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656화 (652/925)

86. 검은 눈 (9)

갑자기 나타난 주수혁, 맹효돈, 유상훈을 보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저 셋이 나타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탓일까 사고가 정지한 것 같다.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생각을 멈추는 건 어리석은 짓인데도 한순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

머릿속에 잠시 공백이 지나간 후에야 저 셋이 지금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저 셋은 나와 황지호가 우마왕을 상대하는 사이에 만들어진 빈틈을 노릴 만큼 뛰어난 플레이어들이다.

동시에 저들은 우마왕의 능력을 가늠할 만큼 우수했다.

한 번 기습을 하고 도망친다면 모를까, 정면으로 상대하면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거다.

그런데도 저 세 사람은 나를 도우러 온 거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니 다시 머릿속에 공백이 생기려 했다.

그래서 애써 사고를 전환했다.

‘왜 쟤들이 여기에 있는 거지?’

주수혁, 맹효돈, 유상훈은 이곳에 있을 타이밍이 아니었다.

저 셋은 비교적 안전한 곳인 중앙 구역 학생회관에 있어야 한다.

도원우를 비롯한 학생, 교사진이 저들이 개별 행동을 하게 내버려 둘 리가 없다.

내가 자세를 다잡기 전에 검과 검이 부딪쳐 눈앞이 번쩍였다.

카아앙!

붉은 색의 산타 옷을 입은 주수혁이 쏜살처럼 움직여 우마왕의 일격을 쌍검으로 흘려 넘겼다.

주수혁의 산타 옷을 보니 저 셋이 어떤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왔는지 짐작이 갔다.

사전에 천동하를 통해 선도부 쪽에 대피 시설이 있는 지도를 배부했었다.

그러니 선도부 이벤트를 가장해 대피시킨 사람들의 안부를 확인하려면 출중한 전투 스킬과 천리안을 가진 주수혁을 보내는 게 제격이었다.

하지만 천리안만으로 나를 찾는 건 불가능했을 텐데, 어떻게 여기에 온 건지 모르겠다.

‘주수혁은 선도부 소속이니까 밖으로 나갈 핑계는 만들 수 있어. 하지만 여기에 어떻게 온 거야? 우연히 천익산 백운봉까지 올라왔다가 마주쳤을 리도 없고.’

단서는 눈앞에 있었다.

파이트 클럽에 묶여 있을 뻔했던 맹효돈이 여기 있다.

작년 입학시험에서 퇴장할 뻔한 유상훈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삿된 눈 대신 검은 눈이 내리고 있다.

플마고의 퍼스트 크리스마스와 지금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려 주고 있었다.

‘중앙 구역의 누군가가 도와준 게 아닐까. 나를 추적할 만한 이능을 가진 사람이 누가 있더라. 공청훤 선생님은 저 셋한테 단서를 주지 않을 것 같은데…… 설마 문새론이 파생 스킬을 이르게 획득한 건가?’

강력한 추적계 이능을 가졌으면서 저 셋한테 기꺼이 단서를 넘길 만한 사람으로 문새론이 떠올랐다.

플마고 속 문새론은 2학년 때 파생 스킬, ‘집중 취재’를 획득한다.

대상의 정보를 기반으로 이동 경로를 예측, 추적하는 사기 스킬로, 취재에 대한 문새론의 집념이 파생 스킬로 발현된 결과물이다.

문새론은 플마고와 달라진 이 세계의 영향을 받아 파생 스킬을 이르게 습득한 걸지도 모른다.

집중 취재라면 내 이동 경로나 위치를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거다.

생각이 많아져서 그런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저 셋이 다칠 수도 있어!’

저 셋을 보호하거나 도망치게 할 수를 떠올리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하다못해 생각할 시간을 벌고 싶었는데, 상보심금파는 반응하지 않았다.

‘청소년 수련회에서 흉내꾼과 싸울 때에는 정신세계로 끌어들여서 생각할 시간을 줬는데…… 아까 우마왕에게 잡혔을 때 타격을 받은 건가.’

상보심금파를 빼앗으려던 우마왕에게 맞선 탓일까, 지금 도움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상보심금파가 사고할 시간을 벌어 주는 건 못 해도 싸울 수는 있다.

상보심금파를 쥐고 앞으로 나서서 갈래를 발동하려 했을 때였다.

쾅!

