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678화 (674/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78)

88. 굴레 (12)

일렁이는 허공 저편.

명계의 주인들이 하나둘 나타나는 가운데, 침묵이 깨졌다.

[둘을 불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허공에서 흑발의 사내가 나타났다.

눈을 가린 사내의 손에는 막 벗은 퀴네에가 들려 있었다.

퀴네에의 정체는 착용한 자의 모습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투구로, 하데스나 플루토로 불리는 명계의 신의 소유물이었다.

[큰 권능을 발휘할 때마다 퀴네에를 써야 한다니, 번거롭군.]

수염을 기른 근육질의 사내, 지저의 신 오르쿠스가 이를 지켜보다 말했다.

이름 자체가 저승을 상징하는 신, 디스파테르가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로마와 그리스를 대표하는 명계의 신 셋이 한자리에 모인 건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기에 플루토가 안대 너머로 둘의 모습을 길게 응시하다 말했다.

[이 퀴네에는 내 위업의 상징 중 하나고, 힘을 증폭시킨다. 그들을 호출하기 위해선 그만한 준비가 필요했다.]

[자네는 지난 회합의 주재자였지. 그런데도 그렇게 힘이 필요한가?]

명계의 주인들이 모이는 자리에는 대표가 없었다.

위도 아래도 없이 각자가 다스리는 죽음의 세계를 존중하기 위해서였다.

다만 회합 구성의 편의를 위해 매번 무작위로 주재자를 선출해 약간의 권한을 부여하곤 했다.

참고로 지난 회합의 주재자는 각자 100면체의 주사위를 던져 선정하였고, 가장 높은 숫자가 나온 플루토가 뽑혔다.

[이곳이 황천이 아님을 잊지 마라. 나는 그나마 주재자였기에 힘의 사용이 허락된 것이다. 우리는 이 세계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무거운 맹세를 나누지 않았나.]

[그렇지. 현세와 이 세계가 아무리 혼란에 빠져도 삶과 죽음의 순리는 지켜져야 하니까.]

지옥을 다스리는 열 명의 시왕(十王)의 대표, 염라대왕이 플루토의 말을 거들었다.

저승의 판관 중 하나였던 염라대왕은 현세에 이르러 수많은 전승이 알려지고, 재창조되어 인지도가 크게 올라 신격이 올랐다.

뒤에 한발 물러나 있는 다른 아홉 명의 시왕들에 비해 염라대왕은 남다른 신격을 품고 있었다.

출석한 명계의 주인들이 염라대왕의 그늘진 관모 아래로 숨긴 눈이 품은 신격을 관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륵, 스르륵.

회담 개최 시각이 가까워지자 허공 속 회담장의 자리가 채워졌다.

회담이 자주 열린 것도 아닌데 늘 절반도 채워지지 않았던 자리가 이번만큼은 꽉 찰 듯하였다.

[오딘과 다그다다. 저 둘은 이계 충돌 이후로 단 한 번도 출석하지 않았는데.]

[늘 헬헤임과 바이브만 출석했지. 이번엔 동행했군.]

[그들의 영역은 죽음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아 다망하니 어쩔 수 없다.]

본래 이 회합의 주요 목적은 윤회의 굴레를 지키는 파수꾼의 보고를 받는 것이다.

겨우 보고를 받는 것뿐이니, 죽음과 연관이 있으나 직접 명계를 다스리지 않는 자는 회합이 있어도 보통 불참하였다.

명계를 거쳐 윤회의 굴레에 당도하기까지 힘과 시간의 소모가 컸던 탓이었다.

[이만한 수가 모인 건 이계 충돌 이후로 처음이군.]

플루토가 주변을 둘러보며 조용히 안도했다.

플루토의 시선 끝에 호플리테스 병사들이 착용할 법한 청동 방어구 차림을 한 이가 있었다.

이름 그 자체가 죽음을 의미하는 상위 존재, 타나토스로 오딘과 다그다처럼 회합에 단 한 번 출석한 상위 존재였다.

타나토스가 머리에 돋은 검은 날개를 퍼덕이며 말했다.

[죽음과 우리의 권능이 달린 일이니 올 수밖에.]

*    *    *

‘그런데 왜 파수꾼만이 아니라 나도 부르는 걸까.’

하늘이 어그러지고 신들의 부름에 관해 들었을 때, 나는 상위 존재들이 파수꾼만을 부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파수꾼은 방금 상위 존재들이 ‘우리’를 부른다고 했다.

상위 존재가 무슨 의도인지 알 수 없었으나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따라가기로 했다.

“어디로 가면 되나요?”

