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65)
87. 별이 없는 세계 (7)
은광고 1학년 건물의 교무실.
넓은 교무실에 김신록 혼자 앉아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아 쉬는 교사도 있었고 학교에 나온 교사들은 현재 뒷수습으로 바빴기에 자리를 비웠다.
물론 용제건처럼 냉큼 집으로 귀가한 교사도 드물지만 있긴 했다.
그 생각에 김신록은 울컥한 기분이 들 뻔했으나 좋은 날이니 좋은 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1반 아이들도 무사하고, 지익회 아이들도 모두 무사해. 다행이다.’
정체가 들킬 가능성을 염려해 결계가 재가동한 이후 김신록은 교사로서의 업무만을 처리했다.
그럼에도 물 한 잔 마실 여유가 없을 만큼 바빴다.
하지만 그렇게 바쁜데도 김신록은 담당하는 모든 아이들의 무사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직접 얼굴을 보지 못하더라도 메시지를 보내거나 임원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안부를 물었다.
김신록은 교사로서 학생을 챙기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확인했다고 여겼으나 아이들은 대부분 눈치채고 크게 감동했다.
그 탓에 담임 선생님을 지킨답시고 훈련을 계획하는 1반 아이들의 의욕이 더욱 상승하였으나 김신록은 이를 알지 못했다.
김신록은 마지막으로 도착한 안부 메시지를 확인한 후, 뉴스를 확인했다.
대부분의 언론사에서 은광고에서 벌어진 사건을 주요 토픽으로 삼고 있었다.
‘황명 재단 홍보팀이 나서도 뉴스가 계속 나오는 걸 막을 수는 없겠지.’
가능하면 종이 신문으로 읽고 싶었지만, 아직 영상 뉴스와 웹으로 발간된 신문 기사밖에 없었다.
김신록은 아쉬워도 기사와 뉴스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그러던 중 한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용제건이 여의보주로서 기적을 발휘해 학교를 지켰다는 내용이었다.
‘오늘 기적이 하나 더 추가되었으니까 개정판을 내야 하나…….’
드르륵.
김신록이 서랍을 열자 종류별, 색깔별로 정리된 문구류와 노트가 보였다.
김신록의 시선은 서랍 한구석에 놓인 책, ‘여의보주의 기적’이었다.
여의보주의 기적을 새로 찍어야 할지, 아니면 따로 페이지를 인쇄해서 배부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중, 용제건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학교를 빠져나가는 붉은 사자 팀과 용족의 모습을 멀리서 찍은 사진이었다.
그 사진에는 염준열 옆에 선 용제건도 찍혀 있었다.
용제건은 눈가리개를 착용한 상태였다.
‘아니, 눈가리개를 해야 할 만큼 신격이 오르고 기사화도 됐는데 내가 굳이 그럴 필요는 없나. 내가 안 도와줘도 알아서 승천할 테니까.’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김신록의 머릿속에서 어느 숫자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용제건이 승천할 때까지 남은 시간이었다.
‘할 일이 많으니 그 용이 승천하든 말든 신경 쓰지 말아야 할 텐데…….’
그렇게 마음먹은 것과 달리 의욕이 나지 않아서 그저 앉아 있을 때, 디바이스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발신자의 이름을 보고 김신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도 못 한 인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성국언]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저 성국언입니다.
[성국언] 은광고 소식을 들어 안부 인사차 연락드렸습니다. 시간 되실 때 답변 부탁드립니다.
성국언은 사무적인 말투로 보냈으나 메시지 내용에서 걱정이 뚝뚝 묻어났다.
현재 이계부와 플레이어 협회가 충돌하고 있기에 유일한 플레이어 정치인으로서 성국언은 다사다망하다.
그런 와중에 성국언이 친분을 다져 봤자 정치적으로 아무런 이득이 없는 김신록에게 안부를 묻고 시간을 할애한다는 건 참 미안하고 고마운 일이었다.
김신록은 그런 감상을 숨기고 업무 메일을 작성하듯 답장을 보냈다.
[성국언] 선생님이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조만간 또 찾아뵙겠습니다.
[성국언] 좋은 성탄절 보내십시오.
성국언의 크리스마스 인사까지 보니 김신록의 마음은 더욱 어지러워졌다.
그럴 리가 없는데, 자꾸 성국언이 자신의 정체를 알아챈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솟았다.
축제 때 성국언이 찾아와 그렇게나 사이가 나빴던 용제건과 체스를 두었다는 사실도 떠올라 의심은 더욱 깊어졌다.
‘아니야, 그걸 알았다면 성국언 학생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성국언 학생이 진족과 후예를 얼마나 싫어했는데, 나 같은 기만자를 두고 볼 리가…….’
