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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630화 (626/925)

84. 긴 꼬리 (9)

은광고 서문 주변, 죽림.

대나무가 높고 빽빽하게 들어서 빛이 잘 들지 않는 숲 안에는 고즈넉한 한옥 한 채가 있었다.

대나무 숲은 고요했고 한옥 주변에는 청량한 공기가 흘렀다.

창호지가 발린 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는데, 그 틈 사이로 한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알록달록한 빛이 보였다.

그 빛의 정체는 양 손바닥에 올라갈 만한 작은 크기의 트리에 달린 손톱만 한 앵두 전구들이었다.

트리와 장신구를 이 장소에 가져온 건 바로 김유리였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려고 가져온 건데, 실수한 걸까.’

김유리는 오늘 큰일이 벌어질 것이란 걸 알고 있었기에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는 대신 죽림에 왔다.

그래도 고등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맞는 크리스마스를 그냥 보낼 수는 없어서 가져온 게 저 트리였다.

죽호는 김유리가 가져온 소형 트리를 보고 기뻐하며 창가 앞에 작은 탁자를 가져와 장식했다.

그러나 김유리의 과외 선생님, 죽호는 김유리가 무엇을 가져오든 늘 기뻐하고 좋아했기 때문에 정말로 저걸 가져와도 괜찮았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학교 안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데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는 건 눈치 없는 게 아닐까? 반 애들은 무사하겠지?’

김유리가 반 아이들의 무사를 기원하며 하염없이 소형 트리를 응시하고 있을 때, 갑자기 공기가 차가워졌다.

처음에는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는데 곧 손가락 끝이 덜덜 떨릴 정도로 한기가 온몸에 스며들었다.

한기가 밀려드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귓가에 여러 개의 목소리가 아우성쳤다.

김유리와 멋대로 광림으로 이어진 자들이 소곤거리는 말이었다.

단편적으로밖에 들을 수 없었지만, ‘도망쳐’, ‘물이 있는 곳으로’, ‘숲을 벗어나렴’ 같은 말들이 들린 것 같았다.

‘죽호 선생님의 힘이 지키고 있는 숲이 이 정도로 추워진다는 건,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일 거야. 상위 존재의 목소리도 그렇고…….’

죽림이 공격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김유리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때, 옆에서 태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을 한 건 더벅머리의 여성이었다.

“개 춥다. 창문 닫자.”

“아, 네. 지금 닫을게요!”

김유리는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창문을 닫았다.

현재 죽림의 한옥에는 김유리 외에도 다른 손님이 더 있었다.

황호가 저 진족 여성을 직접 소개해 줬지만, 김유리는 그녀의 정체나 이름을 듣지 못했다.

황호는 ‘친해지면 직접 이름을 듣도록. 하하하하!’라고 말하며 처웃었다.

그래도 김유리는 어느 정도 그녀의 정체를 짐작했다.

황호와 저 진족 여성이 이런 대화를 나눴기 때문이다.

―여전히 개털 같군.

―개털이니까. 호랑이가 두른 모피는 어려 보이네.

―어린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김유리는 같은 반 친구가 호족의 아주 높은 존재, 개천신화에 등장하는 신화계 호족 황호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 물어보면 ‘그렇다, 이 몸이 바로 개천신화 속 황호다.’라고 답해 줄 것 같았지만, 김유리는 굳이 묻지 않았다.

굳이 황호가 숨기려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드러내니 물어볼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황호와 대등하게 말을 하고, ‘개털’이라는 말을 하는 걸 보니 저 진족 여성은 견족인 듯했다.

그것도 황호와 말을 편하게 할 만큼 오랫동안 산 견족일 가능성이 컸다.

문제는 다른 쪽이었다.

‘저분의 정체는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데, 다른 쪽은 전혀 모르겠다.’

김유리의 시선이 견족의 발치에서 몸을 말고 있는 동물로 향했다.

그 동물은 네발로 서면 김유리의 무릎 위로 올 만한 크기로, 대형견 크기 정도였는데 문제는 외견이었다.

크르르…….

시선을 느낀 정체불명의 동물이 김유리를 올려 보며 목을 낮게 울렸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시선을 받는 게 그리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그렇지만 누구나 저 동물을 보면 눈을 떼지 못할 것이다.

‘고양이……는 절대 아니지. 표범도, 재규어도 아니고. 호랑이겠지?’

