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기청제 (7)
서돌과 홍규빈이 처음 만난 건 홍규빈이 아직 남궁규빈이던 시절이었다.
당시 서돌은 느루 소속은 아니었으나 유명 브랜드의 디자이너로서 파티에 초대받는 일이 많았다.
파티장에서 만난 서돌은 남궁규빈을 관찰하다가 말했다.
―나쁘지는 않은데, 재미가 없네.
서돌은 그 말을 남기고 등을 돌렸다.
그 뒤로 서돌은 다시는 남궁규빈에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랬던 서돌이 구질구질하게 변한 건 남궁규빈이 절연당해 홍규빈이 된 이후였다.
―저 기억하세요? 전 서돌이라고 하는데요, 사실 서족의 수장이에요. 꾀돌이라고 부르셔도 돼요. 가호 받으실래요?
남궁 그룹과 연을 끊은 홍규빈이 플레이어 협회 공채에 합격했을 즈음, 서돌이 그를 찾아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는 가호를 제안했다.
새 출발을 한 홍규빈은 그리 여유가 많지 않았다.
홍규빈은 정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빠듯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재벌가의 자제 남궁규빈에 비하면 사회 초년생 홍규빈은 다소 초라했다.
그럼에도 서돌은 자존심을 버리고 홍규빈에게 매달렸다.
―사실 제가 먼저 눈독을 들인 건 남옥시인 쪽이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시인이 시를 쓰지 않겠노라고 선언했잖아요. 원인을 캐다 보니 당신이 있었죠!
서돌은 홍규빈의 상처를 후벼 파며 말했다.
남궁가에서는 홍규빈이 플레이어로 살겠다는 꿈을 포기하게 만들고, 제갈재걸을 향한 존경심을 꺾기 위해 책략을 짜냈다.
그 책략의 결과물로, 남궁가에서는 두 사제에게 제안했다.
‘남옥시인이 앞으로 시를 쓰지 않겠다고 맹세한다면, 남궁규빈의 장래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라고.
제갈재걸은 10대 시절에 남옥시인이라는 이명을 받을 정도로 시에 조예가 깊었고, 인터뷰를 할 때마다 장래희망으로 시인을 꼽았다.
시인이 되는 건 제갈재걸 평생의 꿈이었고, 그에 반해 남궁규빈은 짧은 기간 과외 선생과 제자로 엮인 사이일 뿐이었다.
남궁가에서는 당연히 제갈재걸이 제 꿈을 택하고, 남궁규빈은 그토록 믿고 따르던 선생님의 선택에 실망하고 불신을 품은 후 남궁가의 충실한 후계자가 되리라 믿었다.
그러나 제갈재걸은 망설임 없이 제 꿈을 버리고 제자의 꿈을 이루어 주는 길을 선택했다.
―알겠습니다. 남궁가에서 규빈이의 선택에 간섭하지 않는 한, 저는 평생 시를 쓰지 않겠습니다.
남궁규빈이 뭐라고 말릴 틈도 없이 제갈재걸이 맹세했다.
남궁규빈이 그 맹세를 철회해 달라고 매달렸지만, 제갈재걸은 들어주지 않았다.
―나는 시인이 되고 싶었어. 하지만 좋은 선생님도 되고 싶었지. 괴로운 마음으로 시를 쓰는 것보다 좋은 선생님이 되는 쪽을 택한 것뿐이란다.
절필을 선언한 제갈재걸의 얼굴엔 한 점의 후회도 없었다.
애초에 토트의 가호로 제갈재걸은 진실밖에 말할 수 없으니 그의 말에 의심의 여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남궁가에 절연한 홍규빈이 할 수 있는 거라곤 플레이어로서 성공하여 제갈재걸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홍규빈은 노력을 거듭해 역대 최악의 경쟁률을 뚫고 플레이어 협회 공채를 통과했다.
그러자 그 사실을 어떻게 안 건지, 서돌이 찾아왔다.
서돌은 홍규빈이 플레이어로서 성과를 보이는 날만을 기다리고 있던 것 같았다.
―남옥시인이 지키려 했던 제자가 과연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너무나도 기대돼요. 그리고 당신, 상당히 귀한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몸가짐도 그렇고, 내 가호를 받기에 적절해요.
서돌은 홍규빈이 지닌 예지 스킬에 관해서도 파악한 듯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 그대로 밤말을 모으는 쥐다웠다.
존댓말로 계속 집요하게 들이대는 서돌이 귀찮았기에 홍규빈은 계속 거절했다.
하지만 서돌은 포기하지 않았다.
홍규빈의 의지가 꺾인 건 제갈재걸 때문이었다.
