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633화 (629/925)

84. 긴 꼬리 (12)

대나무 숲.

냉기가 대나무 숲을 얼린 사이, 우족 열 명이 숲 안으로 진입했다.

호족의 수석 주술사 죽호는 강한 진족이었으나, 힘의 근원인 숲과 지력으로 이어진 통로를 얼어붙게 만들면 제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우족이 열 명이나 대나무 숲의 땅을 밟았을 때에 어떤 거부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전에 지시받은 대로 1조와 2조로 나뉜다. 1조는 죽호를 제압하고 가든을 빼앗는다. 2조는 냉기가 흐르는 곳을 따라 지력의 통로를 찾는다.”

앞장선 우족의 말에 전원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두 개의 조로 나뉘었다.

방한복을 철저하게 차려입은 2조는 냉기의 근원으로 향했다.

한편, 2조에 비해 비교적 가볍게 차려입은 1조는 냉기 속에서도 덜 얼어붙은 대나무를 따라 이동했다.

대나무는 죽호의 힘을 머금을수록 생명력이 강해지므로 냉기의 피해를 덜 받은 대나무를 따라가면 죽호의 거처를 찾기 쉬워지리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우족들이 걸을 때마다 얼음이 부수어지는 소리가 작게 들렸으나,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죽림의 주인은 얼어붙은 대나무를 살리느라 넋이 빠져 있을 테니까.

그러나 그들이 죽호를 찾아내기 전, 은광고 쪽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파아아아앗!

하늘에서 세 줄기의 빛이 내려와 제천대성이 냉기를 거두는 데에 성공했다.

죽림 밖에서 무슨 일이 발생한 건지 전혀 알지 못하는 우족들이 우왕좌왕했다.

처음에는 그저 교문 주변에서 벌어진 싸움의 여파라고 여겼으나 냉기가 점점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공기는 차가웠으나 대나무 숲을 얼려 버리고, 냉기의 흐름을 더듬어 지력의 통로를 찾을 수준은 아니었다.

빛이 내려온 것을 기점으로 그들이 안배한 냉기가 사라지고 평범한 겨울날로 돌아와 있었다.

녹은 땅을 밟고 싱싱한 대나뭇잎을 관찰하던 우족이 발언했다.

“대나무 숲이 얼어 있지 않다. 그분께서는 이파리와 땅이 얼어붙은 것을 확인하고 움직이라고 했다. 후퇴를 제안한다.”

신중하고 타당한 말이었으나 1조에 소속한 다른 우족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한 명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고, 다른 한 명은 망설였다.

남은 한 명이 강경한 태도로 말했다.

“숲에 막 진입했을 때에는 모든 게 얼어 있었다. 죽호의 힘은 평소 같지 않을 것이다.”

“미리 호족이 알고 대비를 했을 가능성은?”

후퇴를 제안하는 우족이 우비 모자 너머로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그 눈에는 생기를 되찾은 울창한 대나무 숲이 비쳐졌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죽호가 냉해(冷害)를 입은 대나무를 되살리느라 힘을 다 소모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미리 죽호가 우족의 노림수를 알고 냉기 대책을 세워 둔 후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면 어떨까.

이런 곳에서 죽호를 상대하는 건, 호랑이 입속에 들어가 싸우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우족들은 코웃음을 치며 신중한 우족을 겁쟁이 취급 하였다.

“은광고 교내 침입을 꾀한 진족들은 모두 성공하였다. 오만한 호족이 이 사태를 예견한 것 같지 않다.”

신중한 태도를 보이던 우족도 그 말에는 동의했다.

호족의 성격을 고려한다면, 사전에 이 모든 것을 알고도 그들의 침입을 방치할 리가 없었다.

황호가 아무리 태만하다고 한들, 호족의 신역을 침범하는 무엄한 계획을 세운 이들을 내버려 둘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을 일망타진할 효과적인 수가 따로 있다고 해도 호족이 자존심을 꺾고 이 모든 걸 용납할 것 같지는 않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책략을 펼치던 은호가 깊은 잠에 빠지지 않았다면 모를까, 지금 다른 진족들이 인식하고 있는 호족들을 생각하면 그랬다.

만일 호족을 납득시킬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모든 게 달라지겠지만, 의욕을 잃은 황호를 움직일 만한 누군가가 존재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알았다. 작전을 속행한다.”

결국 신중한 태도를 보이던 우족이 납득했다.

그들이 다시 죽호를 수색하기 위해 움직이려 할 때였다.

