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70)
88. 굴레 (4)
옥토연의 사위 발언에 은호는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지혜로운 은호라도 윤회의 굴레 파수꾼과 호족 사이에 있다는 인연에 자신이 연관되어 있을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은호는 표정을 무너뜨리지는 않았으나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사위라 하기는 어렵겠네요.”
“왜? 왜? 파수꾼과 그 아이 사이에는 애가 셋이나 있는데!”
“저는 아버지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파수꾼은 제 사위는 아니지요.”
“그 아이는 은호의 선택을 이해했는걸! 오죽하면 그 아이는 이름도…….”
옥토연은 말을 전부 끝맺지 못했다.
은호는 웃으면서 옥토연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으나 입을 열기 어려운 분위기를 두르고 있었다.
은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묻고 싶은 게 더 있지만, 질문은 디바이스를 통해 하겠습니다.”
“은호, 지금 물어도 돼!”
은호가 고개를 저었다.
“해가 졌습니다. 모처럼 크리스마스이브인데, 후예들이 본채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열심히 파티 준비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그 아이들과 피가 이어진 은호도 얼굴을 비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난 은호와도 같이 크리스마스 보내고 싶은데!”
본채에 있을 후예들 이야기가 나오자 적호와 옥토연의 의견이 일치했다.
하지만 은호는 완강하게 이들을 밀어냈다.
“아비 노릇을 못한 제가 무슨 낯으로 그 아이들과 단란한 시간을 보내겠어요. 하물며 백호 형님과 의신이 형은 밖에서 찬 바람을 맞고 있는데요.”
적호는 못마땅해하면서도 입을 다물었지만 옥토연은 계속 징징거렸다.
보다 못한 옥토윤이 옥토연을 달랬다.
“토연아, 이만 가자. 이러다가는 이 저택에서 쫓겨날 거야. 애들은 보고 가야지.”
“그치만 토윤 언니! 은호가…….”
한참을 달래고 어른 후에야 옥토연이 울먹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서호, 은이호, 은재호가 호족들에게 언제 오냐고 묻는 메시지를 보내기까지 했으니 시간을 더 지체하기 어려웠다.
본채에 남긴 황명호 모습을 한 분신에게 아이들이 말을 거는 횟수도 점점 늘어났다.
결국 별채에서 모두 떠나고 남은 건 은호와 황호의 어린 분신 둘이었다.
황호는 주변이 조용해진 후에야 관자놀이를 누르던 손가락을 떼고 입을 열었다.
“망할 달토끼에게 더 묻지 않아도 되나?”
“토연 님과 나눈 대화를 통해 의신이 형이 어디에 갔고 누구와 만날 건지 알게 되었습니다. 단서는 충분해요.”
황호가 ‘더 묻지 않아도 되냐’는 말에는 파수꾼에 관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은호는 일부러 단서에 한정시켜 답했다.
은호의 말이 계속되었다.
“의신이 형은 광림 소모를 심하게 했으니 0시까지는 움직이지 않겠죠. 그 전까지 생각할 시간이 있어요.”
“시간이라.”
시간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은 황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예전에 망할 달토끼가 죽음의 세계는 현세에 비해 시간의 흐름이 느리다는 소리를 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의신이 형은 지금…….”
황호는 어두워진 창밖을 바라봤다.
밖은 해가 지고 겨울바람이 한창 불고 있었다.
조의신이 향한 명계는 지상의 겨울밤보다 춥고 어두울 것이다.
“조의신이 그곳에서 얼마나 긴 시간을 체감하고 올지 모르겠군.”
* * *
며칠, 몇 주, 몇 달이 지났을까.
명계에서 홀로 지내다 보니 시간관념이 점점 이상해지고 있었다.
에레쉬키갈이 주변의 통행을 금지한 덕에 지나가는 명계의 주민이나 망자, 문지기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머물고 있는 문 앞이 아닌 다른 곳을 임시 출입구로 지정한 것 같다.
‘어두워.’
명계를 뒤덮은 어둠에 비해 디바이스가 발하는 빛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
주변이 이래서 그런지 에레쉬키갈이 준 거적을 덮고 있어도 추운 것 같았다.
그럼에도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았다.
‘아직 광림 사용 가능 시간이 리셋되지 않았어. 한국 시간 기준으로 아직 자정이 안 지난 거야.’
