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79)
88. 굴레 (13)
모든 상위 존재들이 고개를 들어 검은 바늘을 응시했다.
돌아가는 검은 바늘의 끝을 쫓아 눈이 움직였다.
‘지금 상위 존재들의 모습을 살피는 건 실례가 아니겠지.’
바늘이 돌아가는 방향에 맞춰 선 너머로 보이는 상위 존재들을 살폈다.
불꽃으로 된 왕관을 쓴 상위 존재는 명계 나라카를 다스리는 죽음의 신, 야마라자.
밧줄을 목에 두르고 있는 여신은 마야 신화 속, 영혼을 낙원으로 인도하는 익스타브.
바구니 형태의 머리 장식을 쓴 여성은 죽음을 관장하는 이집트 여신 네프티스, 그 옆에 자칼 머리를 한 반수의 남성은 죽은 자의 수호신 아누비스.
‘낫을 들고 있는 해골 모습을 한 신은 체르노보그, 브리싱가멘을 착용하고 매의 날개옷을 입은 여신은 프레이야…… 그 옆에 있는 건 누구지?’
빠르게 상위 존재들의 정체를 추측하고 있을 때, 입가만 보이는 베일을 착용한 여신이 내 쪽을 보고 미소 지었다.
베일 외에는 별다른 특징이 보이지 않아 이름을 알아내기 어려웠다.
그래도 같은 디자인의 베일을 착용한 남성이 곁에 있어 힌트를 얻었다.
‘부부가 둘 다 죽음과 관련된 상위 존재라면 후보가 좁혀져.’
결론을 내리기 전에 바늘이 돌아가 시선을 돌렸다.
관복에 관모를 쓴 열 명이 눈길을 끌었다.
‘아마 저들은 시왕(十王)들이겠지. 그중에서도 가장 앞에 있는 자가 염라대왕일 거야.’
결론을 내렸을 때, 이윽고 바늘이 멈췄다.
바늘의 끝을 본 염라대왕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아쉽군. 나는 바늘 끝이 아니라 바늘귀와 같은 방향이다.]
염라대왕에 이어 여기저기에서 탄식이 흘렀다.
다들 이번 주재자 자리가 탐났나?
척 봤을 때 권한은 별로 없고 의무만 있어 보이는 자리인데 왜 저 자리를 탐내는지 모르겠다.
상위 존재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자니 플루토가 모든 바늘을 하나씩 살핀 후 말했다.
[이번 회담의 주재자가 결정되었다.]
플루토가 한 손을 들어 올려 새로운 주재자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플루토가 가리키는 방향은 내가 고개를 높이 들어야 겨우 보이는 곳이었다.
주재자로 뽑힌 자는 뒤쪽에 자리 잡은 탓에 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던 상위 존재였다.
[사희공주에게 이 자리를 넘기지.]
플루토가 선언을 마치고 회담장 중앙에서 물러났다.
타나토스, 오르쿠스, 디스파테르로 추정되는 이들이 위치한 곳으로 향하는 걸 보니 비슷한 문화권에 속한 상위 존재 쪽에 자리 잡을 모양이다.
플루토가 다른 상위 존재들 사이에 서자 방울 소리가 퍼지기 시작했다.
딸랑, 딸랑.
은은한 방울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에 언월도와 부채를 든 여성이 걸어 나왔다.
사희공주는 죽은 넋이 정토, 천상으로 향하도록 천도하며 저승과 죽음을 관장하는 한국 신화의 무조신(巫祖神)으로, 흔히 바리데기나 바리공주로 알려진 존재였다.
사희공주가 원형 회담장 중앙에 서자 그녀의 걸음에 맞춰 울리던 방울 소리가 뚝 그쳤다.
대신 맑은 목소리가 회장을 채웠다.
[노리고 있지는 않았거늘. 이것도 필연이겠지. 그렇다면 회담을 진행하겠다.]