사아아아…….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던 대나무 숲에 선풍(旋風)이 불었다.

기묘한 바람의 움직임에 대나뭇잎이 잘게 떨렸다.

우족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봤지만, 햇빛이 닿지 않을 만큼 어둑어둑한 대나무 숲에서 시야 확보를 하기 어려웠다.

바람결 사이로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들의 말대로야. 우리 호족은 오만해. 오만에 걸맞은 힘을 지녔기 때문이지.”

대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사이에 섞인 청량한 음성에 우족들이 전율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호족의 수석 주술사, 죽호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산개하라! 전원 숲 밖으로 탈출한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족들이 각각 방향을 나눠 몸을 날렸다.

이 위기 속에서 다 같이 움직이지 않고 흩어지는 것을 택한 이유는, 다섯 중 하나라도 살아 나가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런 시도가 무색하게 죽호의 목소리가 그들의 뒤를 따랐다.

“어리석어. 아무 준비 없이 말을 걸었을 리가 없는데.”

우족 다섯은 전원 멀리 떨어져 흩어졌는데, 죽호의 목소리는 마치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가까이에서 들렸다.

동시에 죽림의 공기가 급속히 무거워졌다.

우족들은 마치 천근의 무게 추를 지고 움직이는 기분이 들었다.

죽림 전체가 죽호의 힘 아래에 놓여 있다는 증거였다.

우족들은 절망을 숨기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콰드드득!

“커…… 크억…….”

“하나.”

상하좌우에서 동시에 날아온 날카롭게 깎인 대나무 창이 우족의 몸통을 꿰뚫었다.

우족이 피하려고 발버둥 친 탓에 빗나간 대나무 창도 있지만, 죽림의 압력을 견디면서 모든 창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죽호가 첫 번째로 노린 우족은 가장 신중한 발언을 했던 진족이었다.

이 우족의 제안대로 1조가 전원 후퇴했다면 다소 귀찮게 될 뻔했다.

또다시 그 신중함과 지혜를 발휘하면 일이 번거로워질 테니 빠르게 처리했다.

“다음은 누구로 할까. 누가 마음에 들어?”

죽호의 말에 우족이 저도 모르게 눈알을 굴렸다.

격통 속에서 판단이 흐려진 건지, 그는 이 와중에서도 살아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우족 쪽을 바라보고 말았다.

부디 죽호로부터 벗어나 살아 줬으면 하는 마음에 그 우족을 생각하고 만 것이다.

우족이 바라본 방향은 가장 강경한 태도로 임무 속행을 주장한 우족이었다.

발언권이 크고 이 신중했던 우족이 기대를 품은 것을 보니 1조에서 가장 강한 우족인 듯했다.

죽호의 다음 타깃이 결정되었다.

“그래, 다음은 그 우족을 붙잡아 줄게.”

콰드득, 콰득!

가장 빠르게 이동해 출구 근처까지 도달했던 우족이 대나무 창에 몸을 꿰뚫렸다.

멀리 대나무 숲 밖이 보이는 것을 보고 희망을 품었던 우족은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이제 셋 남았네. 다음 타깃은 저 우족에게 물을게.”

“안 돼…… 살려…… 읍, 커억!”

목숨 구걸을 하려던 신중한 우족의 눈과 귀, 입이 대나뭇잎으로 막혀 버렸다.

대나무 창에 꿰뚫려 벌벌 떠는 우족의 감각을 차단한 죽호는 하나씩 다른 우족을 사냥했다.

죽호는 붙잡은 우족들을 끌고 와 다시 수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 잡았다.”

죽호가 대나뭇잎으로 눈, 귀, 입이 틀어막힌 우족의 얼굴을 대나무 등으로 하나하나 비춰 보았다.

결과물에 만족한 죽호는 냉기의 근원 쪽을 바라봤다.

사실 우족이 단정 지은 냉기의 근원, 대나무 숲과 은광고를 잇는 지력의 통로 위치는 가짜다.

그들의 노림수를 고려해 오늘은 일시적으로 지력의 통로를 막고, 가짜로 다른 통로를 뚫어 두었다.

그리고 그 통로 주변에는 이번 작전에 도움을 주기로 한 견족의 수장이 직접 준비한 함정이 가득했다.

“저쪽도 끝났겠지? 도우러 갈까. 아니면 유리를 안심시키러 갈까.”

