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66)
87. 별이 없는 세계 (8)
붉은 사자 팀 빌딩, 용족의 영역과 이어지는 지하 연회홀.
평소에는 방송에 출연한 염준열의 영상 상연회가 열리던 이곳은 파티를 위해 단장되어 있었다.
연회홀 중앙에는 거대한 트리가 두 개 놓여 있었는데, 하나는 붉은 사자의 팀 로고가 다른 하나는 용을 상징화한 장식이 달려 있었다.
크리스마스 파티 겸 작전에 투입된 이들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파티다운 장식품들이었다.
외부 손님 없이 가족끼리 진행하는 파티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화려한 파티장이었다.
그러나 분위기와 달리 오가는 대화는 심상치 않았다.
“무녀들이 발견되었나?”
“네, 마스터.”
팀 로고가 새겨진 산타 모자를 쓴 염방열이 심각한 표정으로 정보팀의 보고를 들었다.
쇼핑 도중 사라진 녹(綠), 벽(碧), 자(紫)는 쇼핑몰 안에서 발견되었다.
그들은 미로처럼 복잡한 대형 쇼핑몰에 흩어져 있었다.
이 셋은 포장된 선물들이 가득 들어 있는 쇼핑백들 사이에서 쓰러져 있었다.
기도실에서 기도하던 유황(硫黃)과 홍(紅)의 모습도 확인되었다.
기도실의 문을 굳게 잠근 이능파가 사라져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기절한 유황과 그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홍이가 있었다.
정신을 잃은 무녀들의 공통점은 하나였다.
바로 검은 눈송이를 뒤집어썼다는 것.
“은광고 안에서 검은 눈이 내렸지. 그 눈을 뒤집어썼다는 건 은광고에서 수작을 부렸다는 증거로군.”
염방열이 혀를 차며 말했다.
재앙이나 불행이 일어나도록 빌고 기원하는 이능에는 강력한 리스크가 존재한다.
저주에 실패하거나 정화되었을시, 그 저주가 술자에게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은광고에 삿된 눈이 내리도록 가담한 무녀들은 강력한 정화의 힘으로 인해 오히려 눈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이 안에 가족이 아닌 자가 있었다니. 여태까지 신중하게 움직인 건, 무고한 무녀가 있으리라 믿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염방열은 은인의 말을 믿고 행동했으나 ‘혹시나’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용왕신의 무녀들과 유사한 힘과 입장을 가진 누군가가 그녀들을 가장해 일을 꾸몄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하지만 그 기대는 검은 눈을 내리게 한 은인이 보여 준 증거로 부서지고 말았다.
보고를 올린 정보팀 소속 팀원이 확인차 물었다.
“그렇다면 유일하게 무사했던 홍이를 제외하고 검은 눈을 뒤집어쓴 넷을 배신자라 보아도 되겠습니까?”
“단언할 수 없다.”
염방열과 마찬가지로 씁쓸한 감정에 잠겨 말을 아끼던 청룡이 입을 열었다.
청룡은 정보팀이 보고한 내용을 되짚으며 말했다.
“기절한 무녀들의 이마에 같은 모양의 문장이 떠올라 있다고 하지 않았나?”
“네, 유황색, 녹색, 벽색, 자색 네 가지 색이 같은 위치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생사고락을 나누는 옛 술법의 흔적 같군. 이 술법을 함께 새긴 자들은 힘을 얻으면 이를 나눠 얻고, 상처를 입으면 나눠서 다치게 된다.”
청룡은 넷이 사용한 이능의 원리에 관해 설명하였다.
“다만 서로의 이능파를 새기는 데에 10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지. 홍이는 아직 무녀가 된 지 몇 년 안 됐으니 본인의 의사가 있어도 그 술법을 몸에 새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몇 명이나 배신한 건지 알 수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다. 전원이 배신자일 수도 있고, 두 명이 배신자일 수도 있는 셈이다.”
알게 된 거라고는 배신자들이 무척이나 교묘하고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것뿐이었다.
침묵이 길어지려고 할 때,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 단서를 얻지 못한 건 아니야. 우리의 은인이 메시지를 보냈어. 범인 중 하나는 유황이래.”
눈가리개를 착용한 용제건이 불쑥 끼어들었다.
용제건은 조의신이 보낸 디바이스 메시지를 보여 주며 말했다.
조의신이 우마왕과 격돌하기 전, 통신이 재개되면 발송되도록 예약해 둔 메시지였다.
조의신이 보낸 메시지에는 아무런 증거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나 믿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최고참 유황이? 수십 년을 같이 지냈는데 그런……!”