사희공주는 한국인인 내가 와서 반가운 건지 내 쪽을 보며 입가를 크게 올리며 웃었다.
필연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회담의 주재자인 사희공주, 파수꾼, 손님인 나까지 모두 국적이 같았다.
지력의 영향 탓인 건지 몰라도 공교로운 일이었다.
[오늘의 주제는 두 가지다. 첫째는 이 세계에 방문한 손님. 두 번째는 위기에 처한 윤회의 굴레에 관해서다.]
첫 번째는 나에 관한 이야기일 거다.
윤회의 굴레에 갑자기 산 자가 들이닥쳤으니 문제 삼는 걸까?
나보다 먼저 은빛 영웅이 윤회의 굴레에 찾아왔고 더 오래 머물렀을 텐데.
‘왜 굳이 이만한 상위 존재를 모아 놓고 나를 주제로 삼는 거지? 은빛 영웅은 수많은 상위 존재와 이어졌으니 그것과 관계가 있나?’
상위 존재들이 벌이는 일종의 여흥 같은 걸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건 두 번째 문제다.
상위 존재들이 윤회의 굴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고 있고, 이를 해결할 의지가 있다는 건 고무적이었다.
어쩌면 내가 수를 쓸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많은 상위 존재들이 모였으니 답이 나오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결론을 내리기엔 걸리는 점이 있었다.
‘윤회의 굴레 내에서 해결될 문제였다면 은빛 영웅이 나를 이곳에 보낼 이유가 없었을 텐데.’
은빛 영웅이 파수꾼을 나한테 소개해 주려고 보낸 건 아닐 거다.
사희공주의 말로 생각이 중단되었다.
[그렇다면 손님에 관해서 듣지. 손님이 이곳에 오기 전 머물렀던 땅의 주인, 에레쉬키갈의 말을 듣겠다.]
[알았다.]
지금 답한 건 에레쉬키갈인가?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보니 아까 전에 나를 보고 미소 짓던 베일을 쓴 여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계에서 봤을 때에는 거적으로 온몸을 감추고 있어 알지 못했는데, 목소리가 같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에레쉬키갈의 곁에 있는 건 그녀의 두 번째 남편, 네르갈인 듯하다.
선 너머로 보이는 에레쉬키갈은 나를 보며 다시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손님은 보다시피 우리 앞에서 예의를 지킬 줄 알며, 명계와 죽음의 법칙을 존중하는 인간이지.]
에레쉬키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상위 존재가 몇 명 있었다.
명계에 쳐들어온 자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인 신화를 가진 상위 존재들이었다.
[이 아이는 어둠과 추위 속에서 수십 일을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로 나와의 약속을 지켜 냈다.]
어쩌면 100일이 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수십 일이라고 하는 걸 보니 그 정도는 아니었나 보다.
에레쉬키갈의 발언이 계속되었다.
[손님에게 이유 없이 시련을 안긴 나를 원망할 줄 알았으나 이 아이는 끝까지 내게 경의를 표하며 예의를 지켰다. 몹시 기특하여 선물로 생명초와 생명수를 안겨 줄 정도였지.]
생명초와 생명수라고!
그건 에레쉬키갈의 분노를 사 명계에서 고깃덩어리가 된 이쉬타르를 부활시킨 아이템 아닌가.
‘너무 강력한 아이템이라 쓸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생명초와 생명수는 무려 여신을 부활시킨 전승이 있는 아이템이다.
이걸 작은 상처에 쓰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 해도 정량을 지키지 않으면 해가 되는 법이니까.
선물의 무게를 깨닫고 잠시 머리가 복잡해진 사이 에레쉬키갈의 발언이 끝났다.
[파수꾼의 말을 듣겠다.]
“네!”
무릎을 꿇고 있던 파수꾼이 고개를 들며 밝게 답했다.
