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71)
88. 굴레 (5)
인사를 했더니 파수꾼이 섭섭해했다.
혹시 예의에 어긋난 짓을 한 게 아닌가 싶어서 돌이켜 생각해 보았으나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파수꾼은 말을 아끼는 타입이 아닌지 곧바로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정말 예의 바르구나. 편하게 대해도 돼! 너무 깍듯하게 인사할까 봐 네 또래의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하긴, 처음 봤는데 아무리 그래도 친구처럼 대하긴 어렵겠지?”
지금 저 파수꾼이 친구처럼 대하라고 한 건가?
파수꾼은 이계 충돌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사망했다고 하니 현세 기준으로 나이를 세면 사망했을 때의 나이에다가 100년을 더해야 한다.
나이 문제를 뒤로해도 은서호, 은이호, 은재호의 아버지에게 예의를 안 차릴 수 없다.
그리고 위 조건에 더해 대학 후배의 사위와 친구로 지내는 건 좀 어렵지 않을까?
“참고로 이건 내가 사망한 시점의 모습이야. 사실상 너랑 동갑이나 다름없지. 이곳에서 꽤 긴 시간을 지내긴 했지만.”
이 세계에서 나는 아직 열일곱 살이다.
그런데 파수꾼은 나와 동갑인 나이에 사망한 건가?
그럼 고작 고등학교 1학년 시절에 저 파수꾼은 윤회의 굴레에 왔다는 뜻인데.
“하하! 그렇게 슬퍼할 줄이야. 그냥 말하지 말걸. 괜찮아. 이계 충돌이 막 일어났을 때 단명하는 건 흔히 있는 일이었는걸.”
“크게 봤을 때 흔한 일이라 해도 당사자시잖아요.”
우리 가족은 흔한 교통사고로 떠났지만, 당사자 입장에선 흔한 일이라고 받아들이긴 어려운데.
파수꾼은 정말 이른 나이에 명을 달리한 걸 털어 낸 건지 초탈한 태도였다.
“정말 괜찮아. 이럴 줄 알았으면 광림과 이능을 펑펑 쓰면서 싸울걸 하는 미련은 남았지만.”
“이계 발생이나 에너미의 습격에 휘말리셨던 건가요?
“아니. 내가 죽은 이유는…….”
파수꾼은 말을 중간에 멈췄다.
그러다 내 쪽, 정확히는 내 몸에 덮인 거적을 보며 말을 다시 이었다.
“네가 푹 쉬고 나면 알려 줄게.”
“전 괜찮아요.”
“안 돼.”
계속 가만히 앉아 있다 왔으니까 딱히 쉴 필요는 없는데.
하지만 파수꾼의 태도는 완강했다.
“그 거적을 벗어 볼래? 이제 에레쉬키갈 님의 영역을 완전히 빠져나왔으니 괜찮을 거야.”
혹시 모르니 나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 선에서 시선을 돌려보니 내가 오랜 기간 머물렀던 어두운 명계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파수꾼의 말대로 이곳이 명계가 아님을 확신한 후에야 거적을 카드화하였다.
파앗!
거적이 사라지자 은광고 교복이 드러났다.
파수꾼이 교복을 흥미로워하며 관찰했다.
“지금 은광고 교복은 이렇구나! 내 때는 하얀색이었는데.”
“은광고 학생이셨어요?”
“응, 그때는 플레이어 개념이 잘 잡혀 있지 않은 상태라 은광고는 플레이어 마이스터 고등학교가 아니었지만.”
“선배님이셨군요.”
“하하, 졸업을 못 했으니까 선배 소리를 듣기 쑥스럽다. 아, 우리 애들의 교복 입은 모습이 기대된다.”
정말로 선배 소리가 쑥스러운 건지 파수꾼은 대놓고 말을 돌렸다.
말하는 거나 행동 모두가 우리 학교에 있을 법한 내 나이대의 학생처럼 보였다.
‘우리 애들’이라는 발언만 아니라면 완벽하겠지만.
“현세에서 큰 싸움을 치르고 왔지? 이능파는 회복된 것 같은데 지쳐 보인다.”
“푹 쉬고 왔어요.”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은데? 어쨌든 내가 안 괜찮아. 너를 무리시키면 처가댁에서 나를 어떻게 보겠어.”
처가댁.
그 단어를 듣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호족은 은빛 영웅의 본가라 할 수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닌데, 그 호랑이들을 처가댁이라고 하니 굉장히 어색했다.
내가 입을 다문 사이 파수꾼은 내 교복 차림을 관찰하다가 손목을 가리켰다.
손목에는 황지호가 지력의 사용을 허가하며 새긴 인장이 남아 있었다.
지력이 닿지 않는 곳이라 빛을 잃은 상태였지만, 형태는 온전했다.