효율을 따지면 견족의 수장과 호족 부부를 돕는 편이 낫겠지만, 홀로 한옥에서 심심해할 제자를 생각하니 죽호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 좋은 날에 손바닥만 한 트리를 가져오는 것도 망설이던 제자 김유리를 생각하면 얼른 이번 일을 끝내고 크리스마스를 즐기게 하고 싶었다.

죽호가 생각에 잠긴 사이, 땅에 무언가를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 방향을 보니 만신창이가 된 우족들을 끌고 오는 이들이 보였다.

한쪽 다리를 잡힌 채 땅바닥을 다 쓸며 끌려오는 우족들을 보다가 죽호가 흠칫했다.

‘……가면을 씌웠어.’

우족들은 하나같이 밋밋한 흰 가면을 쓰고 있었다.

죽호가 대나뭇잎으로 사로잡은 우족들의 감각을 제안한 것처럼, 저쪽은 이능이 걸린 가면을 사용한 듯했다.

견족의 수장은 찝찝해하는 표정으로 그 가면을 흘끗 보았지만, 개입하기 귀찮은 건지 별말 없이 호족 부부 앞에서 이동하고 있었다.

“고생하셨어요.”

“아니, 나는 안 싸웠어.”

견족의 수장은 더벅머리를 휙휙 뒤로 쓸어 넘기면서 덧붙였다.

견족의 수장은 말없이 우족들의 다리를 붙잡아 이쪽으로 끌고 오는 중인 호족 부부를 돌아보았다.

“나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었는데, 싸울 틈이 없더라. 이 호랑이들 개잘 싸우네.”

우족들은 거대한 발톱에 긁히고 짓눌린 것처럼 여기저기 찢기고 뭉개져 있었다.

가면을 쓴 호족 부부는 웅족을 상대할 때에도 그렇고, 싸움법이 몹시 거친 것 같았다.

‘저분들은 제 몸을 살피지 않으셔서 많이 약해졌을 텐데, 피곤하시지는 않을까.’

호족 부부는 힘없이 흐느적거리며 걷고, 말수가 없긴 했지만 상처 하나 없었다.

그에 반해 넝마처럼 너덜너덜한 우족을 보고도 죽호는 호족 부부를 걱정했다.

죽호는 화풀이를 할 겸,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상태인 우족을 상대로 이렇게 말했다.

“호족의 가든을 손에 넣고 싶어 했지? 가든은 못 주지만 구경은 시켜 줄게.”

죽호는 시공간을 왜곡시킨 호족의 가든 안에 저들을 넣어 놓아 정신력을 무너뜨릴 계획이었다.

어차피 고문은 김신록이 다시 해야겠지만, 왜곡된 시간 속에서 우족의 힘을 빼놓으면 고문이 좀 더 수월해지지 않겠는가.

죽호는 가든의 입구를 열기 전, 호족 부부에게 제안했다.

“같이 가시겠어요?”

“…….”

당연히 호족 부부가 같이 가겠다고 답할 줄 알았는데,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대신 가면 너머로 말했다.

“……그 아이의 반 친구가 와 있다고 들었는데.”

그 아이?

죽호는 한발 늦게 가면을 쓴 호족 부부가 칭하는 그 아이가 조의신임을 깨달았다.

호족 부부는 조의신의 반 친구인 김유리에 관해 흥미를 가진 것 같았다.

김유리의 이야기가 나오자 죽호가 밝게 답했다.

“제 제자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마침 소개해 드리고 싶었는데, 이자들을 처리하고 같이 가죠.”

죽호가 가든의 입구를 열어 우족들을 밀어 넣고 대나무 창을 더 불러 그들을 고정시키는 동안, 호족 부부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일을 마친 후, 그 무언가를 본 죽호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죽호가 호족 부부가 들고 있는 게 뭔지 물어도 될지, 말지 고민하고 있을 때, 그들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호족 부부는 마치 변명이라도 하는 것 같은 말투로 말했다.

“은인께 선물 하나 드리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서…….”

“하지만 은인은 우리를 볼 때마다 슬픈 얼굴을 하니, 만나자 제안하기 미안해져서…….”

그렇다면 호족 부부는 김유리에게 선물을 전달해 달라고 부탁할 생각인가?

마침 크리스마스이기도 하고, 김유리는 성탄절 분위기를 즐기고 싶어 하니 선물 전달 역을 흔쾌히 맡아 줄 것 같았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기에 저렇게 엄중히 봉인한 거지?’

죽호는 호족 부부의 손에 들린 꾸러미를 바라봤다.

그 꾸러미는 죽호가 꿰뚫어 보기 힘들 만큼 빈틈없이 봉인되어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3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