―남궁가에서는 당신의 선택을 방해하진 못하지만, 남옥시인은 다르죠. 당신의 힘만으로는 남옥시인을 지키지 못할 거예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남옥시인이 취직하지 못하고 있는 거 알아요? 교원 자격증이 있는데도 받아 주는 학교가 없어요. 학원, 과외 교사를 해도 오래가지 못하죠. 누가 힘을 썼다고 생각해요?
홍규빈은 서돌의 말을 듣자 눈앞이 아득해졌다.
제갈재걸은 최근 들어 홍규빈의 연락에 답변을 잘 주지 않았다.
홍규빈이 죄책감을 느끼는 걸 알고 일부러 거리를 두려 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남궁가의 보복을 알아채고 홍규빈이 말려들지 않도록 일부러 그를 멀리한 것이다.
―남옥시인을 받아 줄 만한 학교가 있어요. 한국 최고의 명문고, 은광 플레이어 마이스터 고등학교요.
서돌의 말에 홍규빈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은광고 뒤에는 황명 재단이 있다.
황명 그룹이라면 남궁 그룹의 압력에 굴하지 않을 법했다.
그러나 제갈재걸은 은광고에도 지원을 해 봤을 텐데, 현재 무직이란 건 그쪽에서도 남궁 그룹의 입김이 닿았다는 뜻일 거다.
―제갈재걸 선생님께서는 은광고에서 교사를 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 학교에는 진작에 지원해 봤을 겁니다.
―그 학교가 속은 좀 썩어 있거든요. 이사장이 게을러서요. 남궁 그룹 쪽에서 교사 채용을 담당하는 교직원에게 돈 몇 푼 찔러 주면 남옥시인을 바로 쳐 냈겠죠. 정말, 거기 이사장이 태만할 때에는 재미가 없다니까.
서돌은 마지막 말을 반말로 마무리하며 짜증을 냈다.
서돌은 그 이사장이 태만하고 게으른 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당신이 내 가호를 받고 이사장을 찾아가면, 분명 흥미를 가질 거예요. 만약 이사장이 별 반응이 없으면 가호를 거두……는 건 좀 싫은데, 다른 방법을 모색하죠.
서돌은 조금도 믿음직스럽지 못했으나 홍규빈은 선택할 길이 없었다.
막 협회에 입사한 홍규빈이 남궁 그룹의 압력으로부터 제갈재걸의 꿈을 지킬 방법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제갈재걸 선생님은 내 꿈을 위해서 더 큰 희생을 했는데, 미심쩍은 진족의 가호를 받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게 서돌로부터 가호를 받은 홍규빈은 은광고의 이사장, 황호를 만나러 갔다.
황호는 만나기 어려운 인물이었으나, 남궁규빈이었던 시절에 받은 명함을 통해 접촉에 성공했다.
―어서 오게. 지금은 남궁규빈이 아니라 홍규빈이라고 했던가? 오랜만이군.
은휘관의 이사장실.
그 안에서 황명호의 모습을 한 황호는 어딘가 나른해 보이는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그 표정이 바뀐 건 악수를 한 이후였다.
악수를 할 때 손바닥이 저릿한 기분이 들었는데, 맞잡은 손 쪽을 보니 황금빛의 이능파가 일렁이다 사라지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홍규빈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황호는 영역을 침범한 먹잇감을 보는 범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거슬리는 쥐에게 가호를 받은 인간이군. 이렇게 알기 쉬울 정도로 쥐의 존재감을 강하게 지닌 인간이라면 분명 목적이 있어서 찾아온 거겠지. 말해 봐라.
황명 그룹의 주요 구성원이 인간이 아니라는 소문은 은연중에 돌고 있었다.
홍규빈은 서돌이 제안했을 때부터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으나 이렇게 대놓고 정체를 숨기지 않을 줄은 몰랐다.
그 강력한 힘에 압박감을 느끼면서도 홍규빈은 환희했다.
‘이 진족에게는 제갈재걸 선생님의 꿈을 지켜 줄 힘이 있다.’
서족의 수장을 ‘거슬리는 쥐’라고 칭할 정도의 오만함과 힘.
거기에 황명 그룹의 재력이 더해진다면 남궁 그룹이 아무리 압력을 넣어도 소용없을 것이다.
홍규빈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황호는 위축되기는커녕 웃고 있는 홍규빈에게 흥미를 가졌다.
―성이 바뀐 사연과 거슬리는 쥐의 가호를 받게 된 경위를 포함해 모든 것을 말해 보도록. 듣고 생각해 보겠다.
홍규빈은 자신의 사연을 숨김없이 말했다.
