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572화 (683/925)

79. 은광고 축제 (6)

오혜지와 주수겸이 길게 뻗은 지하 서고의 복도를 나란히 걸었다.

지하 서고의 높이는 3층 건물 정도와 비슷했다.

플레이어에게 이 정도 높이는 별문제가 안 되긴 하지만, 이래서야 원하는 책을 찾기 어려울 듯했다.

애초에 이곳은 열람이 아닌 보관을 목적으로 하는 서고라 그런지 이용객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 같았다.

‘수리는 어디로 간 걸까? 지하에 있는 게 아니라면 좋을 텐데.’

고개를 들어야 겨우 끝이 보이는 서가의 높이 탓에 조명이 잘 닿지 않는 곳이 많아 주변이 어둡고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앞이 어두운데도 주수겸은 천리안을 발동하고 걷는 건지 망설임 없이 전진했다.

둘의 체격차 탓에 보폭이 차이 났으나 오혜지는 야간 이동에 최적화된 ‘월하의 위태천(韋駄天)’을 다루는 자답게 걸음이 빨라 함께 걷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빠르게 이동 중이었으나 두 사람은 책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살피고 있었다.

‘강력한 힘을 머금고 있지만 여기 있는 고서들이 움직인 흔적은 없어.’

오혜지는 초조해하다가 문득 주수겸을 올려봤다.

주수리 걱정을 하다가 새삼 주수겸을 의식했다.

‘……수겸 오빠와 둘이 있는 건 오랜만이네.’

오혜지가 주수겸과 마지막으로 둘이 있던 건 수능을 치르던 날 구하러 왔을 때다.

탈출 후에 곧바로 주수혁과 합류한 데다 바로 수능을 치르러 가야 했지만.

또, 엄밀히 따지면 이곳에 두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서가가 미궁처럼 복잡하게 배치되었으나 이 공간에는 다른 수색대도 있다.

하지만 천장이 높고 조명이 어두운 데다 고서, 희귀서들이 뿜는 기운 탓에 다른 이들의 기척을 감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둘이 있는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긴장이 되어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인원을 분산시키지 말고 오혜지나 주수겸의 전속 경호원을 동반해 셋이서 함께 다니는 게 나았을 지도 모른다.

“내가 수리를 놓치지 말았어야 했다.”

“아뇨, 지하 서고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데 사전에 알리지 않은 제 잘못이에요.”

주수겸이 한 말에 오혜지가 즉각 반박했다.

하지만 주수겸은 단호하게 말했다.

“수리 부모님은 나를 믿고 여기에 보내 주셨다. 내가 믿음을 저버렸지. 고등학교 시절 마지막 축제에 이런 사건을 일으켜서 미안하다.”

빈틈 없어 보이던 주수겸의 눈가에 그늘이 졌다.

그 모습을 본 오혜지는 잠도 제대로 못 잘 만큼 바쁜 주수겸이 왜 이번 축제에 오겠다 했는지 깨달았다.

주수겸은 주수리와 주수혁, 오혜지를 위해서 이 자리에 온 것 같았다.

만약 주수겸이 오지 않았다면 주수혁의 첫 축제를, 오혜지의 마지막 축제를 주수리의 경호 겸 안내를 위해 할애해야 했을 거다.

혹은 주수리가 원하는 만큼 축제를 즐기지 못했을 거다.

‘수겸 오빠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는데…….’

오혜지가 좀 더 어렸을 때에는 어른들의 친절과 배려를 가볍게 받아들였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 당연해 보이는 다정함에는 희생과 책임이 뒤따랐으니까.

헤비 스모커인 주수겸이 강제로 금연을 하고 휴식 시간을 줄여 은광고 축제에 왔다가 수색조에 참가한 게 그러했다.

그리고 오혜지는 주수겸의 이런 행동이 자신만을 위한 게 아닌 걸 잘 알았다.

“……이렇게 다정한 분이라는 걸 계속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

차라리 그때 키모폴레이아호에서 마주치지 않았다면, 계속 소원한 채로 있었다면 하고 오혜지는 무수한 가정을 세웠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주수겸은 오혜지가 혼잣말처럼 한 말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수색을 재개하기 위해 걷기 시작했다.

오혜지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주수겸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이 둘의 모습을 본의 아니게 계속 지켜본 이들이 있었다.

“…….”

“…….”