얼굴에 닦지 못한 땀이 조금 흐르고 있었는데 상위 존재들의 위압감에 적응이 된 건지 안색이 좋아져 있었다.
“의신이, 아, 손님에게 윤회의 굴레 곳곳을 안내해 주고 가장 맑은 공간에 머무르게 했습니다. 손님이 지나간 자리는 더럽혀진 곳 없이 깨끗했어요.”
파수꾼이 말하는 더러움, 깨끗함이란 물리적인 걸 말하는 게 아닌 듯했다.
이곳은 혼과 깊은 연관이 있는 곳이므로 탁한 혼이 이곳에 오면 주변에 더러움이 남는 걸지도 모르겠다.
파수꾼의 말이 끝나자 사희공주가 나에게 물었다.
[다음은 너다. 지상에서 가져온 호족의 신보를 보여 다오.]
여기에서 호족의 신보를 보여 달라고?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고 보여 주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나는 카드화되었던 호족의 신보를 실체화하였다.
파앗!
호랑이가 조각된 향로가 눈앞에 나타났다.
형태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였는데, 품은 기운이 달라져 있었다.
‘우마왕이 들고 있을 때에는 사기(邪氣)가 가득했는데.’
지금 향로가 두른 빛은 맑다 못해 투명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 향로는 신령한 기운을 머금고 있어 사용하면 아주 좋은 향기가 날 것 같았다.
과연 호족의 신보다운 인상을 주었다.
[호족의 신보는 지상의 기운으로 오염되었었지. 하지만 지상에서 멀어진 데다 소유자의 마음에 틈이 없어 사기가 파고들 수 없었던 게야.]
그럼 이 향로는 정화된 건가?
은빛 영웅이 호족의 신보를 들고 이곳으로 오라 한 이유가 이거였나 보다.
나와 내가 든 향로에 한참 동안 상위 존재들의 시선이 쏟아진 후, 사희공주가 물었다.
[충분히 보고 들었는가?]
이건 내가 아니라 다른 상위 존재들에게 하는 말 같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암묵적으로 긍정을 표한 것 같다.
[그렇다면 두 번째 화제를 다루겠다.]
뭔가 더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이야기의 주제가 바뀌었다.
어리둥절했지만 따질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 지켜보기로 했다.
휘익!
갑자기 사희공주가 방울을 흔들며 언월도로 허공을 크게 베었다.
방울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베어 낸 곳에서 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물은 바닥으로 쏟아지지 않고 구형의 모습으로 순환하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구형으로 고착된 물은 곧 무언가를 비추었다.
‘파수꾼과 보러 갔던 충격파의 근원이다.’
사희공주는 이어서 물 덩어리를 몇 개 더 만들었다.
그것들은 전부 그을음과 파괴의 잔해를 비추었다.
내가 오기 이전에 발생했던 충격파의 근원인 것 같았다.
물 덩어리를 등진 사희공주가 파수꾼에게 물었다.
[파수꾼의 눈에는 흉수가 남긴 단서가 보이느냐?]
“죄송합니다, 보이지 않아요.”
파수꾼은 그을음 사이에 남았던 진(陣)을 발견하지 못했다.
안광 스킬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한 번 인식하고 나니 흐릿하게나마 보이는데, 파수꾼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우리가 네게 부여한 권능을 모두 사용해도 보이지 않느냐?]
고오오오…….
사희공주가 다시 묻자 파수꾼이 권능을 끌어올렸다.
파수꾼은 손을 뻗으면 피부가 타들어 갈 것 같은 수준의 강렬한 힘을 발산하여 눈에 모았다.
파수꾼은 온 힘과 신경을 집중해 물 덩어리를 관찰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맨눈으로 본 것과 차이가 없어요. 제 눈에는 보이지 않아요.”
파수꾼의 말을 가만히 듣던 사희공주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렇군. 네게는 이 사태를 해결할 힘이 없구나. 더 권능을 준다고 해도 달라질 것 같지 않아.]