의심에 이어 자학이 더해지려는 순간, 조의신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붉은 사자 팀 빌딩에서 반 강제로 묵고 가게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함근형 선생님과 성국언 선배님 사이가 어땠는지 기억하고 계시나요?
―······아주 좋지 않았죠. 원칙주의자셨던 함근형 선생님과 다소 개구지던 성국언 학생은 물과 기름 같았습니다.
―두 분이 얼마 전에 홍천에서 만난 적이 있었어요.
조의신은 함근형과의 일화로 성국언이 어떻게 변했는지 말해 줬다.
그렇다면 성국언이 김신록의 정체를 알아도 선생님 대접을 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고 있자니 다정한 음성이 이를 중단시켰다.
“아들아.”
“……적호 님!”
“쉬엄쉬엄하거라.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일을 그렇게 해서야 되겠느냐.”
적호는 김신록 앞에 각종 뉴스와 기사 홀로그램이 떠 있는 걸 보고 일하는 것이라고 착각한 듯했다.
차마 딴생각을 하느라 멍청하게 있었다고 고할 수 없어 김신록은 말을 삼켰다.
적호가 와 줘서 그런지 뒤틀리던 속이 진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적호 님, 어떻게 여기에…….”
적호는 김신록의 머리카락으로 가려진 왼쪽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김신록의 눈에 적호는 조금 지친 것처럼 보여서 걱정스러웠다.
적호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갑자기 네 얼굴이 보고 싶더구나. 슬슬 저택으로 가야 하니 마중 나왔다.”
일 핑계를 대기에는 적호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여 김신록은 알았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두 부자는 사이좋게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바로 황명호 대저택의 현대식 별채로 향했다.
아들과 이야기한 덕에 적호는 평정심을 어느 정도 되찾았으나, 별채에 도착하자마자 기분이 곤두박질쳤다.
“흐어어어엉, 허어어어어엉!”
현관문을 열자 꺼이꺼이 통곡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적호는 그게 옥토연이 우는 소리라는 걸 알아채고 몹시 불쾌해졌다.
역시나 거실 한복판, 선물로 추정되는 상자들 사이에서 펑펑 울고 있는 옥토연이 보였다.
“토연 님, 그렇게 울면 지쳐요. 바닥이 차니 적어도 소파에 앉아서 우세요.”
“흑, 끄흑, 허어어어어어엉!”
은호가 다정하게 달래자 더 서러워졌는지 옥토연이 바닥을 치면서 크게 울어 댔다.
눈물을 애써 참고 있는 옥토윤이 부축하여 소파에 앉힌 후에야 바닥을 때리는 짓을 그만했다.
바닥이 부수어지면 옥토연에게 몇 배로 수리비를 청구하고, 옥토연의 주먹이 부수어지면 그건 그거대로 좋을 거라고 생각했던 적호가 이를 아쉽게 여겼다.
적호는 얼떨떨해하는 아들을 볕이 잘 드는 자리에 앉힌 후 은호에게 불만을 표했다.
“이 좋은 날에 굳이 옥토연과 만나야겠습니까? 차라리 그럴 바에는 본채에 있는 손주나 만나는 게 어떻습니까?”
“토연 님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그 아이들이 무사히 자라지 못했을 거예요.”
“은호…….”
옥토연은 감격에 차 평소보다 붉어진 눈으로 은호의 이름을 불렀다.
실컷 울고 은호가 달래 준 덕에 어느 정도 정신이 들었다.
호족들은 은호가 일어나 있는데도 딱히 감동을 받았다거나 놀란 태도가 아닌 걸 보아하니 일어난 지 꽤 된 것 같았다.
일찍 은호의 소식을 알려 주지 않은 미친 호랑이들을 향한 원망이 치솟았다.
“끄흑, 왜 은호가 일어난 거 안 알려 줬어!”
“은호의 후예를 몇천 년 동안 숨긴 토족이 할 소리입니까?”
“둘 다 제가 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서 생긴 결과네요. 토연 님, 적호 님, 탓하려면 저를 탓하세요.”
은호가 끼어들자 옥토연과 적호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은호를 탓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크리스마스이브가 지나기 전에는 신중하게 움직이려 했어요. 일찍 알리지 못해 죄송해요.”
“아냐, 괜찮아!”
일찍 알려 주지 않았다며 징징거리던 옥토연은 바로 태도를 바꾸었다.
그러다 주변을 휙휙 둘러보다가 말했다.
“은호, 애들은 여기 안 와?”
“그 아이들은 제가 눈을 뜬 걸 몰라요.”
“어…… 오늘 말할 거야?”
“생각 중이에요.”