다행히 내 생체 리듬은 지상의 기준을 따르는지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르진 않았다.
아사할 걱정은 없었으나 맨정신으로 긴 기간 홀로 있는 건 심적으로 지치는 일이었다.
나를 지치게 하는 요소는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잠이었다.
‘피곤해서 졸리긴 한데, 못 버틸 수준은 아니야. 먹지 않아도 배가 안 고프잖아. 그러니 잠을 자지 않아도 괜찮겠지.’
사실 처음에는 잠을 자려고 했었다.
위험한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만약을 대비해 기척 감지용 아이템을 설치해 두고 앉은 자세에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반쯤 잠들었을 때, 이상하게 덮고 있는 거적이 무겁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잠결에 거적을 벗어 던지려 하다가 정신이 번쩍 들어 다시 거적을 꼭 덮어 썼다.
깨어 있을 때는 포근하고 편안한 감각을 주던 거적이 이상하게도 잠에 빠지려 하면 불편하기만 했다.
‘나한테 이런 잠버릇이 있었나? 잠들면 에레쉬키갈의 말을 어기게 될지도 모른다. 이래서야 잠을 잘 수 없어.’
평소 자고 일어나면 항상 이부자리가 단정하기에 잠버릇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깨어 있는 김에 거의 외우다시피 한 설정집을 ‘게임 라이브러리’ 기능을 사용해 읽으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머리가 아파서 읽을 수 없어. 정신력을 지나치게 깎아 먹네.’
정신력뿐만이 아니었다.
디바이스 배터리, 이능파 소모를 생각하다 보면 할 게 없었다.
그래도 잠은 잘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쉬지 않고 생각하는 것뿐이었다.
먼저 생각한 건 앞으로 둬야 할 수에 관해서였다.
변수까지 고려해 몇 번이나 머릿속에서 수를 두고, 복기하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나의 생각은 지상에 있는 이들 쪽으로 흘러갔다.
‘크리스마스 선물은 잘 도착했을까. 올무한테는 특별히 선물에다 메시지를 포함해 뒀는데.’
우리 올무는 똑똑하므로 글을 읽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나는 멍청하게도 올무에게 미리 디바이스를 선물하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선물 배송 예약을 하면서 올무에게 전할 메시지를 따로 준비해야 했다.
산타 모양을 한 인형을 누르면 내가 녹음한 목소리가 나올 건데, 부디 잘 전달됐으면 한다.
올무에 이어 호랑이들, 반 아이들, 학교 사람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지상에 있는 이들의 생각을 하고 있자니 점점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아주 느리게 시간은 흘러갔다.
‘드디어 광림 시간이 리셋됐다!’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광림이 다시 사용 가능해졌다.
무명의 운명도 마찬가지였다.
끼이이!
굳게 닫혀 있던 저승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열린 문 틈 사이로 흐릿한 등불 빛이 쏟아졌다.
그곳에서 나온 에레쉬키갈은 거적으로 몸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살아 있는 자들의 시간 기준으로는 하루도 채 흐르지 않았을 텐데, 너무나도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모습이 잘 보이지 않고, 에레쉬키갈은 고작 한 번 본 상위 존재였는데도 나 아닌 누군가를 본다는 게 참 달갑고 기쁘게 느껴졌다.
내가 인사를 하는 사이, 에레쉬키갈이 거적 너머로 나를 훑어보는 것 같았다.
[내 말을 지켜 거적을 계속 덮고 있었구나. 한숨도 자지 않은 것 같은데, 정말 장하다.]
잠을 자지 않은 게 티가 나나?
오랜만에 입을 열어서 인사말을 할 때, 목이 잠겨 있어서 잠을 안 잤다고 생각한 걸까?
에레쉬키갈은 아주 만족한 눈치였다.
파아아…….
에레쉬키갈이 이능파로 허공에 물체 두 개를 띄웠다.
하나는 정중히 포장되어 있었고, 다른 하나는 평범해 보이는 투박한 물병이었다.
상위 존재가 건네는 물건이 평범할 리는 없겠지만.
[이렇게 기특하니 선물을 더 줄 수밖에 없구나.]
“감사합니다.”
혹시 포장이 되어 있지 않은 물병 쪽은 선물할 예정이 아니었던 걸까?
일단 받아 들긴 했는데, 이게 무슨 아이템인지 모르겠다.