주수혁과 안다인 두 사람은 바로 근처 벽에 붙어 손끝이 맞닿은 채로 은신 중이었다.

미로처럼 얽힌 서가를 수색하던 중, 갑자기 희귀서 하나가 두 사람 앞에 툭 떨어졌다.

두 사람이 경계하며 희귀서를 조사해 봤지만, 단순히 옛 문호들이 주고받은 러브레터를 모아 둔 책으로 판명되었다.

둘이 희귀서가 움직인 원리를 파악하기 위해 그 주변을 살피던 사이 주수겸과 오혜지가 이쪽을 지나쳤다.

이상 현상이 발생한 가운데 느낀 인기척에 놀라 우선 은신을 했는데, 하필 숨는 방향이 같아 손가락 끝이 닿았고 그대로 둘은 석화 상태 이상이라도 걸린 것처럼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두 사람은 인사할 타이밍을 놓친 채로 둘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혹시 혜지 언니는 저 분을…….’

안다인은 아직도 굳어 있는 주수혁을 바라봤다.

주수혁은 둘의 대화를 듣고도 별 반응이 없었는데, 아마 오혜지의 마음을 알고 있던 것 같았다.

‘……그동안 내가 오해한 걸까?’

주수혁이 안다인의 시선을 뒤늦게 느끼고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손은 떨어졌는데, 방금까지 손가락 끝에서 느꼈던 체온이 생생했다.

안다인은 자신의 손끝을 감싸 쥐며 얼마 전에 문새론의 권유를 받아 빌린 희귀서를 떠올렸다.

‘무사히 수혁이의 사촌 동생을 찾으면, 같이 축제 구경 가자고 해 볼까? 오랜만에 책 이야기도 하고…….’

안다인은 주수혁이 들으면 기뻐서 구를 만한 생각을 하며 수색을 재개했다.

*    *    *

운명력이 발동한 순간, 천장에 닿을 듯 빼곡히 들어찬 서가의 책들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권, 두 권, 세 권…….

어느덧 세는 게 곤란할 만큼 수많은 책들이 들썩이다가 누군가 책을 뽑아낸 것처럼 서가를 빠져나왔다.

차례로 서가에서 뽑히기 시작한 책들이 내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힘은…… 조의신!”

황지호가 운명력의 발동을 감지하고 뒤를 돌아봤지만, 이미 나는 책에 파묻히고 있었다.

만일의 경우 플레이어의 궤적을 발동시키기 위해 ‘무명의 운명’ 카드를 손에 들고 이능파를 발산해 방어했을 때였다.

파아아……!

내 통상 이능파 출력을 한참 뛰어넘은 수준의 검은 이능파가 카드와 주변을 감쌌다.

황지호가 급히 결계를 전개했으나 내가 뿜은 이능파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고서들을 삼키듯이 퍼지는 게 먼저였다.

어두운 이능파가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가 잦아들었을 때에는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다.

나를 덮친 책들도, 황지호의 결계도, 서고도 보이지 않았다.

“오랜만이다.”

여러 종류의 음성이 섞여 울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새하얀 그림자가 있었다.

‘내게 ‘무명의 운명’을 건넨 존재……!’

제갈재걸의 지하 서고 사건 당시, 나는 ‘운명력’에 관해 언급된 고서를 입수했다.

황지호는 상위 존재의 무수한 기척이 남은 고서를 해석했고, 그 해석 속에서 만난 이자가 내게 무명의 운명을 건넸다.

예전보다 좀 더 사람의 형태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곧바로 알아봤다.

눈앞에 서 있는 건 내게 ‘무명의 운명’을 건냈던 새하얀 그림자였다.

“안녕하세요, 또 토트가 ‘길’을 만들어 준 건가요?”

“나를 기억하고 있군. 그렇다.”

새하얀 그림자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저번에 마주쳤을 때에는 무기질한 존재처럼 느껴졌는데, 지금은 살아 있는 듯했다.

전에는 수십, 수백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리는 것 같아 귀가 웅웅 울리고, 인상도 흐릿했지만 이젠 집중해서 듣고 얼굴을 보면 진짜 얼굴과 목소리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얀색이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달라. 어디선가 본 듯한 인상이고, 목소리도 어쩐지 들어 본 듯한데…….’

아직 판단할 소재가 적었다.

“좋은 일이 있었나요?”

