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663화 (659/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63)

87. 별이 없는 세계 (5)

호족의 죽림.

죽호가 관리하는 이곳은 늘 적막했다.

죽림에 초대할 만한 손님은 거의 없었고, 가끔 찾아오는 불청객은 죽림에 발을 딛기가 무섭게 죽호의 손에 스러졌다.

최근에 들어서는 죽호의 제자, 김유리가 수련을 위해 찾아오곤 했으나 그녀가 없을 때에는 기껏해야 바람 소리만 가끔 들리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 대나무숲에 소리와 빛이 가득했다.

쉬이이익!

“크, 크윽…….”

황금의 칼날이 저강렵의 복부를 꿰뚫고 저강렵이 고통으로 부들부들 떨었다.

벌써 몇 차례나 반복된 일이었다.

황호가 질문을 던지고, 저강렵이 답하지 않거나 거짓을 고하면 가차 없이 칼날이 내리꽂혔다.

평범한 인간이었거나 약한 진족이었다면 저강렵은 진작에 죽거나 기절했을 것이다.

저강렵은 결계를 얼려 버린 후 이능파를 거의 다 소진하여 회복이 더뎠으나 강력한 진족답게 다시 이능파가 차오르고, 그에 맞춰 몸이 재생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황호는 저강렵이 죽지 않을 정도로 가감하여 공격하고 있었다.

황금의 칼날에 묻어 나온 핏줄기를 보는 황호의 눈이 한없이 냉정했다.

“아직 거짓을 고할 기력이 남아 있었다니.”

“거짓, 이라니…….”

“이 지경이 되고도 잡아뗄 생각인가? 키모폴레이아호에서 벌인 네놈의 흉계를 모르고 있을 줄 알았더냐.”

황호의 목소리는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서늘해질 만큼 가라앉아 있었다.

말없이 지켜보던 황금의 돼지, 굴린부르스티는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하며 고문 과정을 지켜봤다.

황호의 말에 의하면 저강렵은 키모폴레이아호에서 주오 그룹과 TC 그룹의 차기 총수들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듯했다.

굴린부르스티는 처음으로 그 사실을 듣고 크게 충격받았다.

‘한반도의 인간들에게 돈족이 피해를 입은 적이 없는데, 왜 그런 짓을! 무슨 일을 벌인다는 건 알았지만 인간을 죽이려 했다니.’

굴린부르스티는 이계 충돌이 발생한 후, 저강렵을 주축으로 돈족들이 한반도에 모이기 시작했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굴린부르스티는 한반도에 가지 않았다.

대신 굴린부르스티가 섬겼던 풍요의 신 프레이의 흔적을 따라 각지를 헤맸다.

굴린부르스티는 에이트리, 브록크 형제의 작품답게 튼튼한 황금의 갑주를 부르는 힘을 지녔으나, 그것만으로는 상위 존재가 될 만한 업적을 쌓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일찌감치 포기하고, 지력에도 욕심내지 않고 프레이의 전승이 남은 지역을 떠돌기로 한 거다.

그 결과 굴린부르스티는 한반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했고, 돈족이 어떤 짓을 했는지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저강렵이 굴린부르스티에게 제안했다.

―크흠, 네가 모시던 상위 존재와 만나고 싶지 않나?

―당연히 보고 싶지. 하지만 상위 존재가 현계와 접촉하는 건 어려운 일이잖아. 난 프레이에게 가호를 받은 것만으로도 만족해.

가호를 통해 프레이의 존재를 어렴풋이 느꼈지만, 만날 수는 없었다.

먼 옛날 등에 프레이를 태우고 달릴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프레이의 존재가 멀었다.

하지만 만족한 척하지 않으면 프레이가 무리해서 강림할까 봐 꾹 참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만날 방법을 알려 주마.

저강렵이 그런 제안을 하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이브 아침, 저강렵은 굴린부르스티에게 그 방법을 알고 싶으면 돈족과 함께 은광고로 향해 싸우라고 지시했다.

굴린부르스티는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은광고에 도착할 즈음, 돈족은 굴린부르스티에게 천계의 수군과 합류하여 학생을 구하러 오는 진족이나 플레이어 팀을 상대하라고 지시했다.

