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검은 눈 (8)
처음에는 힘이 발산된 곳에 천리안을 써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지나치게 강력한 힘이 발산된 직후였기에 그 잔재가 주수혁의 시야를 방해했기 때문이다.
“야, 아직 안 보이냐?”
“조금만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
주수혁이 천리안으로 그 너머를 볼 수 있게 된 건 검은 눈이 내린 지 조금 시간이 흐른 뒤였다.
주수혁은 조의신으로 추정되는 인물과 거대한 흰 호랑이를 발견했다.
‘플레이어의 궤적’의 힘을 가능한 오래 쓰기 위해 조의신은 겉모습을 위장하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조의신이 가면을 쓰고 있어도 실루엣만으로 바로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의신이로 추정되는 인물이 가면을 쓰고 있어.”
“까마귀 가면이냐?”
어떤 모양의 가면인지 전혀 설명하지 않았는데, 유상훈은 짐작 가는 바가 있는지 바로 되물었다.
힘의 잔재 탓에 아직 시야가 밝지 않았다.
가면 부분이 흐릿하게 보였기에 주수혁이 천리안의 출력을 높였다.
그러자 호랑이와 조의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보였다.
조의신이 호랑이를 열심히 달래고 있었다.
호랑이를 쓰다듬고, 안아 주며 무언가를 열심히 말하고 있는 게 그 내용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조의신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호랑이가 눈을 휙 치켜떴다.
조의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주수혁과 호랑이가 시선이 마주친 것 같았다.
‘호랑이가 이쪽을 본 것 같은데…….’
경계심이 어린 맹수의 시선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조의신 쪽으로 향했다.
주수혁은 알지 못했으나, 호랑이의 정체는 호족의 신수였다.
그리고 저곳은 신역의 중심인 천단수 앞이었다.
그러니 신수는 천리안의 시선과 그 시선의 주인이 뿜는 기운을 감지할 만큼 예리한 감각을 유지한 상태였다.
조의신은 느끼지 못했으나 호족의 신수는 주수혁이 천리안으로 이쪽을 들여다보는 것을 감지했다.
그리고 호족의 신수는 주수혁의 시선에서 선한 기운을 느꼈기에 경계심을 거둔 것이었다.
그런 과정을 모르는 주수혁은 얼떨떨한 기분이었으나 우선 조의신 쪽을 관찰했다.
조의신은 유상훈의 추측대로 까마귀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 마족이 까마귀 가면을 찾고 있었어!’
학생회관 1번 출구 쪽에 나타난 인비디우스의 사제는 이렇게 말했었다.
―찾는 게 있어서. 혹시 까마귀 가면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인간? 그럴싸한 정보를 주면 죽이진 않고 권속으로 삼아 줄게.
―까마귀 가면은 빛나는 것이었지. 그걸 노리는 이들이 많아. 하지만 나는 내 손으로 그걸 죽이거나 붙잡고 싶어.
주수혁은 그 말을 떠올리고 걱정스럽게 천리안 너머의 조의신을 바라봤다.
‘의신이가 정말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었구나.’
주수혁은 이 불안한 마음이 두 사람에게도 퍼질까 봐 이를 숨기고 입을 열었다.
“까마귀 가면을 쓰고 있어.”
“조의신이네.”
“부반장 또 뭐 하는 거냐.”
유상훈에 이어 맹효돈까지 확신했다.
두 사람은 조의신이 까마귀 가면을 쓰고 활약한 사건에 몇 번 엮였기에 잘 알고 있었다.
유상훈과 맹효돈은 까마귀 가면이라는 말에 조의신의 몸 상태부터 걱정했다.
“조의신 저 가면 썼을 땐 평소보다 더 수상한 짓을 하는데. 안 다쳤냐?”
“저 새끼 어디 다친 거 아니야?”
주수혁은 까마귀 가면을 쓴 조의신과 호랑이를 다시 관찰했다.
귓가에 핏자국이 있다는 주수혁의 말에 맹효돈과 유상훈은 그럴 줄 알았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때 조의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랑이와 떨어져 이동할 생각인 것 같았다.
호랑이는 기분이 그리 좋지 않은 듯 큰 꼬리를 휘둘러 바닥을 때리고 있었다.
그 단순한 동작이 풍압을 일으키고 흙이 튀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저 호랑이는 보통 힘을 가진 게 아닌 듯했다.
하지만 호랑이는 조의신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았다.
그저 조의신이 가 버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인 것 같았다.