유상훈이 방패를 땅에 크게 내려찍으며 나와 우마왕 사이를 가로막았다.

저놈은 나를 앞으로 보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어디 가냐.”

“싸우려고.”

당연한 걸 묻는 유상훈에게 당연한 말로 답했다.

카앙!

그사이에 우마왕이 크게 힘을 실어 주수혁을 향해 검을 내리쳤고, 흘려 넘기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주수혁이 몸을 날려 피했다.

주수혁이 몸을 굴린 방향을 따라 우마왕이 검의 궤도를 바꾸려 하자 맹효돈이 그 팔을 걷어차 저지했다.

우마왕의 눈이 주수혁과 맹효돈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주수혁과 맹효돈은 지금 평소보다 이능파를 몇 배는 더 끌어올려 억지로 싸움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수많은 전장을 경험한 우마왕이 그걸 간파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조만간 저 둘의 움직임에 익숙해질 거고 그에 반해 두 사람의 이능파는 점점 바닥을 칠 거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유상훈은 비켜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서 있는 자세가 불안정한데, 귓속의 전정기관이 손상된 거 아니냐?”

유상훈이 내 귓가를 보며 말했다.

이동하면서 대충 닦았다고 생각했는데 핏자국이 남은 모양이었다.

내 귀는 처음 부상을 입었을 때와 달리 피도 멎고 통증도 없어진 상태였다.

다소 어지럽긴 하지만 유상훈이 표현한 것처럼 대단한 부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우마왕과 싸우는 사이에 악화된 걸까?

내가 평소보다 불안정하게 서 있었나 보다.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안 비킨다.”

“그러다가 네가 광림을 쓰게 될 수도 있어.”

“그러면 쓰면 되지.”

유상훈은 태연하게 답했다.

유상희가 저 꼴을 봤으면 수도로 목 뒤나 등짝을 쳤을 텐데 아쉽게 됐다.

유상훈이 말하는 걸 보니 광림을 쓸 각오를 하고 내 앞을 막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뭐라고 답하기 전에 서늘한 살기가 우리 쪽으로 향했다.

퍼억!

우마왕이 주수혁과 맹효돈을 멀리 걷어차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저 두 사람을 상대하는 사이에 내가 회복하는 것보다 먼저 나를 처리해 상보심금파를 확보하는 게 효율적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휘익!

주수혁이 맞아서 날아가는 도중에 쌍검 중 하나를 던져 우마왕의 진로를 방해하고, 다른 쌍검 중 하나를 땅에 박아 그 자리에 멈추는 신기를 보였다.

멈춰 선 주수혁이 다시 땅에서 검을 뽑아 들고 우마왕을 향해 돌진했다.

“귀찮군!”

방해받은 우마왕이 주수혁의 쌍검, 두빛나래 중 한쪽을 부수려고 자신의 검을 높게 들었다.

우마왕의 검에 이능파가 이글거리는 게 무기를 박살 내어 가장 방해되는 주수혁의 힘을 봉인할 생각인 것 같았다.

휘익!

그러나 우마왕의 일격이 검에 닿기 전, 두빛나래가 주수혁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주수혁이 이능파를 발산해 억지로 쌍검을 잡아 든 것도 아닌데 검이 의지를 갖고 움직인 것처럼 보였다.

주수혁의 파생 스킬, 쌍검일신(雙劍一身)이 발동해 물리적 인과를 무시하고 그의 손에 돌아온 거다.

그 마법 같은 힘에 우마왕의 일격은 허공을 갈랐다.

그 틈을 노려 다시 맹효돈이 우마왕의 정수리를 향해 주먹을 날리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맹효돈이 우뚝 몸을 굳혔다.

“야, 피해!”

무엇을 느낀 건지 맹효돈이 주먹을 거두고 급히 물러났다.

맹효돈의 싸움꾼으로서의 감이 본능적으로 위험을 고한 듯했다.

우마왕은 쌍검을 놓고 다른 무기를 꺼내 들었다.

카드에서 실체화한 거대한 쇠몽둥이에는 ‘혼철곤(混鐵棍)’이라고 쓰여 있었다.

“정체를 감추지 않기로 했으니 진작 이걸 꺼내면 좋았을 것을.”

쇠몽둥이에 써 있는 세 글자를 본 주수혁과 유상훈이 눈을 크게 떴다.