뭣도 모르고 한반도까지 와서 크리스마스이브에 학생을 죽이는 계획에 참가할 뻔한 굴린부르스티는 어떻게든 대참사를 막아 보려 했으나 시간이 없었고, 그의 힘만으로는 막을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저강렵은 작전의 상세한 내용을 늦게 말해 줬어. 내가 그 작전에 따르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아서일까?’

굴린부르스티가 만약 조금만 더 일찍 알았다면 12지 동맹이나 플레이어 협회와 접촉하여 이 사건을 막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굴린부르스티가 작전에 관해서 안 건 사건이 벌어지기까지 한 시간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게다가 작전을 듣는 순간에는 주변에 함께 움직이는 돈족이 많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굴린부르스티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혼자서 저항하는 것밖에 없었다.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했지.”

그때, 황호가 굴린부르스티에게 말을 걸었다.

갑자기 말을 걸어올 줄 몰랐기에 반응이 늦었다.

그래도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자 황호가 황금의 칼날을 움직였다.

쉬이익!

황호가 움직인 칼날이 저강렵의 얼굴에 꽂히려 했다.

반사적으로 저강렵이 고개를 움직여 그 칼날을 겨우 피했다.

저강렵이 고개를 돌린 덕에 굴린부르스티는 그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지금 묻도록. 지금이 아니면 이자와 네가 만날 일은 다시는 없을 테니.”

황호는 굴린부르스티에게 기회를 줄 겸, 정보 수집을 할 겸 이 자리에 부른 듯했다.

굴린부르스티가 하고자 하는 질문은 딱히 숨길 만한 것도 아니므로 황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저강렵, 너는 내게 프레이를 이 세계에서 만날 방법을 알려 준다고 했지.”

“…….”

저강렵은 굴린부르스티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지만, 반응이 묘했다.

굴린부르스티는 저강렵의 눈이 텅 빈 것처럼 보였다.

고통과 모멸감, 분노 등이 휘몰아쳤던 저강렵의 속이 갑자기 공허해진 듯했다.

“무슨 방법을 쓰려고 했던 거야?”

“…….”

저강렵은 답하지 않았다.

굴린부르스티가 말을 바꿔서 다시 물어봐도 마찬가지였다.

황호는 굴린부르스티가 질문하는 걸 세 번 기다렸다가 다시 황금의 칼날을 들었다.

“순순히 대답할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강제로라도 들어야겠군.”

황호는 입을 열게 할 겸, 칼날을 입에 꽂아 넣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황호가 칼날을 움직이기 전, 줄곧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던 제천대성이 입을 열어 제지했다.

“잠깐, 나도 팔계에게 물어볼 게 있다.”

굴린부르스티는 저강렵의 배가 난도질당하는 동안, 이를 담담히 관람했으나 제천대성은 손뼈가 부수어질 기세로 주먹을 쥐고 이를 바라보았다.

제천대성 역시 황호 못지않게 저강렵을 팼다고 하나 눈앞에서 저렇게 고문당하는 꼴을 지켜보는 건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닐 거다.

하지만 제천대성은 단 한 번도 개입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나를 말릴 생각이라면 죽림에서 내보내겠다.”

“그렇게 느껴졌다면 미안하군. 황호, 나는 너와의 약속을 어길 생각이 없다. 그저 저 돈족과 내가 비슷한 의문을 품은 것 같았을 뿐이다.”

제천대성이 한 말의 진위를 가늠하듯 황호가 그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 황금빛이 일렁이는 걸 보며 굴린부르스티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지켜봤다.

‘호족의 수장은 태만하다더니.’

황호의 신경은 잘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호족의 신역에서 이 난리가 났으니 수장으로서 저리 반응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결국 일은 전부 호족의 뜻대로 수습되지 않았던가.

승리의 기쁨을 누려도 이상하지 않을 타이밍인데 황호에게선 그런 기색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제천대성도 이를 느꼈기에 말을 신중하게 고르는 듯했다.

“무슨 의문을 품었는지 말해 봐라.”

짧은 침묵 끝에 황호의 허락이 떨어졌다.

제천대성은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저강렵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다가갔다고는 해도 죽호와 황호가 더 가까이 서 있는 상태였다.

