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긴 꼬리 (8)
약 100년 전 한반도에서 이계 충돌이 일어난 후.
가장 강력한 지력을 품은 한반도에 자리 잡은 12지를 상징하는 진족들은 상호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두 진족은 흑막의 꼬드김에 넘어가 12지의 맹약을 어기고 호족의 신역을 침범했다.
그 12지 동맹의 배신자가 바로 돈족과 우족이다.
‘우족들이 여기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할 만큼 멍청하지는 않구나. 여기서 살기를 드러내거나 괜한 말을 덧붙이면 더 쐐기를 박을 수 있을 텐데.’
그들을 우족이라고 지칭해도 별 반응이 없었다.
우족들은 ‘어떻게 우리의 정체를 안 거냐!’라며 허술하게 자신의 정체를 확정 짓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기에 여태까지 12지 동맹을 배신한 사실이 발각되지 않았던 거겠지만 말이다.
짧은 침묵 끝에 우족이 기계음으로 물었다.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나? 증거가 없으면 감히 그런 말을 입에 담지 못하겠지.”
저들은 우족을 배신자라 단정 지은 증거의 존재가 궁금한가 보다.
증거의 존재 여부, 내용에 따라 호족이 어떻게 대응했을지 가늠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나는 소거법으로 저들의 정체를 추려 냈으므로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하지만 그 사실을 저들에게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
“있어도 그 증거를 배신자들에게 알려 줄 필요는 없죠. 당신들이 배신의 증거를 보게 되는 건 붙잡힌 이후일 겁니다.”
저들을 이 자리에서 붙잡으면 허락 없이 호족의 신역을 침범한 현행범 낙인을 찍을 수 있다.
그러면 그들의 정체 자체가 증거가 될 테니 증거를 찾고 말고 하는 수고를 들일 필요도 없어진다.
내 말뜻을 이해한 건지 처음에 비해 다소 거칠어진 말투로 우족이 답변했다.
“우리를 붙잡는다고? 우리가 진족인 것을 알고도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
우족들 입장에서 보면 갑자기 어린 학생이 튀어나와 그들의 정체를 술술 말하고, 배신자라 칭하고, 붙잡겠다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 화가 날 법도 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저들이 덤비지 않는 걸 보니 내가 주는 자극이 부족한 듯했다.
다음에 무슨 소리로 저들을 선동할까 고민하는 사이, 바늘같이 얇은 이능파가 허공을 통과하는 기운이 느껴졌다.
피이잉…….
주변을 탐색하는 이능파의 흐름을 미루어 보아 저들은 함정의 존재 여부를 탐지하고 있는 듯했다.
이대로 저들이 내게 덤비지 않고 물러나면 다른 수를 둬야 하는 참이었는데, 잘됐다.
함정이 없다는 걸 판단하면 그들은 즉각 나를 공격할 거다.
하지만 기왕 도발하는 거, 좀 더 저들의 평정심을 뒤흔드는 게 좋지 않을까?
나는 팩트를 기반으로 우족들의 속을 뒤집는 소리를 했다.
“물론이죠. 당신들은 어린 학생들이 준비한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노려 몰래 기습을 가하고, 함정을 경계해 꿈쩍도 못 하고 제 도발을 듣기만 할 만큼 약하니까요.”
은광고의 학생들은 경계가 필요할 만큼 강한 이들이 모여 있긴 하지만, 넓게 보면 10대 청소년들을 무자비하고 교묘하고 비겁하게 노린 건 사실이지 않은가.
그것도 크리스마스 이벤트에.
내 말이 정곡을 찌른 건지 곳곳에서 살기가 쏟아졌다.
당장이라도 내 혀를 자르고, 목을 찌를 만큼 매서운 이능파였다.
내가 그 살기와 이능파를 기반으로 우족들이 숨은 위치를 추려 내려 할 때였다.
“도발에 넘어가지 마라.”
그러나 처음 내게 말을 건 기계음이 들리자 살기가 뚝 그쳤다.
고작 한마디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주변에 정적이 감돌았다.
자리를 비운 우족의 수장 대신 이들을 이끄는 진족의 발언권이 상당한 것 같았다.
방금까지 나를 죽일 듯 밀려오던 살기보다 저자의 냉정함과 통솔력이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입을 다물 생각은 없었다.