“의신이가 거대한 호랑이와 같이 있었는데, 작별 인사를 하는 것 같아.”
“호랑이? 아.”
조의신 같은 인물이 호랑이와 함께 있다는 말을 전하자 유상훈이 말했다.
“어, 호랑이면 괜찮을걸?”
유상훈은 호족으로 추정되는 1학년 0반의 어느 돌아이를 떠올리며 말했다.
유상훈은 조의신이 까마귀 가면을 쓰고 행동한 TC 연구소 사건에서 20대의 모습을 한 황호를 보았다.
그 모습을 한 황호를 ‘황지호’라고 단정 지은 장남욱의 말도 들었다.
10대 모습을 한 황호의 모습을 확인해 유상훈은 0반 돌아이가 인간이 아니며 조의신과 함께 행동하고 있다고 파악한 상태였다.
그 이후로 황명 재단에 얽힌 소문, 황호의 이름 등을 고려해 ‘저 돌아이는 호족이 아닐까?’라고 추측하고 있는 중이었다.
호랑이면 괜찮을 것이라는 유상훈의 말에 주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수혁은 호랑이의 태도에 이어 유상훈의 말에 확신을 얻은 듯했다.
“그래, 다행이다.”
“……그런가?”
맹효돈은 대화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가 두 사람이 그렇다고 하니 괜찮을 거라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때, 작별 인사를 마친 조의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수혁이 시야를 움직여 조의신을 따라가려 했다.
그러나 갑자기 조의신의 모습이 그림자도 없이 사라졌다.
조의신이 플레이어의 궤적으로 전무영의 ‘그림자 없는 시간’을 발동해 은신하고 이동했기 때문이다.
“의신이가 사라졌어! 높은 수준의 은신 스킬이나 광림을 쓴 것 같아.”
주수혁이 잠시 천리안을 거두고 고개를 들었다.
아직 검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조의신은 검은 눈을 내리게 하기 위해서 이능파를 상당히 소모했을 것이다.
그 후에 천리안으로 탐지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은신 이능을 썼다면, 이능파가 남아나지 않을 거다.
유상훈은 물론이고 머리는 잘 못 쓰지만 싸움 머리는 있는 맹효돈이 그 말뜻을 알아들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주수혁이 부드럽게 말했다.
“멀리 가진 않았을 거야. 다시 찾아볼게.”
그러나 조의신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혹시 호랑이 쪽에 돌아갔나 싶어서 그쪽도 살펴보았으나, 호랑이는 오색 옷깃으로 감긴 무언가 앞에서 조의신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앉아 있었다.
호랑이는 마치 여기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크르르!’ 하고 목을 울리기까지 했다.
주수혁이 좀처럼 조의신의 행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저쪽일 것 같다.”
맹효돈이 백운봉을 가리켰다.
“왜?”
“그냥 저쪽이 수상해 보였다.”
유상훈의 물음에 맹효돈은 별 이유를 대지 못했다.
하지만 주수혁은 맹효돈의 감을 믿기로 했다.
주수혁이 천리안으로 백운봉 주변을 살핀 순간, 시야가 흐려졌다.
얼핏 보기에는 산봉우리에 안개가 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주수혁은 그게 안개 탓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백운봉 쪽에 천리안의 시야를 방해할 만큼 강력한 무언가가 있어.”
천리안을 비롯한 통찰계 스킬에는 한계가 있었다.
조의신이 사용한 지력의 여파가 남은 천단수 쪽을 보려 해도 잘 보이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 백운봉 쪽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안개가 없더라도 주변에 힘이 산개해 있는 곳을 천리안으로 들여다보면 흐리게 보이곤 했다.
주수혁은 이능파를 끌어올려 천리안의 출력을 높였다.
그러자 황금빛이 번쩍이고 그 사이로 교복 자락이 보였다.
주수혁이 얻은 단서는 적었으나 상황 판단을 하기에는 충분했다.
“은광고 교복을 입은 누가 싸우고 있어. 의신이가 지금 도우러 가는 중인가 봐.”
“야, 가자.”
“어.”
천리안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무언가가 있는데도 세 사람은 망설임 없이 백운봉으로 향했다.
세 사람은 최대한 기척을 죽여 백운봉으로 향했다.
백운봉에 가까워졌을 때, 그들은 거대한 힘이 격돌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12지의 수장, 황호와 우마왕이 싸우고 있으니 그 여파가 퍼질 수밖에 없었다.