“팔계야. 너는 이 세계의 섭리가 무너지고 혼란이 닥치면, 우리의 여행이 다시 시작될 거라고 했다.”

“…….”

“그때 말한 ‘우리’에는 나와 너만 포함된 게 아닌 것 같구나. 그렇지?”

제천대성이 확신을 품고 되물어도 저강렵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저강렵의 텅텅 빈 것 같은 눈에 눈물이 그득 고여 떨어져 내렸다.

고통에 울부짖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저강렵이 저리 반응하는 걸 보면, 제천대성의 추측은 사실인 것 같았다.

굴린부르스티는 그 말의 뜻을 해석해 보았다.

‘제천대성과 저강렵의 여행이라면, 서천취경을 의미하는 거겠지. 그리고 둘만 포함하는 게 아니라면…….’

저 둘을 제외한 여행의 동료, 삼장법사, 사오정, 백마는 현재 상위 존재의 자리에 올랐다.

저들이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그 셋이 이 땅에 내려와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설마 프레이를 만난다는 방법이라는 게…….’

굴린부르스티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 황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상위 존재를 이 땅에 끌어내릴 계획을 세우고 있나 보군. 그것도 하나도 아닌 여럿을.”

*    *    *

황명호 대저택, 은호가 머무는 현대식 별채.

외출을 마친 별채의 주인이 돌아오고 있었다.

단정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은호였다.

“다녀왔습니다.”

별채의 거실은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맞춰 단장된 상태였다.

트리는 없어도 솔방울과 리본으로 장식된 리스가 곳곳에 배치되었고, 작은 산타 모양의 장식품도 있었다.

오늘 사건이 마치면 곧바로 사건 뒷수습 회의를 핑계로 조의신을 불러내 크리스마스 파티를 할 생각으로 준비한 장식품들이었다.

큰 사건이 마무리되었으니 조의신이 무슨 핑계를 대더라도 회의를 거절하긴 어려울 거다.

그 생각으로 은호가 직접 황호가 의뢰한 크리스마스 토퍼를 만들 겸, 각종 장식품들을 직접 제작했다.

하지만 넓은 거실에는 어린 모습의 황호가 혼자 있을 뿐, 다른 호족들과 조의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황호 님은 ‘황지호’의 모습으로 오실 줄 알았는데…… 의신이 형이 ‘황유호’의 모습에 약하다는 걸 알고 일부러 저쪽을 택한 걸까?’

은호가 그런 생각을 감추고 온화하게 미소 지으면서 황유호의 모습을 한 황호에게 다가갔다.

황호는 은호를 올려다보며 답했다.

“……왔군. 오늘 고생 많았다.”

“고생은요. 고생은 다른 분들이 하셨죠. 동하 형과 통화했는데 목소리에 힘이 없는 게 고생이 많았던 것 같았어요.”

은호가 황호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은호는 차를 준비하며 말했다.

찻잔을 여러 개 꺼내는 게, 곧 다른 호족과 조의신이 올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황호 님 혼자 계신가요? 뒷수습이 아직인가 봐요. 제가 조금 일찍 왔나 보네요.”

“……백호와 조의신은 많이 늦을 것 같군.”

“저녁 식사 전까지는 오시겠죠?”

“…….”

황호는 답하지 못했다.

조의신이 언제 올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백호는 조의신이 올 때까지 그 균열에 서서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백호,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냐.

―기다리겠다.

―조의신이 돌아올 때까지?

―그렇다.

손을 놓은 건 백호인데 미련하게 저렇게 기다린다는 말에 부아가 치밀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보네요. 형님들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숨겨 봤자 은호가 언젠가 알게 될 사실이었다.

말하는 게 매우 힘들었지만, 황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세히 전했다.

황호의 말이 길어질수록 은호의 입가에 걸린 미소에서 온화함이 사라져 갔다.

모든 상황을 전한 후에는 차가 식어 있었고, 은호는 식은 차 못지않게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황호가 말을 마칠 때까지 한마디도 안 하던 은호가 입을 열었다.

“황호 님, 부탁드릴 게 있어요.”

“말해 봐라.”

은호가 찻잔을 내려 두고 말했다.

“토연 님을 뵙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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