“하늘에서 부르고 있으니까 하늘로 가야 해. 아, 윤회의 굴레에선 땅과 하늘의 개념이 모호하지. 지금 발을 딛고 서 있는 지면 기준으로 위쪽으로 갈 거야.”

툭 하면 풍경이 바뀌는 곳이라 그런지 공간의 개념이 현세와는 다른가 보다.

어쨌든 걸어갈 수 없는 곳인 건 분명했다.

“날아가야 하나요?”

“은인의 힘을 낭비하게 할 수는 없지. 황호 님과도 약속했잖아. 계단을 부를게!”

파수꾼은 줄곧 은인 소리를 하며 내게 잘 대해 주었다.

거기에 더해 황지호가 호족의 은인과 가족이 어쩌고 하는 바람에 의욕이 더 커진 것 같다.

이미 충분히 잘해 주고 있다고 말했지만, 파수꾼은 내가 말린다고 해서 들을 것 같은 성격이 아니었다.

“괜찮아, 이 정도는 별거 아니야.”

웃으면서 응수한 파수꾼이 한 번 박수를 쳤다.

짝!

손뼉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리는 것과 동시에 강대한 이능파가 터졌다.

충격파를 상쇄할 때보다 더 강한 힘을 쓴 것 같았다.

저 정도의 힘을 다루고도 파수꾼은 지치지 않는지 웃고 있었다.

쿠구구구…….

파수꾼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이능파가 스며든 지면이 흔들렸다.

흔들리던 지면에서 빛과 함께 거대한 원기둥이 솟아올랐다.

빛이 가라앉을 즈음엔 원기둥은 거대한 나선형의 계단 형태로 변해 있었다.

하늘로 이어지는 투명한 계단의 위용에 잠시 말을 잃고 바라봤다.

“자, 가자.”

파수꾼의 말을 들은 후에야 발을 움직였다.

계단판 위에 올라서니 견고함과 그 안에 서린 힘이 실감이 나서 경악스러웠다.

이 정도의 힘을 자유롭고 여유 있게 다루다니.

“응? 아, 아냐. 은인이 더 굉장해! 나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서 권능을 나눠 받은 것뿐이라…….”

칭찬을 전하니 파수꾼이 쑥스러워하며 앞서 걸어나갔다.

파수꾼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오르면 오를수록 하늘에 가까워졌다.

밑을 내려다보니 지면과 멀어진 탓에 아찔한 광경이 보였다.

여차하면 광림을 이용해 날 수 있으니 겁이 나진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신중하게 발을 내딛게 되었다.

“향로는 잘 챙겼어?”

내 걸음이 늦어진 걸 걱정한 건지 파수꾼이 말을 걸었다.

물론, 호족의 신보인 향로는 잘 챙겼다.

무려 호족의 수장 앞에서 들고 명계로 가 버렸는데 잊을 수 없었다.

‘황지호는 호족의 신보에 관해서도 묻지 않았네.’

내 안부를 묻는 것보다 향로에 관해 묻는 게 호족 입장에선 득이 될 일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황유호의 모습으로 빨리, 무사히 돌아오라던 황지호의 말이 머리에 맴돌아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래, 네가 잘 챙기고 있으면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야.”

파수꾼은 성큼성큼 계단 위를 오르면서 숨 한 번 흐트러지지 않은 채로 계속 말을 걸었다.

파수꾼 덕에 발밑의 풍경이나 손거울 너머로 본 황지호의 얼굴이 덜 떠올랐다.

“마지막 회합의 주재자는 플루토 님이셨는데, 이번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회합의 주재자요?”

“응, 매번 랜덤하게 선정해.”

하긴, 죽음과 관련된 신이 한둘이 아닐 텐데 누군가는 중심 역을 맡아야 할 거다.

주재자 역할을 잘 수행할 것 같은 상위 존재를 머릿속에 정리하다 보니 어느덧 계단의 끝에 이르렀다.

“도착했다.”

계단의 끝에는 거대한 문이 있었다.

문에는 정교하게 꼬여 있는 줄이 새겨져 있었다.

잘 보니 그건 굴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곳을 윤회의 굴레라고 부르기에 문에 이렇게 새겨 둔 걸까.

“안녕하세요, 부름에 응해 손님과 함께 이 자리에 왔습니다!”

파수꾼이 문을 향해 크게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문이 소리 없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열린 문 너머는 수백 명은 수용할 것 같은 규모의 원형 회의장이었다.

내가 서 있는 위치에선 회의장 전체가 보이지 않았지만, 시야가 닿는 범위에 있는 이들은 모두 눈을 가리고 있었다.

‘전부 상위 존재구나.’