맹효돈은 백운봉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진짜 방해가 되는 거 아니야?’
맹효돈은 저 싸움에 휘말려 다치는 건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잘못 나섰다가 방해가 되어 조의신이 벌인 수상한 짓이 잘못되거나, 그가 다치는 건 무서웠다.
보호대를 착용한 팔뚝에 식은땀이 흘렀다가 차게 식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맹효돈은 앞으로 걸어갔다.
맹효돈의 감이 멈춰서는 안 된다고 고하고 있었다.
저 너머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익숙했던 탓일지도 모른다.
‘부반장 그 새끼 힘이 아니야. 그런데 익숙해. 뭐지?’
맹효돈은 곧 그 익숙함의 정체를 깨달았다.
저 멀리 교복 차림의 황지호가 청금색 뿔을 지닌 진족에게 봉을 겨누고 있는 게 보였다.
황지호의 눈과 머리카락이 평소와 달리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으나 맹효돈이 1년 가까이 본 돌아이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백운봉에서 격돌 중인 두 개의 힘 중 하나는 1학년 0반 급우의 것이었다.
‘돌아이잖아! 저 새끼 오늘 학교 안 온다고 하지 않았나?’
1학년 0반의 돌아이는 가끔 조의신과 수상한 짓을 같이 벌이는 것 같긴 했다.
지금 그가 여기에 있는 것도 그 수상한 짓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맹효돈에 이어 주수혁, 유상훈도 황지호의 모습을 한 황호를 알아봤다.
그들이 놀랄 틈도 없이 두 진족의 싸움이 다시 전개되었다.
카아아앙!
황호가 휘두른 봉과 우마왕의 쌍검이 충돌했다.
그 순간,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스르륵’ 하고 까마귀 가면을 쓴 조의신이 나타났다.
조의신은 우마왕의 꼬리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맹효돈은 그 모습을 보고 숨을 헉 하고 크게 들이켰다.
“저, 저 새끼 지금 뭐하는 거야. 잡고 나서 은신을 풀어야지!”
그렇게 말하고 나서 깨달았다.
조의신은 저 은신 이능을 유지하지 못할 만큼 힘을 소모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마왕은 꼬리에 접근한 조의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폭발하듯이 터져 나가는 이능파 탓에 그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으나, 우마왕이 조의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기습하자.”
주수혁이 조용히 쌍검을 들어 올리자 유상훈이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세 사람의 머릿속에 순간 오늘 일어난 일이 떠올랐다.
학생회관 1번 출구, 마족이 습격했을 때.
학생들은 인비디우스의 사제를 상대로 기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 결과, 조의신이 몸을 던지고 권레나가 이능 바이올린을 희생했다.
때에 맞춰 공청훤이 등장하지 않았으면 누군가가 죽거나 크게 다쳤을 것이다.
사기가 떨어지고 움직임에 망설임이 생기려 할 때, 주수혁이 말했다.
“이번에는 성공할 거야.”
주수혁이 쌍검을 굳게 쥐고 앞장섰다.
주수혁도 그 장면을 떠올렸을 텐데, 앞을 보는 시선에 흔들림이 없었다.
그 모습에 뒤에 서 있는 맹효돈과 유상훈이 힘을 얻었다.
주수혁은 작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우마왕이 쥔 칼을 노려야 하는 가장 위험한 역할은 주수혁이 맡겠다고 나섰다.
“기습을 가할 때까지 계속 기척을 죽여야 해. 한쪽으로 가면 들킬 수도 있으니 방향을 나눠서 이동하자. 내가 정면으로 갈게.”
셋으로 나뉜 이들은 천천히 숨을 죽이고 조의신을 향해 갔다.
기척을 죽여야 했기에 유독 발이 무겁고 느리게 느껴졌다.
끼기기긱!
조의신이 든 검은 쇠스랑이 그의 목을 누를 기세로 밀리고 있었다.
쇠스랑을 타고 올라오는 우마왕의 불길한 빛의 이능파가 당장이라도 조의신을 삼킬 것만 같았다.
쌍검을 쥔 주수혁의 손이, 조의신을 죽이려 하는 우마왕을 보는 맹효돈의 눈이, 방패를 짊어지고 달리는 유상훈의 발이 조의신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주수혁의 쌍검이 기습의 시작을 알렸다.
기습을 하며 등장한 세 사람을 본 조의신은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뭐든 알고 있는 것 같은 조의신이 세 사람의 등장은 예측하지 못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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