파수꾼은 면목이 없는 듯 고개를 숙였다.
사희공주는 어쩐지 내게 들으라는 듯이 말을 덧붙이는 것 같았다.
[우리가 권능과 육신을 주었다고 하나 파수꾼은 어디까지나 죽은 자다. 죽은 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 느낄 수 없는 것이 있지.]
파수꾼은 죽은 상태로 환생하지 않은 채, 상위 존재들로부터 육신과 권능을 받은 상태다.
그래서 아무리 강해도 살아 있는 자의 힘을 파악하는 데에 한계가 있나 보다.
흑막은 파수꾼의 한계를 정확하게 노린 것이다.
[이대로 가면 죽음의 비밀은 더 크게 새어 나가겠지. 이를 막지 못한 파수꾼은 소멸하고, 윤회의 굴레는 부수어질 것이다.]
그걸 막기 위해서 지금 상위 존재들이 이 자리에 모인 게 아닌가?
왜 부정적인 예측에 관해서만 늘어놓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윤회의 굴레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신언(神言)을 철회할 수는 없다. 우리의 맹세가 권위를 잃으면 다스리는 명계가 흔들린다. 차라리 윤회의 굴레를 잃는 게 안전하겠지.]
지금 윤회의 굴레를 포기한다고 선언하는 건가?
그야 이만한 신들이 한자리에 모여 굳게 맺은 맹약을 철회하면 위신이 흔들리고 그들이 다스리는 명계에도 영향을 줄 거다.
‘차라리’라는 말로 표현하는 걸 보니 최악과 차악 중에 차악을 선택하겠다는 뜻 같다.
사희공주가 못을 박았다.
[우리는 직접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있던 파수꾼의 얼굴이 흐려졌다.
무너진 표정을 감추기 위해 파수꾼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나도 속이 쓰린 기분을 숨겨야 했다.
‘상위 존재의 도움은 기대할 수 없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사희공주의 말이 계속되었다.
[다른 방법이 없다면 우리는 파수꾼과 윤회의 굴레를 잃는다 해도 감당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새로운 수가 있지.]
사희공주가 새로운 수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순간, 내 쪽을 보았다.
[너만 한 힘을 지닌 이들은 하나같이 저승에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만용을 부리지. 그러나 너는 사리사욕을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고, 단 한 번도 계율을 어기지 않았다.]
사희공주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방울 소리가 점점 커졌다.
[비록 짊어지고 있는 것이 무겁다고 하나, 네가 강하고 선한 인간이라는 건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의 뜻은 굳었다.]
방울 소리가 뚝 멎었다.
사희공주와 내 사이에는 선을 두고 한 걸음만 남아 있었다.
[마침 네게는 호족의 정수로 개안한 좋은 눈이 있구나. 그 눈에 우리의 힘을 담길 바란다.]
사희공주가 방울을 들어 내 눈을 가리켰다.
호족의 신보(神寶)가 나타나는 샘의 정수로 얻은 눈은 스킬 ‘안광’이다.
그저 순수히 내 눈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안광을 지칭하는 듯했다.
[조의신, 윤회의 굴레는 죽은 자의 힘만으로 지킬 수 없다. 부디 명계의 존망과 죽음의 법칙을 위해 우리의 뜻을 받아 주겠느냐.]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여기에 온 이유는 처음부터 그러기 위해서였으니까.
“네, 받아들이겠습니다.”
대답한 순간, 원형 회담장에 존재하던 모든 빛이 내 눈으로 향하였다.
눈에 이능파가 몰리는 감각과 함께 시스템 음이 울렸다.
〈스킬 ‘안광’이 발동했습니다.〉
〈스킬 ‘생사(生死)의 안광’을 습득하였습니다.〉
시스템 음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의 차원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스킬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 전용 메뉴’의 리플레이 기능이 3단계에서 4단계로 상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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