황호는 흥미진진해하며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그와 독대를 한 후, 얼마 안 있어 황호의 비서로부터 연락이 왔다.
제갈재걸이 은광고에 정교사로 채용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거봐요, 내 말이 맞죠?
홍규빈은 서돌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서돌은 일이 이 정도로 잘 풀릴 거라 확신한 것 같지 않았지만, 그 제안이 없었다면 제갈재걸은 지금쯤 교직에 있는 대신 이계 공략이나 하고 다녔을지도 모른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갈 선생님이 다시 교단에 서게 되었습니다. 보답할 방법이 있다면 당신 말에 따르겠습니다.
끈질기게 가호를 받으라고 요구한 서돌이니, 더한 것을 요구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홍규빈의 예상과 달리 서돌은 별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면 앞으로도 재미있게 살아 줘요. 겉모습도 중요하니까 옷도 신경 써서 입어요. 가끔 옷 보내 줄게요.
―……그것뿐입니까?
―음…… 가능한 오래 사세요. 가호로 이어졌으니까, 위기가 닥칠 때 불러 주면 죽지 않게 도와줄게요.
서돌은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홍규빈을 도와준 것인가.
이해하지 못하는 홍규빈을 두고 서돌은 한마디 덧붙였다.
―난 인간의 이야기를 아주 좋아하니까요.
서돌은 그 이후, 무슨 일만 있으면 홍규빈을 귀찮게 하며 인간의 이야기, 드라마를 찾아 헤맸다.
꽤 깊게 존재감이 새겨져 홍규빈의 속내가 가끔 읽힌다는 게 몹시 귀찮고 성가셨으나, 서돌은 홍규빈의 귀찮아하는 감정마저 즐겼다.
홍규빈처럼 극적인 배경을 짊어진 인간들의 삶을 지켜보는 게 서돌의 낙인 듯했다.
그렇게 서돌은 홍규빈의 삶에 개입했는데, 크리스마스이브 때에도 그러했다.
―조의신의 부탁을 받았어. 크리스마스이브에 널 도우러 갈 거야.
홍규빈은 조의신이 부탁했다는 말보다 서돌의 말투에 놀랐다.
분명 크리스마스이브에 일어날 대사건은 서돌의 입맛에 맞을 텐데, 반말을 써 대는 게 어째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서돌은 툴툴거리며 말했다.
―협회엔 당신도 있고, 사건이 벌어질 걸 알아. 그래도 나는 은광고로 가고 싶었어! 은광고에는 엄청난 일이 벌어질 거고, 거기엔 제인이도 있고, 조의신도 있잖아. 12지 소속 진족들도 엄청 온다고.
확실히 은광고에는 서돌이 좋아할 만한 일들이 잔뜩 벌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조의신의 설득으로 서돌은 협회에 가는 걸 택했다.
―그래도 이번 건으로 조의신에게 빚을 지게 하는 건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 말을 들었을 때, 홍규빈은 조의신을 걱정했다.
조의신이 연락할 때마다 야근 등의 추가 근무를 하는 처지라 쌓인 게 조금 있긴 하지만, 아직 10대인데 서돌에게 빚을 지는 건 좀 안됐다고 생각했다.
―의신이는 아직 10대입니다. 빚을 강요하는 건 과합니다.
―아, 대놓고 빚이라곤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홍규빈의 말에 서돌이 히죽 웃었다.
―조의신 같은 타입은 호의에는 호의로 돌려줄 수밖에 없어요. 굳이 내가 빚이라고 언급하지 않아도 조의신은 되갚으려 하겠죠.
그렇게 조의신에게 마음의 빚을 지울 겸, 가호를 내린 대상을 지키기 위해 서돌이 협회에 나타났다.
벽을 타고 흘러나온 쥐 떼들의 사이로 회색의 이능파가 뭉치다가 점점 인간 형태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인간의 형상을 갖춘 서돌이 폭주하는 박 팀장을 보며 말했다.
“이능파 폭주라…… 황호라면 깔끔하게 수습했겠지만, 전 쥐라서요. 그렇게 못 해요.”
서돌은 존댓말을 쓰는 걸 보니 지금 사태에도 꽤 흥미가 생긴듯했다.
서돌이 가볍게 손짓하자 발을 굴러 대던 쥐들이 일순 움직임을 멈추고 이능파를 뿜어대는 박 팀장을 바라봤다.
박 팀장은 홍규빈을 노리고 있었지만, 쥐 떼와 부서진 벽에 가로막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제 쥐들이 간만에 포식하겠네요.”
두두두두두!
서돌이 손짓하자 쥐 떼들이 일제히 박 팀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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