“저를 공격하지 않을 생각이라면, 다시 작전을 수행하러 죽림으로 가실 예정인가요? 냉기가 사라지면 당신들이 찾는 중인 것을 발견하기 어려워질 테니까요.”
저들이 노리는 건 대나무 숲과 천익산이 이어지는 길이다.
호족의 수석 주술사, 죽호는 가든의 주인이기도 하다.
죽호는 가든을 숨긴 대나무 숲을 유지하기 위하여 천익산이 품고 있는 지력을 끌어 쓴다고 한다.
비록 죽림은 결계의 밖에 있지만, 지력을 끌어다 쓰기 위해 결계의 경계에 통로를 만들었다고도 들었다.
작전 회의 당시, 그 사실을 듣고 흑막의 노림수가 점점 또렷이 보이게 되었다.
은광구 전역이 강력한 지력을 품고 있지만, 특히 신역의 중심인 은광고는 그 힘이 남다르다고 한다.
흑막은 그 특별한 지력을 끌어다 쓰는 결계 밖의 죽림과 그 연결 통로를 노릴 것이다.
흑막이 정체를 철저히 감추어 왔던 긴 꼬리, 우족을 여기에서 쓰는 이유는 그들의 이 숨겨진 노림수를 위해서였다.
‘우족의 수장이 보이지 않는 건 다른 이유일 테지만.’
크리스마스 전에 입수한 정보들을 바탕으로 하면 우족의 수장이 어디로 향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감이 잡혔다.
하지만 우족의 수장이 하려는 일은 시간이 더 필요할 거다.
어쩌면 흑막은 학생들을 더 효율적으로 공격할 겸, 우족의 수장이 움직일 시간을 벌기 위해서 결계의 밖과 안의 시간을 왜곡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은 우족의 수장 대신 눈앞에 있는 그 부하들을 상대할 때였다.
“우리가 무엇을 하러 왔는지 안 이상, 내버려 둘 수 없겠군. 그 잔꾀를 전부 무너뜨리고 네놈을 잡으면 입을 막고, 네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겠지.”
통솔하는 우족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일곱 개의 살기가 나를 향했다.
그들은 임무 수행보다 나의 공격을 우선시하기로 한 셈이다.
‘이걸로 죽림 쪽 일이 더 수월하게 풀리겠구나.’
그들은 결계 밖과 안, 양쪽에서 동시에 죽림의 연결 통로를 수색하려 했을 거다.
안쪽에서 공격하려던 우족은 막았으니 죽림에서 상대할 진족의 수는 더 줄어든 셈이다.
그만큼 이쪽의 부담은 커졌지만.
“죽이지는 마라. 정보의 출처를 알아내야 한다.”
“죽이지만 않으면 됩니까?”
“그렇다. 정보를 알아내는 데에 팔이나 다리는 없어도 되겠지.”
쉬이익!
눈앞에 섬광이 스쳤다.
그 섬광의 정체는 칼날의 형태로 응축된 이능파였다.
도망을 막기 위해 다리부터 자를 생각인지, 섬광은 낮은 위치에서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 칼날은 내게 닿지 않았다.
나는 즉각 손에 숨기고 있던 카드를 발동시켰다.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합니다.〉
〈해당 캐릭터의 스킬, ‘도약’을 사용합니다.〉
파박!
땅을 차고 뛰어오르자 순식간에 시야가 바뀌고, 우족들이 쏘아 보낸 이능파 칼날은 허공을 그었다.
내가 사용한 건 백호군의 스킬 중 하나, 호족들이 타고 나는 도약 스킬이었다.
저 중에 있는 누구도 내가 호족 수준의 도약력을 보이리라 예상하지 못했는지, 높이 뛰어오른 나를 보고 멈칫한 것 같았다.
나는 하늘 높이 뻗은 나무들 사이로 칼날이 날아온 위치를 가늠해 이능총으로 반격했다.
탕! 탕탕탕! 탕!
휘익!
내가 파악한 우족의 위치는 다섯.
다섯 발 중 명중한 탄환은 없었으나, 그들이 총알을 피하는 흔적이 남은 걸 보니 내가 파악한 위치 자체는 틀리지 않은 듯했다.
높이 도약한 만큼 체공 시간이 길었는데, 그사이 우족이 나를 다시 노렸다.