나중에 뜯어서 확인하거나 카드화 후 설명을 보아야겠다.
‘명계에서는 보통 방문자가 가지고 있는 걸 빼앗아 가지 않나? 받은 게 많은 것 같은데.’
에레쉬키갈은 처음에 봤을 때보다 한결 더 부드러워진 어조로 말을 걸고 있었다.
그녀가 한 말을 지켜 내가 거적을 내내 덮고 있던 게 그렇게도 기쁜 걸까.
안 자고 그 말을 지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걸을 수 있겠느냐? 걷기 어렵다면 양치기에게 이르러 너를 태울 양을 부르게 하마.]
“걸을 수 있어요. 배려 감사합니다.”
광림 시간도 복구되었고 이능파와 체력도 그럭저럭 회복된 상태다.
걷는 데 지장이 없었기에 사양했다.
그런데 명계에 양이 있었나?
혹시 그 양치기는 이쉬타르의 남편인 두무지를 가리키는 걸지도 모르겠다.
두무지는 일곱 개의 문을 통과해 명계에 잡힌 이쉬타르를 대신해 1년의 반을 지하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지금은 겨울이고, 겨울은 두무지가 명계에 있는 계절이다.
[그럼 잘 따라오거라.]
스르륵.
에레쉬키갈이 문을 빠져나와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 뒤를 따라 걸어갔다.
에레쉬키갈의 걸음은 그리 빠르지 않았는데도 걸을 때마다 풍경이 휙휙 변하는 느낌이 들었다.
기다리는 동안 이 방향을 응시할 땐 그냥 어둡기만 했는데 이렇게 다른 곳과 이어져 있는 줄은 몰랐다.
잠시 걷던 에레쉬키갈이 우뚝 멈춰 섰다.
시야에 밝은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척 봐도 에레쉬키갈의 명계와 다른 곳이 이어지는 길 같았다.
[벌써 다 왔구나. 나는 오랜만에 착하고 예의 바른 아이와 대화하여 기분이 몹시 좋다. 그러니 헤어지기 전에 충고를 하나 하마.]
길 안내를 마친 에레쉬키갈이 작별 전에 한마디 했다.
[명심하거라, 너는 살아 있는 인간임을. 숨을 쉬는 걸 멈추지 말거라.]
내가 살아 있는 인간이라는 건 잘 알고 있는데 왜 굳이 충고까지 하면서 말해 주는 걸까?
이유를 파악할 수 없었지만 에레쉬키갈의 음성은 진지했기에 그 충고를 마음에 새기기로 했다.
[자, 뒤를 돌아보지 말고 걷거라. 윤회의 굴레를 지키는 파수꾼과 마주칠 때까지 돌아봐서는 아니 된다. 거적은 그때 벗어도 된단다.]
뒤를 돌아볼 생각은 없었지만, 그 말을 들으니 뒤통수가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길 안내를 해 주어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기고 빛을 향해 걸어 나갔다.
에레쉬키갈의 뒤를 따라 걸을 때보다 주변은 더 빠르게 변했다.
밝아지고 어수선한 공기가 느껴졌다.
고작 열 걸음도 걷지 않았는데 명계의 흔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안녕?”
누군가가 가까이에서 말을 걸었다.
걷는 중에는 누가 주변에 있는 건지 전혀 알지 못했는데, 언제 이렇게 접근해 있던 건지 모르겠다.
에레쉬키갈의 명계를 벗어나는 중에 내 감각이 잠시 둔해졌나 보다.
정황을 따져 봤을 때, 내 눈앞에 있는 건 파수꾼일 거다.
그런데 바로 단정 짓지는 못했다.
‘이자가 파수꾼이 맞나? 그런 것치곤 너무 어려 보이는데.’
눈앞에 있는 맑은 얼굴을 한 이는 나와 나이 차가 그리 나지 않는 외모를 하고 있었다.
키도 비슷했고 얼굴도 기껏해야 고등학생 정도로 보였다.
나이에 비해 어린 모습을 한 늙은이들이 주변에 한둘이 아니긴 한데, 어쨌든 시각 정보가 사고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했기에 괴리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어진 말이 쐐기를 박았다.
“네가 우리 아이들을 구한 은인이구나. 기다리고 있었어. 반가워.”
저 말을 들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내 눈앞에 나타난 이는 은빛 영웅의 남편, 윤회의 굴레를 지키는 파수꾼임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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