혼철곤은 제천대성의 여의금고봉과 맞붙어 천지를 뒤흔들었다는 우마왕의 쇠몽둥이로, 서유기를 한 번 읽어 봤다면 대부분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두 사람은 지금 자신들이 우마왕을 상대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맹효돈은 비록 저 글자를 알아보지 못했으나 저 무기의 위험성을 바로 알아챌 만큼 혼철곤이 품은 힘은 막대했다.

우마왕이 혼철곤을 높이 들어 올렸다.

파직, 파지지직……!

치켜든 혼철곤에 이능파가 모여들어 스파크가 일어났다.

광역기를 사용해 끝장을 낼 생각일지도 모른다.

주수혁과 맹효돈은 몸을 굳히고 방어 태세를 굳혔지만, 지나치게 가까이에 있었다.

나는 상보심금파를 들고 앞으로 달려 나가려 했다.

하지만 유상훈이 내 앞을 가로막고 비켜 주지 않았다.

유상훈이 듀얼링 실드를 들어 올리는 게 보인 순간.

콰아아아아아!

우마왕이 땅에 혼철곤을 내려찍었다.

하늘과 땅이 뒤흔들리는 것처럼 진동하고 굉음과 충격파가 몸을 꿰뚫었다.

황지호가 사전에 전개한 결계 덕에 이 거대한 힘이 천익산 밖에 영향을 미치진 않았지만, 그 충격은 안에 있는 우리가 전부 감당해야 했다.

만약 우마왕의 일격이 이대로 먹혀들었다면 가장 가까이에 있던 주수혁과 맹효돈은 산산조각이 났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모두가 무사했다.

단 한 명만 빼고.

파스스…….

몸통을 전부 가릴 정도로 거대했던 듀얼링 실드가 반도 남지 않고 부수어져 있었다.

그나마 남은 잔해도 너덜너덜해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나는 차마 그 듀얼링 실드의 주인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외면할 수 없었다.

피투성이가 된 유상훈이 아직 서 있었다.

유상훈은 여전히 반 토막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방패였던 것을 쥐고 있었다.

우마왕은 감탄을 한 건지 질린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유상훈을 보다가 말했다.

“혼철곤의 힘을 홀로 받고도 살아남았다니.”

유상훈의 광림의 효과 중 하나는 ‘주변의 모든 충격을 흡수하는 것’이었다.

어릴 적, 유상훈이 앓은 기병의 원인이 저것이었다.

유상훈의 신체는 주변에 발생한 충격, 공격, 질병 등을 몸에 쌓는 성질을 타고났다.

유상훈이 이능을 얻을 만큼 신체가 성장하고 나이를 먹기 전부터 흡수가 시작되었다.

무차별적인 흡수를 막거나 이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이능을 개화할 필요가 있었다.

치유에 능한 유상희가 곁에 있으니 이능을 개화한 유상훈은 빠르게 회복되고 더 이상 몸에 충격이나 병을 쌓을 일이 없었다.

유상훈이나 주변 사람들은 사실 이런 원인이나 과정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이걸 깨달은 것은 유상훈이 광림을 얻은 순간이었다.

그가 타고난 광림은 유상훈의 체질을 극대화한 내용이었으니까.

유상훈이 광림을 발동하면 화살, 총탄, 검날 가릴 것 없이 그를 향해 모든 충격이 쏟아진다고 한다.

그래서 유상훈은 무기를 방패로 택했다.

“그 용기를 높이 사겠다. 네 친구들 중에서 제일 먼저 죽여 주마.”

우마왕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혼철곤을 들고서 유상훈을 향해 걸어갔다.

유상훈은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시선은 우마왕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내, 광림은…….”

유상훈이 꺼질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평소에는 장남욱이 서운해할 정도로 말이 없던 놈이 왜 이럴 때에만 입을 열려고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닥치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끼어들 수 없었다.

막을 거면 처음에 유상훈이 광림을 발동하는 걸 막아서 저 짓을 못 하게 했어야 했다.

여기에서 나서면 유상훈이 치른 대가가 아무 소용 없어지니까.

혼철곤을 휘두르면 직접 닿을 만큼 우마왕이 유상훈에게 접근했을 때였다.

“……복수하는 바람이다.”

콰아아아아!

유상훈이 말을 마친 순간, 그의 몸에서 바람이 피어올랐다.

유상훈의 광림, 복수하는 광풍이 우마왕을 덮쳤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