵이 비명을 지를 수 없을 때까지, 즉, 실신할 때까지 신나게 팼으나 배만은 건드리지 않았다.

거의 넝마가 되어 널브러진 저팔계를 두고 제천대성이 중얼거렸다.

“그리도 그 지긋지긋했던 여행을 또 하고 싶었더냐? 이 세계를 혼란에 빠뜨리면서까지? 지옥행이라면 어울려 주마, 팔계야.”

그렇게 말해도 기절한 저강렵은 대답이 없었다.

제천대성은 진작에 저강렵을 전투 불능으로 만들걸, 하고 살벌한 후회를 했다.

제천대성은 서둘러 저강렵이 무슨 짓을 한 건지 확인하기로 했다.

어차피 저강렵은 방금 했던 꼴을 보니 입을 제대로 열지 않을 게 뻔했기에 굳이 깨워서 질문하는 수고는 들이지 않았다.

오감을 동원해 결계를 면밀히 살피던 제천대성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상하군, 냉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동결형 이계가 머금고 있던 냉기.

저강렵의 이능파와 정체불명의 아이템으로 인해 더욱 맹렬한 기세로 불어 가던 성에.

이것들이 온통 결계를 뒤덮었는데 냉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뭔가 이상했다.

제천대성은 불현듯 어떤 결론에 다다랐다.

‘설마 저 서리의 냉기는 전부 내부로 향하고 있는 건가!’

결계의 냉기는 전부 내부로 향하고 있는데, 제천대성은 등골이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다.

저 안에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비정기 오찬회를 통해 연을 맺은 아이들도 많았다.

제천대성이 생각을 멈추려고 해도 그 아이들의 이름이나 오찬회에서 떠들던 시시콜콜한 잡담들이 떠올랐다.

저 독한 냉기를 아이들이 다 뒤집어쓸 거라고 생각하니 제천대성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저강렵을 막기로 해 놓고 이렇게 큰일을 벌이는 걸 막지 못했으니 이건 제천대성의 실책이었다.

‘그 아이에게 팔계를 맡겨도 된다고 호언장담했거늘. 나는 대체…….’

제천대성은 얼마 전 자신을 찾아온 조의신을 생각했다.

조의신과 제천대성은 1 대 1로 독대했다.

조의신과 만나기 전, 평소에 연락이 쉽게 되지 않던 황호가 갑자기 디바이스로 전화를 걸어 와 조의신이 호족의 은인이고 황호 자신이 비호를 하고 있는 몸이라는 걸 몇 번이나 강조했다.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아도 무지기를 구한 조의신에게 손끝 하나 댈 생각이 없는데, 황호가 저런 소리를 할 정도라니 그냥 흥미만 더 솟았다.

그렇게 찾아온 조의신은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를 잔뜩 했다.

가장 놀라웠던 건 완전히 조의신의 색으로 물들어 있던 상보심금파였다.

‘조의신이 아니었다면 팔계가 이런 짓을 벌이리라 믿지 못했겠지.’

만약 그랬다면, 제천대성과 저강렵을 이간질하려는 계획이 아닌가 의심하였을 것이다.

당연히 무지기를 납치 감금한 일당과 연이 닿아 있다는 말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아마 이 상황이 닥칠 때까지 제천대성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을 것이고, 피해는 더욱 커졌을 것이다.

조의신은 저강렵이 일을 벌일 게 분명하니, 빠르게 무력화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래서 등장하자마자 저강렵을 신나게 팼는데 방심하여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다.

‘……내가 그 아이의 수를 어그러뜨린 셈이군.’

제천대성은 제 실책을 수습하기 위해 직접 움직이기로 했다.

제천대성은 조의신으로부터 건네받은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그 아이템은 향록이 건넨 이능독 해독제였다.

어두운 빛을 띤 환약을 몇 알 삼키자 내장이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제천대성은 녹는 내장을 회복시키며 결계를 향해 다가갔다.

“……동생의 잘못은 형이 수습해야지.”

제천대성도 12지 수장 중 하나.

그도 12지 동맹이 맺은 맹약에 따라 결계에 직접 간섭할 수 있었다.

제천대성은 결계가 머금은 냉기를 전부 거둘 생각이었다.

결계 주변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그 주변을 가득 메운 이능독이 제천대성을 덮치기 시작했다.

향록의 해독제를 복용하긴 했으나, 독기가 지나쳐 이능파에 문제가 생기는 게 느껴졌다.

