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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677화 (673/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77)

88. 굴레 (11)

상위 존재의 개입으로 뒤틀리고 있는 하늘 아래.

길게 울리는 뱃고동 소리 사이에서 황호의 목소리가 똑똑히 울려 퍼졌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는데 대꾸를 바로 못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처웃던 황지호가 저런 목소리로 말한 탓일까, 답변이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황지호가 연락을 취할 가능성은 예상했는데 왜 말이 안 나올까.’

회토의 토끼 옥토연이 은서호, 은이호, 은재호의 친아버지와 연락할 수단 정도는 마련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호족들이 옥토연을 불러내서 그 수단을 사용하게 할 게 뻔했다.

예고도 없이 일을 치른 것도 있고, 죽음과 연관된 공간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유난히 걱정 많은 호랑이들이 나설 건 당연한 사실이었다.

내가 개인적인 일로 명계에 간다고 둘러대도 뭔가 있을 거라고 추정할 것 같았다.

‘퍼스트 크리스마스 시나리오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으니까 일단은 개인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긴 해. 하지만 결국 흑막의 손이 여기까지 닿았으니, 호족과 무관계한 것도 아니지.’

또 예전에 나와 황지호는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영국에서 일을 마친 후, 황지호가 반 아이들과 함께 나를 마중 나왔을 때였다.

―앞으로 이런 계획은 일찍 말하도록. 네 의사와 안위 모두 고려한 방안을 모색하겠다.

―······알았어.

그때 알았다고 답해 놓고 결국 일찍 말하지는 않았다.

명계로 출발하는 시점은 퍼스트 크리스마스 시나리오가 마무리되는 시점, 우마왕을 쓰러뜨리기 위해 내가 지력을 사용한 이후여야 했다.

지하의 명계를 다스리는 에레쉬키갈이 이 땅에 쉽게 개입하기 위해서는 지력을 소모한 직후가 적합하니, 쉬었다 갈 틈이 없었다.

그래서 말하기 어려웠다.

‘명계에 가는 것 자체를 좋게 생각할 리가 없는데, 모든 일이 끝난 직후라면 설득하기 어려웠을 거야. 못 가게 하거나, 따라올 것 같았어.’

하지만 은빛 영웅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그렇기에 예고 없이 명계행을 하고 예약 메시지를 통해 대략적인 상황을 전한 거다.

생각이 많아진 탓에 말을 못 하는 사이 황지호가 먼저 말했다.

[네가 대답할 때까지 기다리겠다.]

내가 파수꾼 옆에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는데도 황지호는 여기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실제로 황지호의 예상대로 내가 여기 있긴 했다.

손거울을 든 파수꾼이 나를 지긋이 응시했다.

파수꾼은 나와 황지호의 대화에 끼어들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연락할 때 큰 힘을 소모한다고 했지. 황지호는 내가 입을 열 때까지 계속 기다릴 거야.’

모두의 안전을 위해 여기에 왔는데, 괜히 내가 버티면 호족의 수장이 큰 힘을 낭비하게 만드는 꼴이 된다.

결국 순순히 황지호의 질문에 응하기로 했다.

“있어.”

[거기에 있군.]

내가 대답하자 손거울 너머로 한숨 소리 같은 게 들린 것 같았다.

손거울을 중간에 끼고 있어서 그런지 소리가 조금 멀게 들렸다.

그래서 황지호가 쉰 게 안도의 한숨인지, 분노 어린 한숨인지 구분이 안 갔다.

스윽.

그때, 파수꾼이 손거울을 기울여 내 쪽으로 들어 보였다.

거울 안에는 황유호의 모습을 한 황지호가 있었다.

작은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어린 애를 걱정시켰다는 생각에 갑자기 죄책감이 치밀어 올랐다.

[이제야 얼굴을 보는군.]

나를 보고 한숨을 한 번 쉰 황지호가 다시 말을 걸었다.

말없이 갔다고 분노하거나, 실망할 줄 알았는데 내 예상은 전부 빗나갔다.

[무사한가?]

“……어.”

[명계는 춥지 않았나? 거기에 얼마나 있었지?]

명계는 몹시 추웠다.

하지만 에레쉬키갈이 준 거적이 있어서 딱히 추위에 시달리진 않았다.

어둠 속에서 얼마나 머물렀는지는 정확히 헤아릴 수 없다.

체감상 몇 달이라고 느꼈지만, 먹지도 자지도 않았기에 내 시간 감각을 믿을 수 없다.

