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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667화 (663/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67)

88. 굴레 (1)

흐릿한 조명이 앞을 비추는 회랑 위, 나비령이 걷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딱딱한 바닥을 걷는데 발소리가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나비령의 긴 망사 망토 자락이 가끔 사락거리는 소리를 남겼다.

이윽고 나비령이 거대한 문 앞에 멈춰 섰다.

나비령이 섬기는 그자가 머무는 장소였다.

나비령은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고양된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번 승부는 그분의 완패야.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 보기 좋게 실패했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자는 나비령이 아는 그 누구보다 비정하고 감정을 숨기는 데에 능숙했다.

기민하게 상대의 반응을 읽는 나비령조차 그자의 심경 변화는 쉽게 읽지 못했다.

나비령이 읽을 수 있는 감정이라곤 오랜 기간 쌓아 온 천신을 향한 사무치는 증오뿐이었다.

그자의 긴 손가락이 분노로 미세하게 떨리던 순간엔 항상 천신의 이름이 나오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이유로 인해 그자가 감정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화를 낼까? 아니면 굴욕스러워할까? 수치스러워할까?’

나비령은 이곳에 도착하기 전, 은광고에서 벌어진 일들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다.

아직 상황이 전부 수습되지 않아 은광고에 관한 정보는 산발적으로 쏟아졌으나 혼란 속에서 원하는 것을 얻어 내는 것은 나비령의 특기였다.

나비령은 이미 그자가 무슨 일을 꾸몄다가 실패하였는지 전모를 파악한 상태였다.

그리 큰 사건을 일으키고도 그자는 얻은 게 없다는 것이 나비령이 내린 결론이었다.

임무에 성공한 건 은광고 밖에서 협회와 플레이어 팀을 방해한 나비령을 비롯한 소수의 몇 명뿐이었다.

그 사실을 안 나비령은 옛 연인, 윤 대리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예정보다 귀환이 늦어졌는데도 마음에 두지 않을 만큼 기분이 좋아졌다.

‘박 팀장이 망가진 것 때문에 내 마음이 다칠까 봐 염려했었지. 정말 괜찮은 인간인데, 조금만 타락해 주면 더 괜찮아질 텐데…….’

끼이이……!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비령의 상념이 중단되었다.

밤눈이 밝은 나비령의 눈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의 저편, 그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비령은 평소대로 나비를 하나 불러내어 빛나는 편린 조각을 밟아 그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윽고 나비가 그자의 위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부수어졌을 때, 나비령은 몸을 낮게 낮추고 예를 표했다.

“임무를 마치고 귀환했습니다.”

“보고하라.”

나비령은 그자의 목소리를 듣자 깊이 실망했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음성은 한 점의 동요도 없었다.

나비령은 아쉬움을 감추고 협회에서 벌였던 일과 성과에 관해 담담히 보고했다.

“수고했다.”

그자가 수고를 치하하는 말은 아주 드물게 하는 말이었다.

평소 나비령이라면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겸허하게 그 말을 받아들였겠지만, 계산 끝에 머뭇거리기로 마음먹었다.

나비령이 말을 아끼자 그자가 먼저 말했다.

“기뻐하지 않는군. 은광고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는 건가.”

“알고 있습니다.”

은광고에 일어난 사건은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중이니 나비령이 모른다는 건 어색했다.

그러니 안다고 답하는 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자는 마치 나비령을 시험하듯이 질문을 던졌다.

“우마왕이 어찌 되었는지 알고 있나?”

그 말에 나비령은 우마왕의 손을 녹여 버린 순간을 떠올렸다.

나비령은 우마왕에게 긴 시간에 걸쳐 수많은 선물을 했다.

우마왕이 그녀를 경계할 때에는 그 선물을 부수거나, 버리거나, 분해하여 내용물을 조사하곤 했으나 딱히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나비령이 우마왕을 방해할 수 있는 힘이 담긴 물건을 선물한 건 그가 완전히 그녀를 신뢰한 이후의 일이었다.

그 선물이 바로 우마왕의 손을 녹인 반지였다.

‘당신은 우마왕에게 호족의 신보를 가져오라고 명했지. 우마왕은 그 명을 이행하던 도중, 호족에게 붙잡힐 것을 저어해 직접 신보를 사용하려 했고…… 그러다 나한테 당했지.’

