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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668화 (664/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68)

88. 굴레 (2)

이 세계에 온 이후로 많은 상위 존재와 만나 대화를 나눴다.

그래도 보통 대화를 나누는 건 운명력이 발동한 직후의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이렇게 상위 존재가 다스리는 땅에 직접 방문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미쳐 버릴 수도 있다는 상위 존재의 위엄을 온몸으로 부딪치는 셈이니 방비가 필요할 것이라 예측했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에레쉬키갈의 목소리를 들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저 거적 덕분인가. 크게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네.’

이능파를 두르는 등 나름의 대비를 해야 하나 싶었는데, 에레쉬키갈의 배려 덕에 별문제 없을 것 같다.

왜 하필 거적인 건지는 마음에 걸리긴 했다.

명계에서 산 자가 거적으로 몸을 숨겨 죽은 자의 눈을 속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과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거적이 아니라 그 거적으로 몸을 가린 에레쉬키갈을 상대하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자 거적 너머로 온화한 목소리가 울렸다.

[정말 듣던 대로 인사성이 바르구나. 여태까지 살아 있는 몸으로 명계를 밟은 건 이 땅의 법도를 존중하지 않고, 하나같이 무례한 자들뿐이었단다.]

메소포타미아 신화 속에서 명계를 방문한 산 자의 묘사를 생각하면 에레쉬키갈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살아 있는 자는 출입할 수 없다는 명계의 법도를 어긴 이들이 명계의 여신이 하는 말을 따를 리가 없었다.

‘설마 나한테도 명계의 법도를 따르란 말을 하진 않겠지.’

에레쉬키갈이 지금 나를 죽이려 든다면 답이 없었다.

이능파의 잔량이나 광림 사용 여부를 따져 보면 둘 수 있는 수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에레쉬키갈은 예의를 지키는 자를 좋아하는 것 같으니 최대한 정중하게 말을 고르고 어떤 행동을 취할지 정하기로 했다.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은 명계의 법도를 어지럽히려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협력을 요청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약속한 대로 청금석 뿔을 넘기자. 괜히 인질을 잡듯 뿔을 오래 들고 있으면 인상이 나빠질지도 몰라. 그리고…….’

저벅, 저벅.

열려 있는 문 너머로 발소리가 들렸다.

광원이 거의 없었기에 잘 보이지 않았으나 문틈 사이로 보이는 누군가는 철저히 무장한 상태였다.

투구 사이로 보이는 피부에는 핏기가 전혀 없어 마치 시체 같았다.

아니, 시체 같은 게 아니라 이미 오래전에 죽은 자일 가능성이 컸다.

‘명계의 주민인가.’

이쪽에 적의를 가지고 있지 않은 무장 중인 죽은 자.

어쩌면 저자는 줄곧 보이지 않았던 문지기일지도 모른다.

문지기는 없던 게 아니라 잠시 자리를 비웠거나 다른 문지기와 교체를 하느라 안 보였던 모양이다.

그때, 에레쉬키갈이 말했다.

[오늘은 이 문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누누이 말했거늘. 귀가 어두운 문지기가 있다고 했지. 점토판에 따로 새겨서 보냈어야 했나…….]

추측한 대로 저자는 문지기인 듯하다.

하지만 명령 전달에 문제가 있었는지, 문지기는 에레쉬키갈의 명을 어기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런데 에레쉬키갈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위화감이 느껴졌다.

‘에레쉬키갈은 문지기가 명을 어겨서 분노했다기보다는 초조해하는 것처럼 보여.’

문지기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에레쉬키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떨어져라!]

콰콰콰콰콰!

명계의 땅이 에레쉬키갈의 말에 반응해 형태를 바꾸어 움직였다.

저렇게 온몸을 봉인하듯이 거적으로 몸을 감고 있으면 제아무리 상위 존재라도 힘을 발산하는 건 쉽지 않을 거다.

지면을 움직일 정도의 이능파를 뿜은 것도 아닌데 이 땅은 그저 주인의 말에 따라 움직인 것이다.

에레쉬키갈이 들고 있는 등불과 같은 빛을 머금은 땅이 문지기를 밀어내듯 내던졌다.

