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684화 (684/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84)

89. 선물 (3)

황명호 대저택 현대식 별채 거실.

조의신이 자리를 비운 후.

“의신이 형이 아직 말하지 않은 게 있는 것 같아요.”

조의신을 꼬박꼬박 적벽괴도 형이라고 부르던 은호였으나 그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바로 호칭을 원래대로 돌렸다.

그 호칭은 조의신의 정신에 타격을 주기 위함이니 그가 부재중일 때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무엇을 얼마나 말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짐작 가는 바가 있어요.”

뚱한 얼굴로 조의신이 사라진 방향을 보던 황호가 말했다.

“조의신이 무엇을 말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그 파수꾼과 관련된 내용이겠죠.”

호족들은 조의신이 명계행을 결정한 이유가 윤회의 굴레를 지키는 파수꾼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했다.

조의신이 윤회의 굴레에 들른 이유가 단순히 파수꾼과 인사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황호는 여태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결론지었다.

‘조의신이 또 제 몸과 정신력을 갈아서 누군가를 구했겠지.’

물론, 호족은 자세한 내용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윤회의 굴레에 파수꾼의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발생해서 조의신이 나섰을 거라 예상했다.

손거울 너머로 본 파수꾼은 몹시 밝고 기운이 넘쳐 보였으나 겉으로 보이지 않을 뿐, 문제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조의신이 파수꾼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기는 어렵겠지.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황호가 시선을 은호에게 돌렸다.

은호도 황호와 같은 의견인 듯했다.

“파수꾼이 그 아이들의 아버지인 이상, 의신이 형이 제 앞에서 그의 이야기를 꺼내긴 어렵겠죠.”

“그래, 조의신이라면 섣불리 그 파수꾼에 관한 화제를 꺼내려 들지 않을 거다.”

그 말을 마친 호족들 사이에 잠시 거북한 침묵이 흘렀다.

적호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거 보십시오. 빨리 그 아이들의 할아버지로서 말을 텄다면 조의신이 불편해하지 않고 말을 했겠죠. 다 은호 탓입니다.’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황호는 은호의 의견을 존중했고 백호는 형으로서 은호 편을 들어 주는 중이었기에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다.

황호가 불편한 분위기를 느끼지 못한 척하며 말을 돌렸다.

“조의신이 너를 위해 말을 삼간 건지, 숨기고 있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말할 타이밍을 놓쳐서 그랬는지 모르겠군.”

“의신이 형이 말할 기회가 더 있었다면 황호 님께서 더욱 크게 화를 내셨을걸요?”

그 말을 듣자 황호는 울컥함과 후회가 동시에 올라왔다.

조의신은 몇 마디 말하지도 않았는데 황호가 참지 못하고 큰 소리를 냈다.

쉽게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엉뚱한 일을 두고 사과하는 조의신에게 역정이 나는 반면, 고생하고 온 조의신에게 큰 목소리를 낸 게 후회막심했다.

“은호, 경험에서 우러나온 소리인가? 예전에 있던 세계에서도 조의신이 네 속을 꽤 긁었나 보군.”

“네. 지금과 유사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죠. 그중에서 유서를 남긴 게 최악이었어요.”

유서라는 단어가 나오자 황호는 두통을 느꼈다.

조의신이 크리스마스 인사랍시고 남긴 메시지가 떠오른 것이다.

황호에게 두통을 일으키는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조의신이 미련 없이 테이블에 두고 간 호족의 신보도 황호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이까짓 것 때문에 내 친우와 그 아들, 은인이 고초를 겪다니.”

먼 옛날, 아버지의 정체가 적호임을 안 김신록이 큰 사고를 쳤다.

호족의 신보를 훔쳐 붉은 형틀에 묶인 적호를 치료하는 데에 써 버린 것이다.

그 신보는 적호를 치료한 후 사라져 버렸기에 뒷수습이 매우 곤란했다.

친우의 입장에선 적호가 하루라도 괴로움을 덜 수 있다면 신보가 사라지든 말든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호족의 수장으로선 좌시할 수 없었다.

적호가 천신에게 직접 죄를 청해 김신록은 벌을 받지 않았으나 그 사건 탓에 둘 사이가 크게 틀어졌다.

‘그때 김신록이 적호에게 사용한 신보는 소모형 아이템이었나? 운이 없었군.’

황호가 호족의 신보가 새겨진 아이템 카드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줄곧 말이 없었던 백호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무언가를 찾는 기색이었다.