제천대성은 혀를 한 번 차고는 소지한 해독제를 입안에 다 털어 넣고 앞으로 나아갔다.

속이 녹고, 재생하기를 반복하는 감각에 익숙해지지는 않았지만 버틸 만했다.

“제천대성, 무슨 짓을 하는 건가. 그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잊었나!”

그때, 하늘에서 누군가가 일갈했다.

용족의 수장, 청룡이었다.

청룡은 결계에 접근하는 기색을 느끼고, 제천대성을 발견했다.

청룡은 거리를 두고 이능독의 범위 밖으로 나오라며 소리쳤다.

그러나 제천대성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그 해독제라는 걸 먹었으니까.”

“결계를 직접 손볼 생각인가. 결계 상태는 좋지 않다. 온갖 힘이 뒤섞여 있으니, 만전의 상태라도 정상화는 어려울 게다!”

“안다. 그래도 저 냉기만큼은 어떻게 해야겠다.”

제천대성은 그렇게 말하고 은광고의 결계를 향해 걸어갔다.

청룡이 말리는 사이에도 제천대성은 한 걸음씩 결계를 향해 걸어갔다.

걸어갈 때마다 제천대성의 실루엣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결계를 조작할 때에는 맹약에 따라 본모습을 드러내야 했다.

제천대성의 몸에서 뻗어 나온 긴 꼬리를 발견하고는 청룡이 말을 잃었다.

제천대성은 진심인 듯했다.

곧 서유기를 읽은 수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제천대성, 손오공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가까이에서 결계를 본 제천대성이 탄식했다.

‘결계의 상태가 엉망이군. 지금 내 힘만으로 완전히 결계를 정상화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냉기만큼은 어떻게 해 봐야 해……!’

제천대성이 털로 뒤덮인 손을 결계의 표면 위에 얹자, 결계가 이를 거부하듯 ‘파지직!’ 하고 스파크를 뿜기 시작했다.

제천대성은 손이 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힘을 실었다.

그러자 손바닥을 통해 결계 위로 제천대성의 이능파가 흘러갔다.

파아아아!

제천대성이 뿜은 신령한 기운을 띤 이능파가 결계로 뻗어 나갔다.

그 강대하고 따뜻한 기운에 일순 결계가 녹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은광고를 잠식한 악기와 냉기는 뿌리가 깊어 제천대성의 힘만으로는 그 악의를 모두 거둘 수 없었다.

‘안 된다, 이대로는……!’

제천대성의 이능과 결계가 부딪치는 힘을 견디지 못하고 그의 몸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타기 시작한 건 그의 눈을 감싼 눈가리개였다.

눈에서도 뿜어져 나오는 신성한 힘에 제천대성의 금빛 눈이 일부 드러났다.

비록 지금 이 주변에 사람이 없었으나, 이를 정면에서 보면 기가 약한 이들은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

제천대성은 눈을 질끈 감고 다시 힘을 가다듬으려 했지만, 이능독으로 다시 내장이 녹기 시작해 힘을 정돈하기 어려웠다.

그때였다.

휘이이…….

바람이 불고, 하늘이 열리기 시작했다.

열린 하늘에서는 맨눈으로 직시하기 어려울 만큼 강렬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제천대성은 눈을 감은 채로 그 빛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 빛을 얼굴에 맞은 순간, 제천대성은 저도 모르게 눈을 떴다.

“저건……!”

열린 하늘 위로 빛 세 줄기가 내려오고 있었다.

그 빛들은 전부 제천대성을 향하고 있었다.

제천대성은 그 빛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챘다.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상위 존재의 힘이었다.

하나는 전단공덕불(旃檀功德佛).

다른 하나는 금신나한(金身羅漢).

마지막은 팔부천룡(八部天龍).

길고 위대한 여행을 마친 전우들, 그의 옛 친우들이 내린 빛이었다.

하늘에서 손오공을 돕는 건 오래전에 신의 자리에 오른 이들, 삼장법사와 사오정, 백마였다.

우우우웅!

하늘에서 내려온 빛을 맞은 제천대성으로부터 힘이 넘쳐났다.

제천대성은 이 그리운 힘을 아낌없이 사용해 결계에 쏟아부었다.

쩌저적…….

빛이 이윽고 결계를 뒤덮은 성에를 녹여 갔다.

녹아 가는 성에에 제천대성이 환희에 차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오랜만에 드러난 눈에서는 숨기지 못한 기쁨이 넘쳐났다.

“설마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제천대성이 물어보았으나 이미 하늘은 닫혀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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