“어리석군. 하늘에는 도망갈 길이 없는 것을. 동시에 공격한다. 나무를 박차고 방향을 바꿀 가능성도 고려해 노린다.”
허공에 떠 있는 나를 노리고 다시 그들이 이능파 칼날을 쏠 준비를 했다.
특정한 스킬, 광림이 아니라 그저 그들의 막대한 수준의 이능파 양을 믿고 칼날을 쏘아 내는 무식한 공격을 하는 이유는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일 거다.
공격 자체는 단순했으나 도약한 상태에서 진족 일곱이 동시에 이능파 칼날을 쏘아 낸다면 피할 길이 없다.
하지만 아무런 수 없이 하늘로 떠오른 건 아니었다.
나는 다른 카드를 발동시켰다.
그 카드의 주인공은 사월세음이었다.
〈해당 캐릭터의 스킬, ‘비행’을 사용합니다.〉
휘이익!
그저 도약, 점프를 한 것뿐이라면 모를까, 나는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 수 있었다.
사월세음의 비행술로 방향을 틀어 날아 버리자, 우족들이 쏜 이능파 칼날은 허공과 나뭇가지만을 베고 흩어져 버렸다.
비행 스킬을 흔한 능력도 아니고, 처음 내가 사용한 스킬이 비행술이 아니었다는 점에 방심한 우족들이 탄식했다.
“비행 스킬 소지자였나. 귀찮게 됐군.”
“하늘에 대기시킨 권속을 이 자리에 집결시킨다.”
물론, 하늘에서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하늘에 있는 에너미를 경계해서 비행술을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지금은 그저 이번 공격을 피하기 위해 쓴 술수였다.
휘익!
나는 땅으로 급강하하여 바닥에 착륙했다.
하늘로 어디로든 날아갈 것처럼 굴던 내가 다시 살기등등한 우족들이 있는 지면에 내려오는 건 예측하지 못한 건지, 일순 우족들이 어처구니없어하는 것 같았다.
“……! 땅으로 내려왔다!”
“저놈이 우리를 우습게 보는군! 잡아라!”
통솔자가 아닌 우족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기척을 감출 생각도 없는지 여기저기에서 내 쪽으로 몸을 날리는 우족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당연히 나는 그들에게 잡힐 생각이 없었다.
그사이에 나는 다른 카드를 꺼냈다.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합니다.〉
〈해당 캐릭터의 스킬, ‘스프린터’를 사용합니다.〉
사용하는 캐릭터는 민그린과 김유리의 성장 버전이었다.
민그린은 원래 발이 빨랐고, 김유리는 짧은 시간 동안 가속하는 스킬이 있었다.
두 힘을 사용해 천익산을 달리기 시작하니, 우족들과 나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큰소리쳤던 것치고는 도망가는 것밖에 재주가 없군! 고작 그 정도에 우리를 기만한 것이더냐!”
“떠벌린 말만큼의 실력을 보여라!”
그렇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지금은 더 효율적인 수를 둘 생각이었다.
참 기분 나쁘고 뒷맛이 좋지 않은 수였지만, 그래도 효율적으로 수를 배치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이건…….”
“조심해라!”
콰쾅! 퍼엉!
내 뒤에서 폭음이 연달아 들렸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달렸다.
3학년 0반 일당이 설치한 함정이 작렬한 소리였으나 모든 우족이 함정에 걸린 건 아니었으니까.
내가 하늘에서 이능파 총을 쐈을 때 파악한 우족의 위치는 다섯.
그러나 그중 다른 이가 함정에 걸리는 걸 보고 경계심이 올라가 화를 면한 자가 있었다.
콰콰쾅! 콰앙! 퍼퍼펑!
폭음이 쉬지 않고 울려 퍼졌다.
거듭되는 폭음 끝에 나를 쫓는 기척이 줄었다.
우기환은 짧은 시간 내가 총탄으로 알린 위치와 내가 말한 이동 경로를 기반으로 함정을 설치했으나, 함정에 걸린 것은 셋밖에 없는 듯했다.
‘앞으로 네 명!’
폭음이 줄어들자 뒤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비한 함정이 다 떨어진 모양이군. 고작 이런 수로 우리를 다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그러나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내 뒤에서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우중충한 안개는 시야를 가릴 정도로 짙게 흩어졌다.
계이담의 광림, ‘밤정적의 안개’였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