황호는 백호가 호족의 신보를 보고 자신과 같은 것을 떠올렸으리라 추측했다.

“백호, 혹시 적호와 김신록을 찾는 건가?”

“그렇다.”

백호 역시 적호와 김신록에 관해 떠올린 듯했다.

황호는 백호가 균열 주변에서 벌인 행적이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빈정거리며 말했다.

“미련하게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 그때 네가 손을 놓지 않거나 은호가 준 아이템을 사용했다면 기다릴 필요가 없었거늘.”

“너도 그 자리에서 기다리지 않았나.”

“이 몸이 분신을 다루는 걸 잊지 않았겠지?”

백호가 뭐라 답하기 전에 은호가 먼저 끼어들어 말했다.

“황유호의 모습으로 의신이 형과 연락을 취할 때를 제외하면 줄곧 황지호 쪽이 황호 님의 본신이었죠.”

은호의 말이 끝나자 백호가 황호를 미련한 것을 보는 눈으로 응시했다.

마치 백호가 ‘너도 마찬가지로군.’이라고 말없이 반박한 것 같았다.

사전에 짠 것도 아닌데 호흡이 척척 맞는 백호와 은호 형제의 반응에 황호가 변명했다.

“……명계의 입구가 열린 곳이니 나름의 대비가 필요했다. 그래서 본신으로 있던 것뿐이다.”

황호는 본신과 분신에 관한 말이 더 나오기 전에 말을 돌렸다.

“적호와 김신록은 학교에 있다. 할 일이 많아 김신록은 학교에 갔고, 적호는 아직 학교가 어수선하니 김신록을 호위하겠다고 했다.”

“적호 님의 아드님은 일하는 중이신가요? 쉬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그러길 바랐으나 말리지 못했다. 김신록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시간이요?”

현재 황호는 분신 중 하나를 사건 수습을 위해 은광고에 배치한 상태다.

황명호 이사장의 모습을 한 분신은 밤을 지새우며 사건 수습을 위해 움직였다.

해가 뜨고 학생들이 하나둘씩 등교하는 시각이 되었을 때, 은광고에서 오랜 시간 근무한 교사가 황호를 찾아왔다.

바로 용제건이었다.

용제건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서류를 내밀었다.

“오늘 아침, 용제건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음력 정월 초하룻날이 지나면 승천할 예정이라 하더군.”

*    *    *

올무에게 아무리 말을 걸어도 반응이 없었다.

올무는 몸을 말고 벽을 보고 있었다.

올무의 천재성이 지나치게 유별난 바람에 공간이 별로 없어 올무의 앞쪽으로 갈 수도 없었다.

아직 옷에 물기가 남아 있어서 잘못하다간 올무의 털을 적실지도 몰라 가까이 가기 어려웠다.

안절부절못하고 있자니 올무가 꼬리를 들어 방 안에 위치한 욕실 쪽을 탁탁 쳤다.

빨리 씻기나 하라는 뜻인 것 같았다.

“미안해, 올무야. 씻지도 않고 가까이 가려고 했어.”

크르르……!

사과를 하자 올무가 목을 울리며 화를 냈다.

사과의 말이 잘못됐나?

올무에 비해 멍청하다 보니 제대로 된 사과의 말을 떠올릴 수 없다.

실의에 빠져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샤워 부스 쪽으로 향했다.

“올무야,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크릉…….

몸단장을 마친 후에도 올무의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올무가 도통 얼굴을 보여 주지 않으니 슬픔으로 온몸의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그때, 올무가 몸을 꿈틀거리다 휙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억실억실하게 큰 눈망울이 내 쪽으로 향하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면서 목을 울렸는데 얼굴을 보니 겨우 안심이 되었다.

‘호랑이 버전 올무는 정말 천재스러운 전사구나! ……어, 올무가 지금 품에 안고 있는 건 내가 선물한 산타 인형 아닌가?’

올무의 품, 흰 털 사이로 산타 모자를 쓴 인형이 보였다.

인형의 크기가 올무의 천재성에 비해 너무 작아서 안타까웠다.

내가 조금만 더 똑똑했다면 더 큰 인형을 하나 더 준비했을 텐데.

툭, 삐삣!

[안녕, 올무야. 나 의신이야. 메리 크리스마스. 직접 선물을 건네주지 못해서 미안해. 사실은 잠시 자리를 비울 것 같아서…….]

올무가 품에 안은 인형을 툭 치자 기계음에 이어 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올무에게 미안함과 작별을 고하는 목소리였다.

