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69)
88. 굴레 (3)
황명호 대저택의 현대식 별채.
때는 크리스마스이브.
먼 옛날부터 은호를 중심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 호족과 토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토족은 염원하던 은호와의 재회를 이루었다.
하지만 웃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가 버리고 ‘메리 크리스마스’라니.”
어린 모습을 한 황호가 조의신이 보낸 메시지의 마지막 인사말을 따라 읽는 것을 끝으로 모두가 침묵했다.
말문을 연 것은 은호였다.
은호는 조의신이 보낸 메시지를 홀로그램으로 띄운 채로 옥토연에게 말을 걸었다.
“의신이 형은 죽음의 세계인 명계로 떨어졌어요. 하지만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살피고, 윤회의 굴레로 향한다고 했죠.”
“그렇네, 은인은 살아 있으면서 거길 왜 갔대.”
옥토연은 조의신의 메시지를 다 읽은 후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명계로 향한 이유를 추리해 보려 했다.
하지만 호족들도 조의신이 왜 그런 선택을 한 건지 모르는데, 눈치 없는 옥토연이 그걸 알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은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옥토연에게 말을 걸었다.
“메시지의 내용을 미루어 보았을 때, 의신이 형의 목적은 명계에 있는 것 같지 않아요. 형의 진짜 목적은 ‘삶과 죽음의 경계’, ‘윤회의 굴레’ 같아요.”
은호는 홀로그램 위에 떠 있는 단어에 강조 표시를 했다.
허공에 반짝이는 글자를 가리키며 은호가 옥토연에게 말했다.
“저는 의신이 형이 가려 하는 곳에 관해 잘 알지 못해요. 하지만 토연 님께서는 누구보다 죽음에 관해 아는 바가 많으시죠. 부디 토연 님께서 아는 것을 말씀해 주세요.”
“부탁 안 해도 돼. 은호가 묻는 거면 뭐든 말해 줄 거야!”
옥토연은 예전에 황호에게 비슷한 질문을 받았다.
황호가 윤회의 굴레에 관해 물었을 때 옥토연은 매우 성의 없게 말했다.
황호가 도발한 후에야 그나마 입을 열었는데, 그럼에도 특정 부분은 의도적으로 생략해서 말했다.
노골적으로 다른 태도에 황호가 성질을 낼 법하기도 한데, 황호는 다른 일에 정신이 팔린 건지 별 반응이 없었다.
“원래 사후 세계는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하는 거 은호도 알지?”
“네, 그건 알고 있습니다. 신화, 문화, 신앙에 따라 명계의 모습은 다르게 그려지니까요.”
삼도천 건너 서천꽃밭.
염라가 판결을 내리는 장소.
다섯 개의 강이 흐르는 황천.
육도윤회의 법칙이 적용되는 곳.
믿음의 여부에 따라 천국, 지옥으로 나뉘는 갈림길.
때로는 종말과 심판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낙원.
죽음의 세계는 이처럼 다양하게 존재했다.
“죽으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문화권에 걸맞은 죽음의 세계로 향하는 게 보통이었어. 아, 타고난 혼이 강해 여러 법칙을 무시할 수 있긴 했다!”
“말씀하시는 게 과거형이로군요. 지금은 그렇지 않은 건가요?”
“응, 이계 충돌 이후로 많은 게 변했지.”
옥토연은 이계 충돌 전후로 경험한 죽음에 관해 떠올리며 잠시 은호에게 눈을 돌려 먼 곳을 응시했다.
수천 년을 살고도 철없는 옥토연이었으나 그 순간만큼은 회토의 토끼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계 충돌 이후에는 진족이나 상위 존재는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는 것’에서 ‘분명히 존재하는 것’으로 변했잖아. 그거 때문에 죽음의 세계도 영향을 많이 받았어.”
“저희의 존재가 분명해진 것이 어떻게 죽음의 세계에 영향을 준단 말입니까?”
모처럼 진지해진 옥토연의 말에 귀 기울이던 적호가 물었다.
하지만 옥토연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꽤 복잡한 내용인 건지 ‘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해?’라고 중얼거리며 눈을 굴리는 옥토연을 대신해 은호가 답했다.
“토연 님 말씀을 들으니 짐작이 가네요. 이계 충돌 전까지 전 세계의 신화 체계는 문제없이 양립했어요. 서로 어긋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더라도 전승 과정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 허구일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하면 그만이니까요.”