광림이 초기화된 시간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현세에서는 실제로 몇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을 테니 머문 시간을 따지긴 어렵다.

딱히 얼버무리려는 건 아니지만, 솔직한 소감을 전했다.

“잘 모르겠는데.”

[아주 오래 있었나 보군. 추위에 관해 답하지 않는 걸 보니 꽤 추웠던 게 분명해.]

황지호가 탄식하며 말했다.

모른다고 했는데 왜 저런 답변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이 주제를 더 파고들기 전에 말을 돌려야겠다.

호랑이들의 안부를 물을 겸 현세의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크리스마스는 잘 보냈어?”

[지금은 크리스마스 아침이다. 은호의 후예들이 일어나 선물을 확인했지. 그 후 달토끼에게서 이 손거울을 받아 냈다.]

아직 크리스마스가 안 지났구나.

아이들이 아침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다는 말에 파수꾼이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싱글벙글한 표정을 지었다.

뜻하지 않게 아이들 소식을 들어 기분이 좋은가 보다.

그런데 아직 크리스마스 아침이라니.

명계, 윤회의 굴레, 현세 이 세 곳 전부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는 게 실감이 났다.

[메리 크리스마스.]

황지호가 갑자기 크리스마스 인사를 툭 던졌다.

평범한 성탄절 인사인데 어쩐지 무겁게 들렸다.

[그런 메시지를 받고 크리스마스를 제대로 보낼 수 있을 것 같으냐?]

내가 보낸 메시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기 전에 인사하고 싶어서 그랬는데.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보냈어야 했나?

하지만 나름 중요한 행사인데 인사도 안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서 입을 다무는 건지, 몰라서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지금 얼굴을 보니 후자 쪽인가?]

“메시지에 문제가 있었어?”

[……후자 쪽이군.]

황지호가 두통을 느끼는 듯 손거울을 들지 않은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손거울 너머로 보이는 손끝이 좀 떨린 것 같기도 했다.

나 때문에 화가 나서 그런 거면 차라리 다행인데, 손거울로 통신하기 위해 무리하는 거라면 그만했으면 좋겠다.

황지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손거울을 들고 있는 건 윤회의 굴레를 지키는 파수꾼인가?]

“안녕하세요, 황호 님! 제가 파수꾼이에요.”

이번에 황지호가 말을 건 상대는 파수꾼이었다.

긴장한 상태로 숨을 고르던 파수꾼이 밝게 인사했다.

파수꾼은 처가댁의 큰 어르신과 이야기하는 게 떨리는지 상기된 얼굴로 마른 침을 삼켰다.

밝게 인사하는 게 마음에 든 건지 황지호가 다소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조의신은 호족의 은인이다. 네가 호족의 가족이라면 그를 탈 없이 배웅하도록.]

“네, 은인의 무사 귀환을 위해 최선을 다할게요!”

[대답이 시원해서 좋군.]

이제 손거울 통신은 마무리되는 걸까.

그렇게 생각했을 때 다시 황지호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조의신.]

내 이름이 들리자 파수꾼이 다시 손거울을 내 방향으로 돌렸다.

나한테 할 말은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왜.”

[내가 좋은 성탄절을 보내기를 바라나?]

딱히 황지호가 크리스마스를 못 보내는 걸 바라는 게 아니므로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인사도 남긴 거다.

황지호는 손거울 너머로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빨리, 무사히 돌아와라.]

그 말을 끝으로 손거울을 감싼 황금빛이 없어지고, 거울 너머 황지호의 모습도 사라졌다.

그런데도 한동안 손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황호 님은 정이 깊고 다정하고 좋은 분이구나! 무서운 호족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게 죄송할 정도야.”

다른 건 몰라도 무서운 호족인 건 틀린 말이 아닐 텐데.

그 노친네가 은영관 지하에 처박아 고문하거나 사회적으로 매장시킨 놈들을 보고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물론 황지호가 그런 처분을 내린 대상은 전부 그보다 더 심한 꼴을 해도 싼 놈들뿐이고, 나도 그 과정에 여러 번 가담하긴 했다.

파수꾼은 황호와 이야기한 게 신나는지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황호 님과 약속한 대로 꼭 너를 무사히 돌려보낼게! 무리하면 안 돼!”

“네, 감사합니다.”

“그래그래, 정말 예의가 바르구나. 기쁘긴 한데 편하게 대해도 돼. 은인과 친구처럼 지내고 싶어서 계속 이 나이대의 모습을 하고 있거든.”