크르르르르…… 크르르!

내 목소리가 들리는 중간중간에 올무가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올무가 무엇을 전하려는지 알 수 없지만 화가 났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면밀히 상황을 관찰하여 겨우 결론을 냈다.

“미안해.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다른 것으로 준비해 올…….”

크릉? ……크르르르르!

손을 뻗으려 하자 올무가 산타 인형을 숨겨 버렸다.

이게 아니었나?

그럼 뭐 때문에 그렇지?

다시 두뇌를 풀가동하여 겨우 답을 내었다.

“메시지 때문에 그래?”

크르르…….

겨우 답을 찾았는지 올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메시지 내용을 하나하나 짚어 가며 모든 말에 사과했다.

한참 동안 진심을 담은 말을 전하자 겨우 올무가 기분을 풀고 고개를 들어 주고, 내 품으로 와 줬다.

품으로 와 줬다고 해 봤자 올무가 턱을 내 어깨에 얹은 게 고작이었지만.

“식사는 했어? 밥 먹으러 갈까?”

크릉!

올무가 내가 선물한 산타 인형을 등에 얹고 내 뒤를 따라 걸었다.

천재 전사가 뒤에 있으니 너무나도 든든하고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명계에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을 테니 시장하겠지. 들도록.”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황지호가 식사를 준비했나 보다.

크리스마스라서 그런지 크림 토마토 소스와 브로콜리로 색을 낸 리소토가 준비되어 있었다.

비교적 묽게 만든 리소토라 빈속에 먹어도 부담이 적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지.’

마지막으로 뭔가를 먹거나 마신 게 언제였더라?

아마 공청훤 선생님이 권한 물을 마신 게 마지막이었을 거다.

“명계에서 무언가를 먹으면 그 자리에 묶이게 되죠. 윤회의 굴레 역시 명계만큼은 아니더라도 영향이 있을 거예요. 무사히 돌아왔다는 건 굶었다는 증거예요.”

은호의 말에 고작 석류를 몇 알 먹은 것 때문에 1년의 반을 명계에서 보내야 하는 페르세포네의 일화가 떠올랐다.

나도 그 점은 유의하고 있었기에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 점을 배려해 준 건지 에레쉬키갈이나 파수꾼은 한 번도 내게 무언가를 먹을 것을 권하지 않았다.

식사는 평안하게 진행되었으나 내 마음은 불안했다.

‘학교에 가고 싶은데 말리면 어떡하지.’

플마고의 퍼스트 크리스마스 시나리오를 경험한 유저는 전부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은광고가 맞이하는 크리스마스를 눈으로 보고 싶다.

나중에 사진과 영상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도 있지만, 직접 가는 것과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식사를 마치면 같이 학교로 가지.”

황지호가 모처럼 좋은 제안을 했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서 다시 귀를 기울였다.

“쉬게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만, 오늘 은광고의 풍경을 네 눈에 보여 주고 싶어서 말이다.”

“네, 직접 보는 게 좋겠죠.”

내가 명계에 다녀온 이후로 내내 기분이 별로였던 황지호가 처음으로 웃었다.

황지호뿐만이 아니라 은호도 내가 은광고에 가는 걸 찬성했다.

단순히 은광고 축제를 구경시켜 주는 것 외에도 뭐가 더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궁금해하는 게 티가 났는지 황지호가 헛소리를 했다.

“정 궁금하면 말해 줄 수도 있다.”

“됐어.”

황지호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결국 아무것도 듣지 못한 채로 하얀 호랑이들의 배웅을 받으며 은광고로 향했다.

이미 입장이 시작되고 꽤 시간이 흘렀는지 입구 주변이 한산했다.

출입구에 가까워지자 황지호가 말했다.

“이번 일로 수많은 미담과 영웅담이 탄생했다. 하지만 많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났기에 은광고에 있던 이 중 전모를 파악한 자는 얼마 없지. 하지만 모두가 눈으로 본 게 있다.”

무엇을 말하는 거지?

혹시 은광고에 내려온 세 줄기의 빛 말하는 건가.

그거라면 모두가 봤을 거다.

“답을 모르나 보군. 직접 눈으로 봐라.”

은광고의 결계를 넘어 학교 안으로 들어간 순간, 황지호가 무엇을 말한 건지 알 수 있었다.

‘이건…….’

하늘에서 검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인공적으로 검은색으로 물들인 눈송이가 허공에서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다.

“바로 이 검은 눈이지.”

그렇게 말하는 황지호의 손바닥에 검은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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