문지기는 날렵하게 다시 중심을 잡았으나 그 힘에 밀려 들고 있는 등불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툭.

문지기가 등불을 줍기 위해 멈춰 서자 지면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잠잠해졌다.

에레쉬키갈은 어느새 거적 하나를 새로 꺼내 들었다.

귀가 어두운 문지기에게도 똑똑히 전하기 위함인지, 에레쉬키갈의 음성은 귀가 아플 정도로 컸다.

[이것을 뒤집어쓰고 속히 물러나도록! 내가 다시 명할 때까지 복귀를 금한다!]

휘익!

에레쉬키갈이 던진 거적이 마치 참호같이 파인 구덩이와 새로 생긴 흙벽 너머까지 닿았다.

에레쉬키갈의 말이 닿았는지 문지기는 거적을 뒤집어쓰고 멀리 물러났다.

순식간에 어둠에 묻혀 사라지는 게 다가올 때보다 퇴장할 때의 속도가 훨씬 빨랐다.

[잠시 소란스러웠구나. 양해해 다오.]

“괜찮아요.”

[너도 덮고 있거라.]

“감사합니다.”

에레쉬키갈이 거적을 내밀었다.

산 자에게 명계의 공기가 좋을 리가 없으니 배려해 준 건가 보다.

좀 춥긴 해도 아직 버틸 만했지만, 호의를 거절할 수 없어서 순순히 받아들였다.

어차피 여기에서 체온이 더 떨어지면 방어구 카드를 실체화하여 뭘 더 껴입어야 할 테니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겉보기에는 그냥 짚더미처럼 보였으나 몸 위에 덮으니 추위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따뜻하다. 과연 명계의 여신이 몸에 걸칠 법한 아이템이구나.’

이 정도 성능이면 거적은 카드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희귀도도 상당할 것 같다.

다시 감사 인사를 하자 에레쉬키갈이 만족해하며 당부했다.

[명계를 떠날 때까지는 반드시 착용하고 있으렴.]

“네.”

[대답을 성실하게 하는 게 마음에 드는구나.]

나와 에레쉬키갈은 명계의 문을 사이에 두고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의 주제는 구갈안나에 관한 것이었다.

상위 존재가 이 세계를 지켜보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건지, 에레쉬키갈은 구갈안나가 어떤 경위로 무슨 일을 당했는지 상세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에레쉬키갈은 청금석 뿔을 직접 보자 지금 구갈안나의 상태를 곧바로 파악했다.

[이리도 잔인한 짓을. 봉인을 풀고 이 뿔을 매개로 다시 몸을 재생시켜야겠구나.]

구갈안나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 말로도 상황이 대충 짐작이 갔다.

흑막은 구갈안나가 가진 힘의 근원인 청금석 뿔을 잘라 내어 그의 권능만을 뽑아 쓸 수 있도록 조치한 것 같다.

그 후에는 뿔을 우마왕에게 심어 힘의 주도권을 그에게 넘겨준 것이다.

구갈안나는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권능만을 빼앗긴 것이다.

‘구갈안나의 몸이 어떻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어. 하지만 이 뿔을 매개로 새 몸을 얻을 수 있다면 구출할 필요도 없어질 거야.’

에레쉬키갈에게 청금석 뿔을 내밀자 그 뿔은 허공으로 떠올랐다.

거적 사이로 손을 내미는 대신 이능파로 뿔을 옮기는 길을 택한 모양이다.

[이런 무엄한 짓을 한 자의 술수가 아직 완전치 않았음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거다. 내 첫 번째 남편의 권능을 온전히 앗아 갔다면 누군가는 명계의 주민이 되었겠지.]

에레쉬키갈의 충고가 뼈아팠다.

우마왕이 구갈안나의 권능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었다면, 마지막에 치른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을 거다.

나나 황지호는 몰라도 난입한 주수혁, 유상훈, 맹효돈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특히 유상훈의 그 정신 나간 광림, ‘복수하는 바람’을 생각하면 아찔해졌다.

더 강력한 힘을 휘두르는 우마왕을 막는답시고 광림을 썼다면 그놈은 아주 위험한 꼴을 당했을 거다.

‘흑막은 무지기와 구갈안나의 힘을 완전히 빼앗는 데에는 실패했어. 하지만 언젠가 성공할지도 몰라. 흑막이 성공했을 경우를 상정하여 수를 둬야 해.’