죽고 나면 삼도천을 건널지, 카론에게 뱃삯을 주고 아케론을 건널지, 아니면 강을 건너지 않고 바로 환생을 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만약 누군가가 죽고 난 후 환생을 바로 했다면 ‘강에 관한 저승의 이야기는 허구였구나.’라고 치부하면 그만이다.
허구의 가능성 덕에 각 신화 체계는 공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 전해지는 명계에 관한 모든 설화가 사실이라는 그 증거가 현세에 넘쳐난다면 어떻게 될까.
“이계 충돌 이후, 모든 것은 현실이 됐어요. 허구의 영역에 기대어 공존했던 것들은 더 이상 그러지 못하게 되어 혼란에 빠졌죠. 죽음의 세계도 그럴 거예요.”
“은호의 말대로야! 그거 때문에 명계가 난리가 났었다니까. 그래서 ‘윤회의 굴레’를 모든 명계에 잇게 된 거야.”
옥토연은 두서없이 설명하고 그 말을 전부 알아들은 은호가 정연하게 정리하는 것이 반복되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본래 제각각 존재하여 해당 문화권의 죽음을 이끌던 사후 세계는 이계 충돌로 인해 혼란에 빠졌다.
죽음을 맞이한 혼을 어디로 보내야 할지 혼선이 빚어진 것이다.
그 결과, 지력이 가장 강력한 한반도의 영향에 있던 윤회의 굴레를 삶과 죽음의 경계로 옮긴 후에 각 명계에 잇기로 했다.
그리하여 이계 충돌 이후 모든 죽음은 윤회의 굴레를 거치게 되었다.
굴레를 거친 결과 환생을 하게 될지, 어느 명계로 갈지, 그도 아니면 소멸할지가 결정된다.
“의신이 형은 구갈안나를 해방시켜 주는 대가로 명계 구경을 가겠다 하셨죠. 윤회의 굴레가 에레쉬키갈의 명계와도 이어졌나 보군요.”
“그럴걸? 은인은 그곳을 거쳐서 윤회의 굴레로 향할 생각인가 보다! 에레쉬키갈이 허락하면 그렇게 갈 수도 있겠네!”
옥토연은 밝게 말했으나 은호의 미소가 흐려졌다.
옥토연은 은호가 기운이 나도록 좋은 말을 골라서 했다.
“에레쉬키갈이 데려간 거면 괜찮을걸? 그쪽 명계엔 유독 깽판 치러 간 것들이 많아서 예의 바른 은인한테 함부로 안 대할 거야. 문만 넘지 않으면 저승에 묶일 일도 없어. 똑똑한 은인이 잘 알겠지!”
하지만 은호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에레쉬키갈이 다스리는 명계는 차갑고 어두운 곳으로 묘사되곤 하죠. 의신이 형은 추위를 잘 타서 걱정돼요.”
은호가 말을 마치자 황호가 쥐고 있던 잔을 놓고 관자놀이를 짚었다.
어린 황호의 입맛과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맞춰 마시멜로가 들어간 따뜻한 코코아를 준비했는데, 은인 걱정에 입맛이 없는지 한 입도 줄어들지 않은 상태였다.
마찬가지로 찻잔에 손을 대고 있지 않던 은호가 옥토연에게 물었다.
“윤회의 굴레는 어떤 곳인가요?”
“음, 윤회의 굴레는 워낙 많은 혼이 오고 가는 곳이라 매번 모습을 바꿔.”
매일같이 이 세계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의 죽음과 삶이 오고 간다.
그 거대한 생사의 숫자를 감당하기 위해 윤회의 굴레는 항상 확장 중이라고 한다.
옥토연이 묘사한 윤회의 굴레의 규모는 예상을 뛰어넘었기에 은호의 걱정이 깊어졌다.
“의신이 형이 무사할지 걱정되네요. 길을 잃지는 않겠죠?”
“이계 충돌 이후에 명계를 연결하면서 파수꾼이 생겼거든. 파수꾼이 은인을 모른 척하지는 않겠지. 괜찮을 거야.”
“파수꾼이요?”
“응! 명계와 윤회의 굴레를 잇기 위해 명계의 지배자들이 모였을 때, 파수꾼을 뽑았어. 마침 윤회의 굴레를 도달한 맑고 깨끗하고 강한 혼이 있기에 부탁했대.”
옥토연은 윤회의 파수꾼을 선출하던 순간을 간략히 설명했다.
각 명계의 지배자들은 점점 거대해질 윤회의 굴레를 관리할 자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명계를 비울 수 없는 상위 존재들이 이곳을 지키기는 어려웠기에 지상에서 파수꾼을 선정해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다.
파수꾼 선정에 고심하던 중, 우연히 윤회의 굴레에 죽은 자의 혼이 나타났다.