알고는 있었지만 범상치 않은 기백이 회의장에 넘쳐나니 긴장감이 느껴졌다.

자세를 다잡고 앞을 보고 있을 때, 파수꾼의 어깨가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파수꾼이 긴장했나? 아니, 긴장했다기보다는 압박감을 견디는 것 같은 느낌인데.’

파수꾼은 이 회합을 여러 번 경험해 봤을 텐데 분위기가 뭔가 이상했다.

원형 회의장 중심에 서 있는 이가 위엄 있게 말했다.

[가까이 오라. 단, 그 선을 넘어선 안 된다.]

검은 머리카락과 손에 든 퀴네에, 주재자로 보이는 위치 등을 고려해 봤을 때 말한 상위 존재는 플루토인 것 같았다.

귀가 한순간 저릿해질 것 같은 이능파에 과연 신의 목소리라고 감탄했다.

‘선은 저걸 말하는 건가.’

플루토가 가리킨 선은 문에서 열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 그어져 있었다.

자세히 살펴봐야 알겠지만, 저 선은 일종의 결계 같았다.

감히 신의 영역을 넘보지 말라고 선을 그은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굳이 선을 넘을 생각이 없었기에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다섯 걸음을 걸었을 때였다.

“으윽…….”

파수꾼이 비틀거리다 무릎을 꿇었다.

급히 부축했지만, 파수꾼은 도통 일어나지 못했다.

파수꾼은 거친 숨을 고르는 게 고작이었다.

[괴로우면 그 자리에서 멈추어도 좋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 없다. 이 자리에 모인 신격은 평범한 인간이 견딜 만한 것이 아니다. 이만한 숫자가 모인 것은 오랜만이고, 너에게 이리 가까이 오라고 한 적도 없었지.]

파수꾼은 고개를 조아리며 거듭 사죄했다.

파수꾼은 저들이 품은 신격과 위압감에 짓눌린 듯했다.

그때, 플루토가 내게 물었다.

[너는 아무렇지 않은가?]

아무렇지도 않았다.

명계의 신들의 힘이 얼마나 거대한지는 느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숨을 못 쉬거나 걷지 못할 정도로 압박감을 느끼진 않았다.

여태까지 여러 상위 존재를 만날 때에도 그랬다.

이만한 숫자를 한 번에 만난 적은 없지만, 수가 많다고 해서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하겠다.

하늘에 별이 평소보다 많이 빛나면 별의 숫자와 빛에 감탄하긴 해도 거동이 불편해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걸 솔직히 말하면 실례가 될까? 아니, 거짓을 고할 수는 없어.’

신화 속에서 신들에게 거짓을 고한 인간의 최후는 대부분 비참했다.

나는 곧게 답하기로 했다.

“저는 괜찮아요.”

플루토는 내 대답을 듣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

플루토뿐만이 아니라 다른 상위 존재도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가. 그렇다면 더 가까이 오라.]

플루토의 말대로 앞으로 걸어갔다.

무릎을 꿇은 파수꾼을 뒤로하고 앞으로 걸었다.

나는 선을 한 발자국 앞두고 멈춰 서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정중하게 인사하니 플루토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위로 올라갔다.

[듣던 대로 예의 바른 인간 아이구나. 이런 모습을 가까이 보는 건 나쁘지 않군. 총명한 아이라고 하니 내 소개는 필요 없겠지.]

대체 상위 존재들 사이에서 소문이 어떻게 도는 건지 모르겠다.

플루토는 그 말을 하고 반쯤 몸을 돌려 회의장을 향해 말했다.

[손님이 도착했으니 내 역할은 끝났다. 이번 회합의 주재자를 뽑겠다. 모두가 모였으니 바늘을 돌리지.]

플루토가 검은 바늘을 허공에 띄웠다.

상위 존재들 앞에 각자 바늘이 하나씩 떠올랐는데, 검은 바늘과 같은 방향을 가리키면 당첨인가 보다.

바늘을 잡은 상위 존재들이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손님과 이야기하려면 주재자 자리를 노려야 하나?]

[이번만큼은 저 역할을 맡고 싶군.]

[이번 회담 규모를 생각하면 하고 싶지 않지만, 조금 탐나는데.]

[바늘에 손을 쓰진 않았겠지?]

플루토가 손을 들며 말했다.

[스틱스강에 맹세코.]

스틱스강에 걸고 한 맹세를 어기면 1년 동안 목소리를 잃고, 9년간 신들의 회의에 참석할 자격을 잃지 않나?

스틱스의 이름이 나오자 모든 상위 존재들이 납득하여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그러면 이번 주재자를 선정하겠다.]

플루토의 말이 끝나자 검은 바늘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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