새로운 수를 둬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시선이 느껴져 생각은 길게 가지 못했다.

거적으로 가린 탓에 에레쉬키갈의 얼굴이 어느 방향으로 향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나를 계속 관찰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청금색 뿔을 살필 줄 알았는데, 에레쉬키갈이 내 쪽을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있던 모양이다.

에레쉬키갈은 한참 더 나를 관찰하다 탄식했다.

[안타깝구나. 어쩌다 그런 끔찍한 것을 짊어진 것이더냐. 그것만 아니라면 이 문 너머로 기꺼이 너를 초대했을 터인데.]

마치 딱한 것을 대하는 태도였다.

끔찍한 것이라니, 흑막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을 의미하는 걸까?

뭔가 맞지 않는 것 같긴 했으나 깊게 추궁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명계에 온 것은 저 문을 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명계와 아주 가까운 어느 장소를 가기 위함이니까.

[내 초대가 달갑지 않은 모양이구나. 네가 여기에 온 목적은 이 문 너머가 아니니 어쩔 수 없지.]

딱히 초대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니었는데.

목소리에 희미하게 웃음기가 묻어나는 걸 보니 기분 상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더 표정 관리에 주의해야겠다.

[나도 얼른 너를 바래다주고 싶지만, 조금 더 기다리거라. 살아 있는 자들의 힘에는 시간제한이 있지 않느냐.]

시간제한이 있는 힘이라면 광림이다.

광림이 초기화되는 시간은 한국 표준시, 그리니치 표준시 GMT +09:00 기준으로 0시다.

이는 이계 충돌 후 생긴 법칙으로, 먼 옛날부터 존재했던 진족도 저 법칙에 묶이게 되었다고 한다.

진족의 경우엔 워낙 힘의 총량이 커 광림의 제한 시간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힘을 퍼부으니 큰 문제는 되지 않는 것 같지만.

‘죽음의 세계로 와도 나는 그 법칙에 묶여 있나 보구나.’

아직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였으니 긍정적으로 여겨도 되겠으나 조금 곤란해졌다.

은빛 영웅에게 부탁을 받았을 때, 명계의 시간의 흐름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지금 나는 명계에 와 있지만 내가 서 있는 곳은 문밖이다.

즉, 엄밀히 따지면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다.

그리고 삶과 죽음 사이에서 시간의 흐름은 매우 느리다고 들었다.

죽기 직전 한순간에 주마등으로 수십 년에 걸친 인생 전체를 되돌아볼 수 있는 것처럼.

[죽은 자의 시간은 멈춰 있고, 그 영향은 이 땅 전체에 미쳐 있지. 문밖에 머무르면 덜하겠다만,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흐를 거란다.]

에리쉬키갈과 은빛 영웅이 한 설명이 일치했다.

광림 초기화 시간까지 꽤 오래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기다릴 수밖에 없겠네.’

괜히 객기를 부려서 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목적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몸 상태가 엉망인 채로 가면 목표 달성에 실패할지도 모른다.

기껏 명계로 온 의미가 없어지는 꼴이니 기다리는 게 나을 것이다.

내가 기다리겠다고 의사를 표하자 에레쉬키갈이 말했다.

[그러면 기다리는 사이에 선물을 준비하도록 하지. 명계의 주인이 직접 초대한 은인에게 선물한 게 고작 거적이라니, 내 체면이 어찌 되겠느냐.]

이 거적도 충분히 훌륭하므로 굳이 주지 않아도 되지만 선물을 거절하긴 미묘했다.

선물을 거절하는 걸 달갑게 여기지 않는 어른들을 몇 번 보았는데, 에레쉬키갈은 그런 타입인 것 같았다.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기다리겠다고 답하자 흡족한 목소리로 웃으며 물러났다.

에레쉬키갈이 한 걸음 물러나자 저승의 문이 천천히 닫혔다.

끼이이!

문이 닫히기 전, 에레쉬키갈이 마지막으로 한마디 남겼다.

[그러면 착하게 기다리고 있거라. 거적은 벗지 말고. 그러면 약속대로 윤회의 굴레까지 바래다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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