나비령은 우마왕에게 그 반지를 선물할 때, ‘멀리 있어도 당신의 존재를 느끼고 싶다.’라고 말했다.

나비령의 말대로 그 반지는 우마왕을 염탐하는 힘을 품고 있었다.

우마왕은 그 염탐 기능을 기껍게 여겼으나 자폭 기능이 숨겨져 있다는 건 알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알지 못합니다.”

우마왕에 관해 묻는 그자의 질문에 나비령이 답했다.

지금쯤이면 우마왕은 호족의 손에 들어갔을 텐데 호족이 그를 어찌했을지 나비령은 알지 못했다.

그저 죽이지 않고 고통을 주고 있으리라고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불확실하였다.

우마왕이 잡히는 데에 한몫하였으나 나비령은 당당히 진실을 고할 수 있었다.

어둠 너머에서 나비령을 관찰하던 그자가 말을 이었다.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구출 계획은 없다.”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그자의 말에 나비령은 짙은 슬픔과 체념이 어린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숙였다.

우마왕의 처우와는 별개로 나비령이 그자에게 순종하겠다는 태도가 잘 전달된 건지, 그자는 더 이상 우마왕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다.

“잃고, 실패하였으나 얻은 것도 있다.”

그자의 말에 나비령이 슬픔을 가장한 얼굴 아래로 실소를 삼켰다.

그자가 포섭한 12지 동맹의 수장 중 둘, 진웅팔선 중 하나와 그들을 따르는 진족을 여럿 잃었다.

얻은 것이라곤 나비령이 가져온 소소한 정보뿐이다.

나비령은 그자가 나른한 목소리로 허세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계약에 따라 실패한 자들로부터 대가를 받을 것이다.”

그자의 말이 몹시 이상하게 들렸다.

계약은 무엇이고, 실패하여 호족의 손아귀에 들어간 이들에게서 어찌 대가를 받을 수 있단 말인가.

나비령의 의문은 뒤이어 들린 말에 의해 해소되었다.

“마족을 부릴 수 있게 되었으니 마계에 보낸 수하들을 부를 수 있겠군.”

이 거대한 계획에는 그자에게 충성을 맹세한 부하만이 움직인 게 아니다.

거래 관계로 묶여 있던 마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자는 명령을 내릴 대상이 아닌 존재들과는 계약을 나눈 것이다.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집단 단위로 계약을 맺은 후, 직접 작전에 나서지 않은 자들로부터 대가를 받을 수 있도록.

‘이렇게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도 실패할 가능성을 생각하고 수를 두었다니……!’

그자는 자신이 계획한 모든 것을 밝히지 않았다.

그가 던진 짧은 말에서 나비령이 필사적으로 단서를 추측할 뿐이었다.

청호가 남긴 도복 띠를 넘겨받고도 황호를 유인하여 붙잡아 두는 데에 실패한 이들.

은광고에서 후예 암살, 지맥 뒤틀기 등에 실패한 마족들.

해당 집단에 소속한 자 중 호족에 붙잡히지 않은 이들은 고스란히 그자의 수가 될 것이다.

그자와 동등한 거래 관계가 아닌, 대가를 치를 의무를 진 채무자로서.

‘그뿐만이 아니야. 마족을 손에 넣었으니 마계의 길을 열기 위해 파견한 정예들이 돌아오겠지.’

그자의 명령 하나에 마계에 뛰어들 만큼 충성심이 깊고, 길잡이 없이 살아남을 정도로 강한 수하들이 돌아올 것이다.

나비령은 그자의 동요한 모습을 보겠다며 들떠 있던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지금 나비령은 유열을 쫓는 대신 다음 수를 준비해야 했다.

“나비령, 초하룻날이 오기 전까지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나비령은 짧은 반성을 마친 후, 다시 싸울 준비를 하였다.

“하명하시옵소서.”

*    *    *

저세상, 저승, 구천, 명부, 명계.

사후 세계를 가리키는 말의 종류만큼이나 죽음의 신과 개념은 다양하다.

이 세계는 이계 충돌로 인해 여러 신화 체계가 공존하고 있으니 명계도 여러 형태로 존재한다.

내가 도착한 이곳은 메소포타미아 신화 속에 등장한 지하 저편의 명계다.