왜 저 견족은 호랑이를 데리고 다니는 걸까.

그리고 왜 호랑이는 저 견족을 얌전히 따르고 있는 걸까.

여기가 호족의 구역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 그러면 저 호랑이는 견족이 아니라 호족을 따라야 하지 않나?

김유리는 알지 못했지만, 견족 여성의 정체는 견족의 수장이었고, 저 동물은 호랑이의 모습을 빌린 견족의 신수였다.

그리고 현재 견족의 신수는 빌린 모습으로 호족의 구역에 있어야 한다는 점, 오랜만에 왔는데 호족의 신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 등등이 마음에 들지 않아 심드렁한 상태였다.

만약 김유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더 시큰둥한 태도를 보였을 것이다.

“호랑이네 제자라고 해서 건방질 줄 알았는데 착하네. 크리스마스라고 트리 챙겨 온 것도 기특하고.”

한편, 이 자리에 있는 더벅머리 여성, 견족의 수장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침착한 모습을 보이는 김유리를 제법 마음에 들어 했다.

처음에 김유리를 봤을 때는 질린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네가 그 목련이야?’ 하고 몇 걸음 떨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이제 곧 싸울 텐데, 이대로 착하게 기다려. 너까지 싸우면 정말 개판이 되니까 말이야.”

견족의 수장은 ‘개 같다’라는 말을 싫어하는 것치곤 ‘개’라는 말이 들어간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김유리는 그 사실까지는 몰랐지만, 견족의 수장에게 맞추기 위해 자신도 개와 관련된 표현을 자주 사용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누군가가 왔어!’

창문을 닫자 죽호의 힘으로 한옥 안은 냉기로부터 보호받았다.

그러나 냉기가 죽림을 채운 사이 누군가가 숲 안으로 들어온 듯했다.

학교 쪽에서 강력한 힘이 느껴진다 싶더니 냉기는 가라앉았으나, 불청객의 기척은 사라지지 않았다.

김유리의 귓가에서 떠드는 상위 존재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제 덜 추워졌으니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처리해야겠네.”

크르르!

느긋하게 앉아 있던 견족의 수장과 신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견족의 수장은 김유리를 안심시키려는 듯 말했다.

“이 죽림은 고상해 보이지만 본질은 호랑이 소굴이라고. 어떤 미친놈들인지 모르겠지만 겁대가리를 상실했네.”

김유리는 죽림이 호족과 깊은 연관이 있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한적하고 고요한 푸른 대나무 숲을 호랑이 소굴이라 칭하니 바로 와닿지는 않았다.

김유리가 모호하게 ‘아하하.’ 하고 웃으며 말을 아끼던 순간, 대나뭇잎 향이 물씬 풍기는 것과 함께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저분 말씀이 맞아요. 이곳의 본질은 호랑이의 소굴이죠.”

“선생님, 다녀오셨어요?”

“네, 다녀왔습니다.”

잠시 만날 사람이 있다며 자리를 비웠던 죽호가 돌아왔다.

견족의 수장은 사제가 다정한 인사를 주고받는 걸 보다 툭 말을 뱉었다.

“다 듣고 있었어?”

“그야 여기는 호랑이 소굴이니, 호랑이 귀에는 다 들어오죠.”

“아하하…….”

죽호는 닫혀 있던 창문을 열고 소형 트리가 잘 보이게 다시 고쳐 두며 말했다.

창문이 열렸으나 이제는 춥지 않았다.

“호랑이 소굴이 무서운 줄 모르는 어리석은 짐승에게 벌을 줄 시간이에요.”

저 말을 할 때 죽호는 창을 열고 트리에 손을 대느라 등을 돌리고 있어,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죽호는 한마디 덧붙였다.

“뵙기 어려운 분들께서 도와주신다고 하셨으니, 소 사냥이 더 빠르게 끝날 것 같아요.”

죽호의 말이 끝날 즈음에 김유리의 시야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순간 적인가 해서 놀랐으나 죽호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는 걸 보니 그건 아닌 듯했다.

열린 창문 너머로 눈과 입만 뚫려 있는 밋밋한 흰 가면을 쓴 두 명이 흐느적거리면서 대나무 숲 사이를 걷고 있었다.

*    *    *

약속한 지점을 통과하자 곧바로 광림이 발동되었다.

나는 밤정적의 안개가 제때 퍼지고 있는지를 한 번 확인한 후, 범위 밖으로 물러났다.