명계의 지배자들은 죽은 자가 지닌 혼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생애를 읽을 능력이 있었기에 하나같이 그 선량하고 맑은 혼을 보고 감복했다.
그리하여 명계의 지배자들은 고개를 숙여 그자에게 파수꾼 역할을 부탁하였고, 그자가 이를 받아들이자 권능을 나눠 주었다.
“그렇군요. 토연 님은 그 파수꾼과 직접 만난 적이 있나요?”
“으, 응! 몇 번 만났지.”
주절주절 잘도 얘기하던 옥토연이 윤회의 굴레를 지키는 파수꾼 이야기가 나오자 말을 더듬었다.
은호는 옥토연의 태도가 바뀌는 것을 예리하게 감지하였다.
옥토연뿐만 아니라 옥토윤도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 파수꾼에게 뭔가 있군. 의신이 형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은 없나?’
은호는 파수꾼에게 품은 경계심이 드러나지 않도록 웃는 낯으로 물었다.
“그 파수꾼을 마지막으로는 언제쯤에 뵈었나요?”
“어, 음…… 한 10년 됐나?”
“토연 님께서 보셨을 때 그 윤회의 굴레를 지키는 파수꾼은 어떤 분인가요?”
“어, 착하고 좋아! 나한테도 엄청 잘했어!”
옥토연은 그 윤회의 굴레를 지키는 파수꾼에게 호의를 품은 듯했다.
옥토연이 저리 반응할 정도면 악당일 가능성은 적지만, 은호는 신중하게 생각했다.
윤회의 굴레 파수꾼 자리는 얼핏 들어도 중직이고, 명계의 상위 존재들의 힘을 나눠 받기까지 했다.
힘을 얻은 자는 쉽게 변하기 마련이다.
“10년 전에는 그랬군요. 시간이 흘러 혼이 변질되었을 가능성은 없나요?”
“어? 없어! 파수꾼은 계속 착할 거야! 믿을 만해!”
옥토연은 갑자기 왁왁거리며 파수꾼 편을 들었다.
은호는 인내심을 갖고 파수꾼과 관련된 정보를 얻으려 했으나 옥토연은 무작정 파수꾼은 착하다는 소리만을 반복했다.
참다못한 적호가 말했다.
“옥토연의 말은 근거가 전혀 없는 소리군요. 그 파수꾼에 관해서도 처음 듣습니다. 조의신이 걱정됩니다.”
“아, 진짜라고! 걔는 가족이나 다름없어!”
“가족? 그 파수꾼은 토족과 관련이 있는 존재입니까?”
“아니, 따지고 보면 파수꾼은 나보다 너네들이랑 더…… 아차!”
옥토연은 재빨리 말을 끊었지만 이미 그 자리에 있는 모든 호족들이 그녀의 말을 들은 이후였다.
옥토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호족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호족과 관련이 있는 분인가 보군요.”
“옥토연의 말에 의하면 그 혼은 이계 충돌 후에 윤회의 굴레로 향한 듯합니다만. 그사이에 죽은 호족이나 후예는 없습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옥토연은 더 이상 파수꾼에 관해 숨길 수가 없어졌다.
옥토연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아, 좀 좋은 인상을 심어 준 다음에 밝히려고 했는데!”
“그 지리멸렬한 헛소리가 좋은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 한 말이었습니까?”
“에잇, 몰라! 말하면 되잖아!”
적호의 도발에 반응해 옥토연은 파수꾼이 어떻게 호족과 연이 있는지 폭로했다.
“그 파수꾼은 서호랑 이호랑 재호네 아빠야. 파수꾼이 된 이후에 그 아이랑 연을 맺어 후예를 봤어!”
“……!”
그 말을 들은 호족들은 순간 머릿속의 가족 관계도를 그렸다.
은호, 은호의 딸, 은호의 손주들.
호족들이 인지하고 있는 은호의 가족 관계도에는 아이들의 아버지가 빠져 있었다.
인식을 하지 못한 게 아니라 진짜로 그가 사망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은서호가 호족을 찾아온 시점에서 은호의 딸이 사망했고, 아이들은 토족을 부모처럼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들의 아버지도 이미 사망한 줄 알고 있었다.
아이들의 마음의 상처를 건드릴 수 없어 묻지 못했기에 호족들은 그들의 아버지에 관해 전혀 몰랐다.
“아, 그러고 보니 그 파수꾼은 은호의 사위네!”
모두가 생각은 하고 있지만 차마 입에 담지 못한 단어를 옥토연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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