명계의 모습이 직접 묘사되는 건 이쉬타르 여신이 명계로 하강했을 때였다.

이쉬타르가 명계로 향한 이유에 관해선 몇 가지 설이 존재했다.

그중 하나는 구갈안나가 길가메쉬에게 토벌된 후, 구갈안나의 장례식 참석을 명분으로 이쉬타르가 명계를 지배하려 내려갔다는 설이었다.

그 설과 구갈안나의 힘을 상대로 싸운 직후에 명계로 온 내 상황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나는 장례식이나 명계 지배를 위해 온 건 아닌데.’

파아아!

그때, 손에 든 청금석 뿔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구갈안나의 힘이 이곳에 반응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빛을 주변에 비추어 보니 거대한 문이 보였다.

‘이게 그 일곱 개의 문 중 첫 번째 문인가.’

이쉬타르는 권능이 담긴 옷과 장신구를 하나씩 포기하는 것을 대가로 명계로 이어지는 일곱 개의 문을 통과했다고 한다.

문의 존재는 납득이 갔는데 뭔가 마음에 걸렸다.

‘왜 문지기가 없지?’

메소포타미아 신화 속에선 명계의 문을 통과하려던 이쉬타르를 막아선 문지기가 있었다.

딱히 문지기가 없다고 해서 허락 없이 문을 열 생각은 없으나 이대로 여기 계속 머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좀 곤란해졌다.

그래도 내 손에 청금석의 뿔이 있으니 조만간 누가 마중 나올 것이다.

일단 기다려 보기로 했다.

‘옥토연과 은호는 만났겠지?’

차가운 죽음의 세계에 홀로 있자니 자꾸 이승의 상황이 궁금해졌다.

은빛 영웅이 옥토연과 은호를 만나게 해 달라 부탁을 해서 나름 수를 둔 건데, 잘되었을지 모르겠다.

내가 이렇게 명계로 향하면 호랑이들은 회토의 토끼 옥토연에게 연락을 취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래서 호족이 옥토연에게 연락을 한 이후에 메시지가 도착하도록 예약 시간을 조정해 두었다.

다른 호랑이들은 옥토연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아 정보를 캐기 쉽지 않을 거다.

그러니 은호가 직접 나서서 옥토연과 만날 가능성이 크다.

끝까지 은호는 나서지 않고 황지호가 옥토연을 상대할 가능성도 있으니 장담할 수는 없지만.

‘다른 사람들한테도 메시지가 잘 도착했을까? 다들 크리스마스 파티 준비를 하고 있을까?’

연락해야 할 상대들은 거의 다 좋은 이들뿐이었다.

내가 말없이 사라진다면 크리스마스를 즐기지 못할 것 같아 메시지를 남길 수밖에 없었다.

메시지를 남겨도 내 부재를 신경 쓸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약의 경우에는 두 번째 메시지가 문제없이 도착해야 할 텐데.’

아직 할 일이 많으니 가능하면 돌아갈 예정이다.

하지만 앞일은 누구나 장담할 수 없는 법 아닌가.

내 가족들은 유서나 메시지 하나 남기지 못하고 떠났다.

가족들이 내게 남길 말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닐 거다.

그런 생각에 미치니 나도 모르게 명계의 문 너머에 시선이 꽂혔다.

‘저 문 너머에 우리 가족도 있을까?’

이 세계의 명계와 내가 있던 세계의 명계가 이어져 있을 가능성은 없나?

설령 명계가 이어져 있다 해도 우리 가족은 여기에 없었으면 좋겠다.

여기는 춥고 어두운데, 동생들은 캄캄한 걸 싫어했다.

동생들이 나와 같이 자겠다며 내 방에 올 때마다 불을 켜고 자서 나는 잠을 설치곤 했다.

옛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명계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쿠구구…….

열리는 문틈 사이로 등불이 보였다.

흐릿한 빛을 머금은 등불에 얼굴을 완전히 가린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누군가는 얼굴뿐만이 아니라 온몸을 거적으로 꼼꼼히 가리고 있었는데, 전신에서 발산되는 위엄과 기품을 억누르기 위함인 듯했다.

[어서 오렴. 살아 있는 인간이여.]

상위 존재 특유의 귀에 이명을 남기는 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소개를 하지 않아도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나타난 건 명계의 여신 에레쉬키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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