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94)
89. 선물 (13)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주수혁과 안다인 사이의 분위기가 엉망이냐는 말을 순화시켜서 묻자 문새론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주수혁과 안다인을 열렬히 응원하는 문새론은 오늘도 그 두 사람을 위해 움직였다.
문새론은 우연을 가장해 두 사람이 크리스마스 데이트 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두 사람과 스케줄을 맞췄다.
그러다 보니 대략 사정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주 반장님은 빵윤섭이 건 때문에 그런 듯요.”
“방윤섭?”
“넵. 저랑 마주치자마자 세상 근심 다 짊어진 얼굴로 빵 안부를 물었음요. 오전에 주 반장 얼굴 봤을 땐 멀쩡하더만…….”
혹시 방윤섭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마족의 간섭으로 인해 예상치 못한 후유증이 발생했다거나, 또 트러블이 발생했다거나…… 주수혁이 걱정할 만한 상황은 얼마든지 있었다.
방윤섭에 대해 알아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황지호가 불쑥 끼어들었다.
“내가 알기로는 조의신의 빵셔틀에게는 이상이 없다. 오히려 사건이 발발하기 직전보다 신체 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최영희 또한 무사하다.”
“아, 저도 그렇게 들었음. 그 둘이 완전 깨가 쏟아진다 함!”
“하하하! 그 말대로다. 사이가 아주 좋아 보였지. 내내 제자 걱정을 하던 탁거산 명예 교사가 기가 막혀 할 정도였다. 적어도 은광고 1학년의 수석들보다 가까워 보이는군.”
저 둘이 말하는 걸 보니 방윤섭은 아주 멀쩡한가 보다.
심지어 방윤섭은 그 뒤로 최영희와 매우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그럼 방윤섭 본인에게는 별문제가 없는 듯했다.
하지만 주수혁의 저조한 컨디션은 방윤섭과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짐작해 내기에는 단서가 부족했다.
황지호는 짚이는 구석이 있는지 문새론에게 주수혁의 이동 경로와 시간에 관해 질문을 던지고 답을 들었다.
황지호는 문새론의 말을 듣고 결론을 내렸다.
“시간을 고려해 보니 독사와 마주쳤나 보군. 그 뱀은 독니와 독설을 가지고 있어 말 몇 마디에도 독이 묻어난다. 주수혁은 그 독에 당했을 거다.”
“독사? 그게 뭐임요?”
“조의신의 빵셔틀에게 가호를 내린 자다. 그때 즈음 방문하겠다고 예고했지.”
방윤섭에게 가호를 내린 뱀은 하나뿐이다.
황지호가 말하는 자는 사족(蛇族)의 수장인가 보다.
사족의 수장은 방윤섭에게 비늘까지 줘 가면서 가호를 줬으니 은광고까지 얼굴을 보러 와도 이상하지 않을 거다.
12지 동맹 회담에서는 ‘巳[탈피ing]’라는 대화명을 사용했는데, 보통 뱀은 탈피 직후에는 약해지지 않나?
막 탈피를 마쳤을 때에는 독니도 피부도 물러진다고 들었는데, 독사의 독설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가 보다.
노친네가 다른 12지의 수장을 언급할 때에는 항상 신랄하지만, 황지호가 저렇게 독을 강조하는 걸 보니 몇 번 그 독설에 당해 본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저걸 문새론에게 말해도 되나? 황지호의 설정상 학교 이사장 친척이니 진족의 방문 여부를 알아도 이상하지 않긴 한데.’
황지호가 고급 정보를 쥐고 있다는 걸 알아채자 문새론이 눈을 번뜩이며 귀를 기울였다.
황지호는 처웃으면서 공개할 만한 정보를 아낌없이 뿌려 댔다.
신문부에 입부한 직후부터 생각했는데, 저 둘은 죽이 잘 맞는 것 같다.
‘사족의 수장과 주수혁이 무슨 대화를 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어도 짐작이 가. 방윤섭에게 가호를 내렸으니 사고를 읽어 낼 수 있었겠지.’
사족의 수장은 방윤섭이 품은 질투의 중심에 있는 주수혁을 봤을 거다.
겨우 제정신을 찾은 방윤섭이 또 무너질까 봐 주수혁을 경계했을 가능성이 크다.
총명한 주수혁이라면 대화 몇 마디만으로 모든 상황을 짐작해 냈을 거고, 그 결과 자책했을 것이다.
플마고 속, 방윤섭이 인비디우스의 사제에게 농락당한 매개체가 주수혁을 향한 질투라는 걸 알게 됐을 때에도 그는 자신을 탓했다.
이번 사건에서 방윤섭은 플마고 때와 달리 살아남았지만, 주수혁은 여전히 자신을 탓할 거다.
주인공의 선한 심성에 감복하는 것과 동시에 의문이 생겼다.
‘그렇다면 안다인은 왜 상태가 안 좋은 거지? 주수혁의 우울이 전염된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문새론은 안다인의 사정에 관해서도 아는 듯했다.
이번에는 말하기가 어려운 건지 문새론은 매우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인느님은 그…… 부모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전화를 받은 후부터 상태가…….”
안다인의 부모가 무슨 말을 한 건가.
문새론이 ‘부모님’이라고 단정 짓지 않고 ‘부모로 추정되는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그건 분명 안다인의 부모일 거다.
황지호가 직접적으로 물었다.
“안다인의 부모라. 무슨 대화를 한 건지 아나?”