‘성시완이 붙어 있어서 그런가. 타이밍을 잘 맞췄네.’

‘밤정적의 안개’는 이능파 작용을 억제한다.

그러니 천익산에 이능을 사용한 흔적이 남아 우족의 정체가 드러날 것을 꺼려 능력에 제한에 걸린 놈들을 상대하기에 적절했다.

계이담의 능력, 성품, 출신 무엇 하나 믿을 구석이 없었기에 참 찝찝한 수였으나 어쩔 수 없이 효율을 생각하여 이 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참은 보람이 있던 건지, 수가 유효하게 먹혔다는 증거로 짙은 안개 속에서 우왕좌왕하는 진족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능파 출력이 떨어졌어. 칼날을 부를 수 없다!”

“광림 사용의 허가를…….”

“파생 스킬로 상대를 노리겠습니다.”

그러나 통솔자가 바로 불호령을 내렸다.

“불허한다. 고작 학생을 상대로 일을 그르칠 수는 없다. 무기 아이템 카드를 실체화하도록!”

우족들은 이 허접한 안개의 공략법을 바로 발견한 듯했다.

안개에 닿은 대상의 이능파 흐름을 저해시키는 이 안개는 본질적으로 상대의 이능을 원천봉쇄하는 건 불가능했고, 신체의 능력을 봉인할 수도 없었다.

내가 밤정적의 안개 속에서 상보심금파로 계이담을 팼던 것처럼 말이다.

우족들이 안개 속에서 무기를 실체화하기 위해 아이템 카드를 들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3학년 0반의 마지막 함정이 발동하였다.

“돌겨어억! 우리의 힘을 보여 줘랏!”

“으아아아아!”

쿠구구구구……!

우기환을 필두로 3학년 0반이 우족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3학년 0반이 강한 담임 임연화를 상대로 준비한 마지막 함정은 오랜 기간 단련한 그들의 육체였다.

3학년 0반 선배놈들은 이능 대결로는 임연화를 상대로 절대 못 이길 거라고 판단했다.

이능 사용 금지와 1대 다수라는 비겁한 제약을 걸어야 겨우 승산이 보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학창 시절 내내 지옥 훈련과 벌크 업을 거듭했다.

그 패배의 기록들이 지금의 강한 그들을 만들었다.

“아니, 이게 무슨……!”

“고작 10대 학생들이다, 침착하게 상대해!”

쾅! 퍼어억! 카아앙!

안개 속에서 무기와 주먹이 부딪치는 소리가 쉼 없이 울려 퍼졌다.

이능 없이 신체의 힘만으로, 그리고 절대다수라는 유리한 점을 내세워 3학년 0반 선배놈들이 진족들을 제압해 갔다.

“나약한 진족들 같으니, 타고난 육체와 이능만 믿고 수련을 게을리했구나!”

“육체와 이능을 타고난 주제에 수련도 열심히 해서 나날이 강해지는 담임에 비하면 별거 아니다!”

“그 부실한 근육으로 우리를 쓰러뜨릴 수는 없다!”

통솔자가 일시적으로 후퇴를 지시하기 위해 손을 들기 전, 안개 속에서 한 무리가 더 나타났다.

성시완이 이끄는 지익회였다.

3학년 0반 일당들이 우족을 상대하는 걸 보고 성시완이 감탄했다.

“정말 너희들은…… 졸업을 코앞에 두고도 한결같구나. 우리도 질 수 없지! 가자!”

안개 속에서 난전이 이어졌다.

우족들이 뒤늦게 광림이나 스킬을 발동시켜 이 총체적 난국을 헤쳐 나가려 했으나, 이미 안개에 깊이 잠식되어 이능파를 끌어올리는 데에 시간이 걸렸고, 애써 이능파를 모아도 스킬과 광림 발동 전에 주먹이 날아들었다.

제아무리 오랜 시간 산 진족이라도 이능 없이 계속 처맞으면 버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우족 중에서도 예외가 있었다.

그 우족은 오로지 나 하나만을 노리기 위해 남은 이들을 버리고 내 뒤를 쫓았다.

그자는 난전을 빠져나와 안개를 뚫고 나를 따라왔다.

‘남은 건 하나.’

흰 바위 협곡과 검은 바위 협곡 사이 구름다리 위.

저편에서 홀로 남은 우족 한 명이 보였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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