청룡이 탄식했다.
염방열이 용족의 가족이 된 것보다, 유황이 무녀로서 용족 사이에 머문 시간이 두 배 이상 길었다.
배신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과 배신자라고 판별된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었다.
“은인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만, 지금 연락이 됩니까?”
“당분간 연락이 어려울 것 같다는데.”
“얼마나 기다리면 되겠습니까?”
“자신의 부재가 길어지면 황호를 찾으라더라.”
염방열과 용제건이 대화를 하는 사이 청룡은 흔들리던 마음을 잡았다.
용족의 수장으로서 가족을 위협하는 존재를 두고 이렇게 흔들릴 수는 없었다.
“그렇군. 초하룻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기다려 보다가 황호에게 연락해 보마. 그럼 우선 유황의 감시를 더욱…….”
청룡이 말을 잇기 전에 용제건이 조용히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용제건은 들어 올렸던 손을 움직여 연회홀의 정문 쪽을 가리켰다.
손끝을 따라가 보니 염준열이 들어오고 있었다.
염방열은 아들의 등장에 반가워하면서 물었다.
“준열이의 기척을 느끼신 겁니까? 아니면 눈에 보인 겁니까?”
“보였어. 눈을 가렸는데 오히려 시야가 넓어지다니 신선한 느낌이야. 감각이 예민해져서 음식 맛도 더 좋아졌어.”
용제건은 묻지 않은 말에도 대답하면서 웃었다.
황홀한 웃음을 지을 때마다 꺼림칙한 느낌을 주던 용제건의 얼굴이었는데, 막상 눈가리개로 가려서 보이지 않으니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청룡은 서운함을 감추며 물었다.
“정말로 승천할 건가?”
“아마도? 저는 준열이한테 가 볼게요. 이쪽으로 주의를 못 돌리게 해야 얘기하기 편하겠지.”
용제건은 싱글거리며 염준열 쪽으로 갔다.
청룡과 염방열 말고도 주변의 용족이나 붉은 사자 팀 멤버들이 그의 눈가리개를 응시하는 걸 느꼈지만, 용제건은 모르는 척했다.
오늘은 친우와 은광고 학생들, 용족, 붉은 사자 팀 멤버들이 무사히 위기를 넘기고, 이야깃거리가 넘치는 날이다.
이제 그런 날도 끝이 다가오니 지금은 그저 오늘을 즐기기로 했다.
“준열아, 어머니께 인사드리고 온 거야?”
“네, 제건이 형. 파티장에 모셔 오고 싶었는데, 어려울 것 같아요.”
염준열은 귀가한 후 자신을 걱정했을 어머니께 인사드리러 갔다가 막 파티장에 도착하였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나는 색 배합의 스웨터로 갈아입은 염준열에게 너도나도 인사하였다.
염준열은 학교에서 있던 일을 걱정하는 말, 옷이 잘 어울린다는 칭찬 등등 모든 말에 성의 있고 친절하게 답했다.
염준열은 몇십 시간을 계속 깨어 있었으니 지칠 법도 한데, 기운이 넘쳤다.
힘이 넘치는 염준열을 보며 용제건의 입꼬리가 더 올라갔다.
“오늘 좋은 일이 있었나 봐?”
“네!”
염준열은 이능파 링크에 가담했던 순간에 느낀 흥분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갑자기 금찬솔로부터 자신에게로 넘어온 주도권.
이능파 링크를 하는 순간 거대해진 홍룡.
홍룡의 힘이 커지자 더욱 견고해진 이능파의 결속.
거기에 촉룡의 힘이 더해진 순간에 성공한 이계 지배까지.
염준열은 아직 이능파 링크에 관해 무지했으나 그 강대한 힘의 중심에 자신이 있었다는 걸 알 만큼 영민했다.
‘이능파 링크의 경험이 있는 아이들도, 촉룡 외할머니도 할 수 없던 일을 나는 할 수 있었어. 나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거야.’
그 비밀을 알게 되면 염준열은 한층 더 성장할 것이다.
그 힘을 다룬 순간, 거대화한 홍룡을 떠올리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힘을 다룰 때의 홍룡이라면 적벽괴도가 다루는 홍룡과도 견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를 넘어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준열이가 많이 기뻐할 만큼 큰일이 있었는데, 무슨 일인지 설명 안 하는 거 보니까 말할 수 없는 건가 봐.”
용제건은 염준열의 짧은 반응만으로도 많은 것을 유추해 냈다.
용제건이 말한 대로 이능파 링크는 쉽게 밝힐 수 없는 힘이다.