아무리 그래도 친구는 조금 어렵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늘 17세의 모습을 한 노친네가 떠올랐다.

‘잠깐, 황지호는 내 앞에 있을 때 보통 17세의 모습을 하는데.’

휴일에도 꼬박꼬박 교복을 입는 걸 볼 때마다 나잇값 못 하는 노친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쩌면 황지호는 파수꾼과 비슷한 생각을 한 게 아닐까?

‘내 안위에 관해서 묻기만 했지. 왜 내가 여기에 왔는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묻지 않았어.’

황지호는 마지막까지 내 안부 외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로 통신을 종료했다.

머리가 많이 복잡해졌다.

“이렇게 예의가 바르면 상위 존재들과 만나도 별문제 없겠다.”

“……네.”

파수꾼과 말하는 중이었지만 황지호가 손거울을 통한 통신을 종료할 때 목소리에 기운이 없었던 것 같은 게 자꾸 떠올랐다.

손거울을 사용하며 힘을 소모한 탓이라 그런 걸 수도 있지만, 그건 아닐 것 같았다.

“네가 이렇게 마음을 쓰고 있는 걸 황호 님이 아셔야 할 텐데.”

파수꾼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못 들은 척하고 있자니 파수꾼이 하늘을 가리켰다.

나와 파수꾼을 재촉하듯 뱃고동 소리가 다시 길게 울렸다.

“그럼 가자! 힘들어지면 바로 말해.”

“힘든 일이 생기는 건가요?”

“우리를 부르는 상위 존재는 하나가 아니거든. 거의 모든 명계의 지배자가 한자리에 모일 거야. 나는 그럭저럭 익숙해졌긴 했는데, 많은 분들이 같이 계시면 위압감이 상당해.”

지금 나와 파수꾼을 부르는 상위 존재는 한 명이 아닌가 보다.

그것도 파수꾼이 위압감을 느낄 만큼 많은 숫자인 듯했다.

*    *    *

크리스마스 아침, 황명호 대저택의 현대식 별채.

막 통신을 마친 황호가 손거울을 내리고 겹겹이 두르고 있던 결계를 해제했다.

손거울을 사용하는 동안에는 시간축을 윤회의 굴레 쪽에 맞추기 위해 이능파나 결계 등으로 시간의 흐름을 고정할 필요가 있었다.

상당한 정신력과 이능파를 소모하므로 12지의 진족이라 해도 쉽게 사용할 힘이 아니었다.

은호가 황유호의 모습을 한 황호가 마실 만한 곡물 율무차를 내밀었다.

“말씀은 잘 나누셨나요? 제 쪽에서 봤을 땐 몹시 짧게 느껴졌어요.”

“그런가? 조의신의 얼굴을 봤다. 조의신은 무사하더군. 파수꾼에게도 잘 보내라 당부했다.”

꽤 길게 대화했으나 옆에서 지켜보는 이들은 정말 찰나의 순간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손거울을 들었다가 바로 내려 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손거울을 받아 든 옥토연이 투정을 부렸다.

“나도 은인이랑 파수꾼이랑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할 거면 네 힘으로 해라.”

“알았어. 할래!”

황호에게 도발당한 옥토연이 냉큼 손거울을 집었으나 옥토윤이 곧바로 제지했다.

“안 돼. 그걸 하면 며칠은 일어나지 못할 텐데, 할 일이 많잖아.”

“그치만! 오랜만에 파수꾼 보고 싶어!”

“곧 새해인데, 그때 안 놀 거면 해.”

토족 둘이 시끄럽게 떠드는 걸 무시하고 황호가 찻잔을 기울였다.

윤회의 굴레와 이어지는 손거울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밤새도록 달빛을 받아야 했는데, 그 때문에 옥토연을 저택에 체류시킬 수밖에 없었다.

은호의 후예들이 저 둘을 반기긴 했으나 황호로서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원래 토족 대신 저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건 조의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 조의신 외에도 크리스마스 파티에 있어야 했으나 자리를 비운 이가 있었다.

바로 백호였다.

“그 미련한 놈은 아직도 밖에 있군.”

“백호 형님을 미련하다고 할 처지가 아니실 텐데요.”

은호는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조의신의 무사를 확인한 후 은호의 날 선 분위기는 다소 누그러진 상태였다.

“황지호의 모습을 한 분신이 백호 형님 곁에 있잖아요.”

“…….”

황호는 미련함을 지적받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없이 조의신이 사라진 균열 주변에 서 있는 자신의 친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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