“물론이다. 네가 성장했고, 내 아이들이 이곳에 있으니까.”

그때는 봄이었고, 지금은 겨울이다.

그사이에 나는 종합 능력치와 스킬 레벨을 올렸다.

이 공간의 이능파 밀도를 고려하면 레벨이 낮은 플레이어는 견디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나라면 견딜 수 있지만.

‘플레이어의 궤적을 막 각성했을 때에는 3초밖에 사용하지 못한다던 백호군의 광림도 지금이라면 더 쓸 수 있어.’

성장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데 굳이 좋은 일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내 아이들’은 누굴 말하는 거지?

“물어볼 게 많은 것 같군. 그때에는 시간이 없었고, 너는 미숙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만반의 준비를 했으니 질문해도 좋다.”

내가 이곳에 오도록 유도한 건 이 하얀 그림자였나 보다.

나는 제일 먼저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주수리는 무사해요?”

“물론이다. 도서관의 수호신은 책에 관심 있는 이를 아낀다.”

토트가 주수리를 마음에 들어 했나?

타이틀 히어로의 사촌 동생답게 주수리는 지식욕이 상당한 모양이다.

주수리가 무사하다는 말에 안심했지만, 결과적으로 축제를 망친 꼴이 됐으니 마음이 복잡했다.

“축제를 망쳐서 미안하다. 하지만 이 땅에 위기가 닥쳐오고 있으니, 그전에 너를 만나야 했다.”

다른 방법은 없었나?

긴급 상황이 아닌 이상 지하 서고에 들어오는 건 힘들긴 했다.

제갈재걸 사건 때에는 홍규빈과 규정집행부의 도움, 황지호의 암묵적인 동의가 있어서 무사히 온 거다.

그리고 도서관 투어 중이 아닌 한 이런 외진 곳에 사람들이 올 일도 없고, 만약 나와 관계없는 인물이 실종되었다면 황지호가 내게 알리지 않고 해결할 가능성이 컸다.

‘이 땅의 위기는 퍼스트 크리스마스를 가리키는 거겠지.’

내가 어느 정도 성장한 이후, 크리스마스 직전에 나를 부르기 위해서 축제를 이용한 건가.

이자가 그 위기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질문 시간을 줄 생각인 듯하니, 정체를 추려 내 보기로 했다.

“당신은 상위 존재인가요?”

“아니다.”

“그렇다면 진족인가요?”

“아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인간도 아니지.”

이자는 수수께끼를 좋아하는 것 같다.

아니면 그저 단순히 나를 시험하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그 시험에 응하기로 했다.

“당신도 운명력 스킬을 가지고 있나요?”

하얀 그림자는 저번에 마주쳤을 때, 운명력에 관해 이렇게 언급했다.

―운명의 인도와 간섭은 무사히 이루어졌다.

―운명력은 ‘세상을 구했던 자’가 ‘아득한 미지’와 접촉하였을 때 가지는 힘이다. 잊지 마라.

새하얀 그림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나는 먼 옛날, 이 땅을 수호했다.”

“이번에도 직접 이 땅을 수호하실 건가요?”

“내 수명은 이미 끝났기에 불가능하다. 윤회의 굴레를 넘지 않고 혼을 이 땅에 묶어 두고 있을 뿐이다.”

이능파 밀도 짙은 이공간에 혼을 묶으며 남은 건가.

그것도 호족의 신역 깊은 곳을 통해서 말이다.

이 상태를 이 땅에 남았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의문은 늘었지만, 이 새하얀 그림자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윤회의 굴레를 어떻게 넘지 않은 거죠?”

“어느 진족의 도움을 받았다.”

상위 존재도, 진족도, 인간도 아닌 존재.

호족의 신역에서 이 땅을 수호할 누군가.

현 시점엔 수명을 다한 사자(死者).

윤회의 굴레를 넘지 않게 도움을 줄 만한 진족과 가까웠던 자.

은광고 축제를 찾은 아이들을 보고 기뻐할 만한 이.

하얀 그림자에서 느껴지는 낯익은 모습.

이를 종합했을 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당신은 호족의 후예군요.”

그렇게 칭하자 새하얀 그림자의 본래 색이 보였다.

그자의 주변에 은빛이 일렁였다.

내 앞에 있는 건 은호의 딸이자, 은서호, 은이호, 은재호의 어머니였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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