눈치가 없고, 눈치를 키울 생각도 없는 옥토연이지만 은호가 후예들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꺼린다는 걸 눈치챘다.
은호가 후예를 맡기며 했던 말을 생각하면 이상한 건 아니었으나 저 말을 들으니 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계속 울어도 은호가 달래 줄 거란 생각에 옥토연이 그냥 맘먹고 울려고 할 때였다.
“네놈에게 물을 게 있어서 불렀다.”
줄곧 말이 없던 황호가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를 듣자 옥토연과 옥토윤이 긴장했다.
옥토윤은 반사적으로 옥토연의 어깨를 안아 황호로부터 보호하려 했다.
‘황호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여. 은호도 그래. 은호는 황호보다 잘 숨기고 있지만.’
황호는 기껏해야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음성에서 진득한 인내심과 억눌린 마음이 느껴졌다.
그게 폭발하면 제일 먼저 옥토연이 휘말릴 게 분명했다.
옥토윤이 원인을 추측하려 했지만 짚이는 게 없어 황호의 말을 기다리기로 했다.
“조의신이 명계로 떠났다. 나와 백호의 눈앞에서 명계의 바닥으로 떨어지고, 메시지를 남겼다.”
“조의신이 말입니까? 명계라니!”
“그런……!”
적호와 김신록도 몰랐던 건지 그들이 경악했다.
황호의 말뜻을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끔뻑이던 옥토연이 울상이 되어 소파를 퍽퍽 내리쳤다.
“뭐? 은인이 죽었어? 은인은 인간이면서 목숨 아까운 줄 모르더니, 아이고오……!”
짜악!
“아팟!”
눈치 없는 옥토연의 반응이 황호의 화를 더 돋우자 옥토윤이 빠르게 등을 후려쳤다.
황호가 ‘우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황호는 음산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멋대로 조의신을 죽이지 마라. 헛소리를 하면 네놈을 죽여 명계로 보내서 조의신의 안부를 확인하게 하겠다.”
“은인 안 죽었어? 다행이다!”
“여기 계신 분들께 의신이 형이 남긴 메시지를 보여 드리죠.”
은인이 안 죽었다는 말에 기뻐하기 바쁜 옥토연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옥토윤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째서 은호가 고등학생인 조의신에게 ‘형’이라는 호칭을 쓰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른 호족들이 형이라는 말을 듣고도 개의치 않는 것도 이상했다.
“조의신이 명계에 가기 전에 메시지를 남겼습니까?”
“네, 메시지가 도착한 건 의신이 형이 명계에 간 후지만요.”
은호는 그렇게 말하며 홀로그램을 불러냈다.
조의신이 보낸 디바이스 메시지였다.
[조의신] 이 메시지를 받을 때쯤이면 나는 은광고에 없을 거야.
[조의신] 예정대로 살아서 명계에 가지 못했더라도 행동 불능 상태가 되어 예약 메시지를 취소할 수 없는 상황일 수도 있어.
[조의신] 어느 쪽이든 뒷수습을 맡기게 되는 건 마찬가지겠지. 미안해.
메시지를 읽고 말을 잃은 이들 사이에서 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의신이 형의 유서도 인사말과 사과로 시작했죠. 정말 의신이 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요.”
“하.”
은호의 말을 들은 황호가 짧게 탄식했다.
‘의신이 형의 유서’라는 말에 뒤늦게 반응한 이들이 당혹감과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은호는 스크롤을 내려 조의신의 메시지를 계속 보여 주었다.
[조의신] 앞으로 둘 수가 많으니 최대한 빠르게 돌아갈 거야. 하지만 늦거나 돌아오지 못할 때를 대비해서 준비한 수에 관해 정리해 뒀어.
[조의신] (첨부 파일)
덤덤하게 ‘돌아오지 못할 때’라는 표현까지 나오자 분위기는 더 험악해졌다.
남은 이들에 대한 사과와 앞으로의 일에 관해 쓰여 있을 뿐, 조의신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메시지는 별로 길지 않아 곧 끝이 보였다.
[조의신]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살피고, 윤회의 굴레에 있는 파수꾼을 만나러 갈 거야.
[조의신] 직접 전하지 못할 때를 대비해서 내가 얻은 정보를 전하기 위해 수를 둘 생각이야. 토족의 수장님께 메시지를 보내 뒀어.
“어? 진짜 은인이 메시지 보내 놨네!”
옥토연이 디바이스를 열어 태평한 소리를 하는 가운데, 호족들 사이에서 어두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조의신은 자신이 명계에서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을 계속 시사하고 있었으니까.
[조의신] 미리 말하지 못하고 뒷수습을 전부 맡겨서 미안해.
[조의신] 메리 크리스마스.
돌아가기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