“너는 황호 님께서 이런 인장을 허락할 정도로 귀하게 여기는 은인이잖아. 네가 이곳에 오게 된 원인을 제공했으니 이미 내 인상은 최악이겠지만.”
사실 황지호가 새긴 이 인장은 일회용처럼 사용하면 사라질 줄 알았다.
지력을 사용했고 한국 시간 기준으로 0시가 지나갔는데도 남은 게 의외였다.
설마 앞으로도 계속 지력의 사용을 허락한다는 뜻은 아니겠지?
이 허락의 인장은 지상에 들어가면 없어질 거다, 아마도.
“은인인 네가 걱정돼. 그리고 늦었지만 처가댁에 잘 보이고 싶어. 얼른 쉬러 가자.”
“서두르는 게 낫지 않을까요?”
“괜찮아. 명계만큼은 아니지만 이곳의 시간 역시 현세에 비해 느리게 흘러.”
정말로 괜찮은 걸까?
조바심이 일었지만 설득하기 어려울 것 같아 결국 그 말에 따르기로 했다.
파수꾼은 쉴 곳으로 안내하겠다며 앞장섰다.
‘생각보다 더 넓다.’
걸어가는 동안 눈에 들어오는 광경을 보며 감탄이 나왔다.
수많은 죽음이 오고 가는 장소라서 그런 건지 꽤 걸었는데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멀리 보이는 풍경은 비정형적으로, 시시각각 그 모습을 바꾸었다.
초원으로 보였던 것이 잠시 눈을 뗀 사이에 돌밭이 되어 있었고, 첨탑이 잔뜩 늘어서 있기도 했다.
파수꾼의 뒤를 따르지 않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길을 잃을지도 몰라 긴장하고 있자니 파수꾼이 말을 걸었다.
“명계에서 여기로 걸어올 때 별일 없었어? 뒤를 돌아보지는 않아도 한 번쯤은 멈출 줄 알았는데 똑바로 걸어오더라.”
“별문제 없었어요.”
“망자의 목소리가 너를 붙잡지 않았다니…… 그 명계에서 빌릴 목소리가 없었나? 아니, 빌릴 만한 목소리가 없으면 아무 목소리로 도움을 청하거나 비명을 질러서 발목을 잡을 텐데.”
파수꾼과 마주치기 직전, 에레쉬키갈이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한 이후 열 걸음 정도 걸었다.
그사이에는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소리도 듣지 못했고 그저 시야가 밝아져 편안한 기분까지 들었다.
이유를 생각해 보다가 말했다.
“명계의 여신께서 배려해 주신 덕분이 아닐까요?”
“그건 아닐걸. 에레쉬키갈 님이 너를 배려해 주긴 했지만, 떠나려는 자를 잡아 두는 억지력은 비유하자면 일종의 자동 시스템이거든. 명계는 너를 붙잡아 두고 싶지 않았나 보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죽은 사람의 세계가 나를 붙잡지 않는다는 건 좋은 일 아닌가.
명계에서 환영받는 손님은 보통 죽은 사람이니까.
그 이후로도 파수꾼과의 회화가 이어졌다.
이동하는 동안 파수꾼은 말이 많아서 조용할 틈이 없었다.
대화의 주제는 전부 특별할 게 없었고, 이곳에 온 목적에 관해 이야기하려 하면 파수꾼은 바로 말을 돌려 버렸다.
“명계에서 이것저것 많이 생각했잖아? 생각이 지나치면 지쳐. 지금은 머리를 비워 둬.”
생각을 안 할 수는 없는데.
결국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나를 쉬게 하겠다는 파수꾼의 고집은 꺾을 수 없었다.
나랑 동갑이라고는 하나 거의 100년 전에 죽었고, 윤회의 굴레에서 그보다 훨씬 긴 기간을 체감하며 지내서 그런지 고집이 상당했다.
“직접 문을 열어 볼래?”
파수꾼이 숙소로 추정되는 문을 가리켰다.
저승의 문에서 느낀 압박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게 평범한 문인 것 같았다.
끼이익.
문을 열자 눈앞이 흐려졌다.
문 너머의 시야는 몹시 불안정해 앞이 흐릿하고 뿌옇게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황명호 대저택에서 본 것 같은데…….’
계절마다 인테리어를 새로 하는 황지호가 겨울 분위기에 맞춰 꾸민 거실.
언제나 천사인 올무가 마중 나오는 넓은 현관.
적호와 김신록이 주로 앉는 소파.
은호의 후예들과 산령이 놀던 러그.
별채에 있는 은호의 다기.
백호군이 서 있던 창가.
어지러운 풍경 속에 황명호 대저택의 일부가 섞여 있었다.