제갈재걸에게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했으니 아무리 가족이라도 이를 밝힐 수 없었다.
하지만 밝힐 수 있는 상대가 있었다.
이미 이능파 링크에 관해 알고 있는 인물, 조의신이었다.
‘의신이도 이능파 링크에 관해 알고 있었다니.’
조의신이 이능파 링크에 관해 알고 있다는 건, 금찬솔과 왕찬솔로부터 들었다.
이계 지배에 성공한 후, 제갈재걸은 이능파 링크에 관해 함구령을 내렸다.
이능파 링크에 관해서 알고 있는 건 협회 측에서도 극소수라고 했다.
제갈재걸이 비밀을 지켜 달라고 당부하는 과정에서 ‘이 일은 은광고에서 우리를 제외하면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자, 찬솔이들의 반응이 묘했다.
제자들이 이능파 링크의 비밀로 인해 위험해질까 봐 걱정이 깊었던 제갈재걸은 이를 곧바로 알아챘다.
제갈재걸이 추궁하자 그들은 조의신에게 말한 적이 있다고 자백하였다.
―그치만, 제갈 쌤의 잡지 초판 1쇄가 걸려 있었는데요!
―맞아, 어쩔 수 없었어욧!
―야이 치사한 놈들아, 너희가 그러고도 반장이냐!
―반장과 부반장을 탄핵하라!
금찬솔과 왕찬솔이 잡지 초판 1쇄에 이능파 링크의 비밀을 팔아먹었다는 말에 2학년 0반 일동의 눈이 뒤집혔다.
그 결과 아수라장이 되었고 제갈재걸은 둘에게 뭐라 할 틈도 없이 소란을 진정시켜야 했다.
탄핵안이 대두되어 임시 반장을 맡은 연가람이 날카로운 코멘트를 남겼다.
―아무리 초판 1쇄라 걸렸다고 해도 찬솔이들이 순순히 그 큰 비밀을 말할 리가 없는데.
연가람의 말에 금찬솔과 왕찬솔이 대놓고 딴청을 부리자 더욱 의심이 깊어졌다.
두 사람은 조의신이 지하 서고 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제갈재걸을 구했던 건으로 신뢰를 품은 것이었으나, 이는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게 2학년 0반은 난리가 났으나 염준열은 티는 못 내도 몹시 기뻐했다.
스승에게 비밀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바로 말씀드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스승님은 연락이 어렵다고 하셨지.’
염준열은 통신이 재개되자 도착했던 메시지를 떠올렸다.
조의신이 예약한 것으로 추정된 메시지였다.
[스승님] 당분간 연락이 안 될 수도 있어. 예정대로 일이 안 되면 추가로 메시지가 도착할 거야.
조의신은 성실하게도 스승으로서, 후배로서 각각 메시지를 보냈다.
메시지를 곱씹으니 어딘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런데 추가로 메시지가 도착할 거라니…… 무슨 뜻이지? 계속 연락이 안 되는 상황이 이어지면 또 예약 메시지가 도착한다는 뜻인가?’
조의신은 이중으로 메시지를 준비한 듯했다.
두 번째 메시지는 조의신의 진짜 유서가 될지도 몰랐으나, 염준열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어쨌든 조의신이 보낸 메시지들은 스승과 후배 버전에 따라 말투와 내용은 달랐지만 같은 문구가 있었다.
양쪽 다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말이 남겨져 있었다.
‘크리스마스 인사를 받았는데 왜 기쁜 마음이 들지 않는 걸까.’
그 위화감의 정체는 좀처럼 알아낼 수 없었다.
일단 염준열은 산타 모자를 쓴 홍룡 스탬프를 첨부해 열심히 답인사를 남겼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염준열이 보낸 메시지는 읽음 표시가 뜨지 않았다.
* * *
한없이 밑으로 떨어지는 감각과 함께 주변은 점점 어두워졌다.
눈은 계속 뜨고 있었는데,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워지니 내가 눈을 감은 건지 뜬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아니면 내가 인지하지 못했을 뿐, 기절했다가 정신을 차린 걸지도 모른다.
한참 동안 어둠이 계속된 후에야 내 등이 지면에 닿는 감각이 느껴졌다.
지면에 도달하고도 공기가 무겁게 느껴져 몸을 일으키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일어서서 눈을 몇 번 깜빡이자 드문드문 흐릿한 불빛이 보였다.
‘도착한 건가.’
내가 알고 있던 세계와 단절되어 버린, 죽음의 세계에 도착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그저 검고 어두웠다.
명계에는 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