왜 저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지 알 수 없어서 당혹스러웠다.
“음, 어째 형태를 갖추지 못하네.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했는데…… 집에 대해 더 자세히 생각해 볼래?”
“집이요?”
“응, 편히 쉬었으면 해서 네가 생각하는 집의 형태에 맞춰서 숙소를 만들려고 했거든.”
문 너머는 내가 생각하는 집의 모습을 형상화하나 보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호랑이 저택을 집처럼 생각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아니야, 그건 내 집이 아니야.’
어둠 속에서 홀로 있던 탓일까, 호랑이 저택이 편하고 시끌벅적해서 나도 모르게 떠올린 것 같다.
크리스마스를 대비하기 위해서 너무 자주 방문한 탓일지도 모른다.
그래, 호랑이 저택에 오래 머무른 탓에 이런 헛것을 보는 게 분명하다.
머릿속에서 호랑이들 생각을 떨쳐 내려 애썼다.
그러자 점차 눈앞의 풍경이 안정되었다.
은광고 1학년 건물 17층에 있는 내 기숙사 방의 모습이었다.
겨우 안심이 되었다.
“아직 집의 이미지가 명확하지 않은가 보구나. 여기도 괜찮지만 처음 떠오른 곳이 더 따뜻하고 좋아 보였는데, 아쉽다. 아직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형태를 바꿀 수 있는데 다시 해 볼래?”
“괜찮아요.”
“그래…….”
파수꾼은 뭐가 아쉬운 건지 한 번 더 권하고 포기했다.
2인실을 홀로 쓰고 있었기에 황명호 대저택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지만 꽤 넓고 괜찮은데.
파수꾼은 내게 쉴 것을 권하며 물러났다.
“너를 맞이하기 위해서 특별히 신경 썼어. 이 안에서는 마음 놓고 자도 돼. 일어날 시간에 맞춰서 올게. 그럼 잘 자.”
끼이익.
파수꾼이 문을 닫자 다시 혼자가 되었다.
혼자 남은 나는 기숙사 방을 자세히 살폈다.
‘내가 기억하는 대로야. 차이점이 느껴지지 않아.’
공용 공간인 거실을 둘러보다 침실 문을 열었다.
침실의 모습도 내가 마지막으로 본 모습 그대로였다.
기숙사 방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어서 푹 쉴 수 있을 것 같다.
‘졸리긴 하지만 안 자도 될 것 같은데.’
하지만 막상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으니 곧바로 잠이 쏟아졌다.
그렇게 나는 내 기숙사 방과 몹시 닮은 장소에서 꿈 없이 잠들었다.
얼마나 자다가 일어난 걸까.
눈을 뜨니 정신이 잠들기 전보다 명료해진 게 느껴졌다.
눈을 몇 번 깜빡이다 일어날 준비를 하니 거실 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이어서 파수꾼의 목소리가 들렸다.
“음, 잘 보니까 호실이 써 있네. 여기가 어딘가 했더니 은광고의 기숙사였구나.”
파수꾼은 혼잣말을 하며 거실 구경을 하는 것 같았다.
나를 깨우러 온 것 같은데 어느 사이엔가 파수꾼은 본 목적을 잊은 것처럼 들떠 있었다.
“내 때와는 전혀 달라! 우리 애들은 기숙사에 들어갈까, 아니면 그대로 저택에서 지낼까? 저택에서 지내겠지? 기숙사 생활을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텐데.”
파수꾼은 은광고 1학년 학생이었고, 아이들도 곧 은광고에 들어간다.
그러니 은광고에 관한 게 궁금하기도 할 거다.
나는 최대한 천천히 준비를 마쳤다.
파수꾼이 기숙사를 충분히 둘러볼 만큼 시간이 흘렀을 즈음 침실 문을 열고 나갔다.
“잘 잤어? 내가 깨운 건 아니야?”
“안녕하세요. 들어오시기 직전에 일어났어요.”
파수꾼은 내가 잘 잔 건지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빤히 들여다봤다.
관찰을 마친 후에야 파수꾼은 거실에 놓인 소파에 앉자고 권한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은인이 잘 잔 것 같아서 다행이야. 그럼 본론에 들어갈까. 나에 관해선 어디까지 들었어?”
“그때 시간이 많지 않아서 자세히 듣지 못했어요. 직접 가서 들으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래, 어디부터 말해야 할까. 아, 내가 죽었을 때의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파수꾼은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사실 나는 네가 싸우는 그자에 의해 죽었어.”
그 말을 들은 순간 내가 파수꾼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건지 의심했다.
내가 싸우는 그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흑막을 가리키는 것 같은데.
파수꾼의 충격적인 발언은 한 번 더 이어졌다.
“그리고 이대로 가면 난 소멸할 거야. 그자에 의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