“대화는 듣지 못했음요. 여러 번 전화를 했다는 건 앎. 다인느님이 가족에게 연락이 왔다면서 양해를 구하고 계속 자리를 비웠다고 들었음요.”
문새론이 정황 묘사를 자세하게 하지는 않았으나 그 광경이 눈에 그려지듯 보였다.
학생회 업무가 산더미처럼 밀려 있는데, 부모로부터 전화가 자꾸 걸려 와 무시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양해를 구하고 통화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는 안다인의 모습이.
‘안다인의 부모는 지나치게 우수하고 아름다운 딸을 대놓고 꺼림칙하게 여겼지. 하지만 집요하게 연락할 때도 있긴 했어.’
플마고에서 안다인의 활약이 점점 두드러져 유명세를 타고, 스타 플레이어에 가까웠을 시점.
인터뷰를 거절당했다는 이유로 앙심을 품은 가십지의 기자가 엿을 먹이기 위해 어떤 기사를 작성했다.
바로 안다인의 수입에 관한 기사였다.
안다인의 실적상 서울 한복판에 땅과 건물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식으로 쓴 내용이었는데, 이는 안티 팬들과 문맹이 의심되는 난독자들에 의해 크게 와전되어 퍼졌다.
그 결과, 안다인은 어느 사이엔가 졸부이자 학생 투기꾼이 되어 있었다.
‘안다인은 자신처럼 가족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아이들을 후원하고 기부하느라 자산은 그리 많지 않았는데.’
소문의 근거라고는 안다인이 우수한 플레이어라는 것밖에 없었는데도 헛소문은 사실처럼 굳어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안다인의 팬들과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이들이 부정하고, 적어도 중립을 지킬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이미 장래 유망한 플레이어를 괴롭히는 데에 재미를 붙인 일부 대중들은 이를 모르는 척했다.
소문이 가라앉고, 안다인을 돕는 이들의 주도로 법적으로 심판을 내릴 때까지 수많은 요소가 안다인을 괴롭게 했다.
‘그중 가장 그녀를 힘들게 만든 건 부모였지.’
안다인이 태어난 후, 부부에게는 불행이 이어졌다.
신체의 일부가 불구가 될 만큼 심각한 건강 문제가 있었다는데 그 외에도 경제적, 대인적인 측면에서도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안다인이 불행의 원인이라고 생각한 건지 그녀가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거의 연을 끊고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안다인과 거리를 둔 이후, 점점 더 큰 불행이 닥쳤지. 도망가듯이 해외로 떠났는데도 불행한 일이 계속 이어졌어.’
플마고에서 자세한 묘사는 안 되지만, 그 부부의 삶은 엉망진창으로 무너졌다.
마치 더 큰 불행이 닥치지 않도록 안다인이 막아 주고 있던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들의 병과 곤궁은 점점 깊어져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벼랑 끝에 몰린 나머지 그들은 헛소문을 접하자마자 안다인을 다그쳤다.
그들은 딸에게 품었던 공포를 잊고 안다인에게 건물을 내놔라, 돈을 내놔라 하며 구걸과 협박을 해댔다.
“어쨌든, 통화 내용은 모름요. 하지만 대충은 앎.”
“대충이라도 그 내용을 듣지.”
“통화를 마친 다인느님이 재단 홍보팀에서 발표한 보상금과 배상금 책정에 관해 물어봤음요.”
보상금과 배상금을 언급하는 문새론의 목소리가 축축 늘어졌다.
문새론은 안다인이 집안에서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짐작이 간 건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덩달아 나도 침울한 기분이 들었다.
황명 재단 홍보팀에선 이번 일을 철저히 대비했고, 대책도 발표했다.
그중 하나가 활약을 보인 학생에게는 보상을, 피해를 입은 학생에게는 배상을 하겠다는 것이다.
안다인의 부모는 보상금과 배상금에 관한 이야기를 듣자 눈이 돌아갔나 보다.
‘하지만 안다인의 부모가 정신 줄을 놓는 건 2학년 때야. 좀 빠르지 않나?’
플마고 때보다 안다인의 부모가 무너지는 게 빠른 것 같다.
단순히 이번 사건이 워낙 크게 퍼지고, 플마고 때와 달리 황명 재단에서 일을 잘하는 바람에 그런 걸지도 모른다.
어쩐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이해했다. 외적인 문제로 인해 저 둘은 크리스마스 데이트를 즐길 기분이 들지 않는 거로군.”
나와 문새론과 달리 과몰입하지 않아 상황을 냉정하게 볼 수 있는 황지호가 결론을 지었다.
크리스마스 데이트라는 단어를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감정을 가지고 논 마신의 사제 놈이랑 안다인을 불행과 돈의 상징으로 여기는 이들 때문에 저들의 데이트를 망칠 수 없었다.
그냥 데이트도 아니고 크리스마스 데이트인데!
마음을 다잡고 두 사람이 있는 쪽을 봤는데, 주수혁과 안다인은 여전히 찬바람을 맞으며 각자 생각에 잠겨 있었다.
‘모처럼 산타 의상을 갖춰 입어서 커플룩처럼 됐는데…… 잠깐, 두 사람 의상이 좀 바뀌었는데.’
두 사람의 의상이 내가 기억하는 것과 좀 달랐다.
주수혁과 안다인이 입은 퍼 코트, 케이프 코트의 단추가 모조리 교체되어 있었는데, 둘 다 같은 디자인의 단추로 바뀌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은광고의 교표가 붙어 있던 부분이 크리스마스 이벤트용으로 디자인된 로고로 교체되어 있었는데, 와펜의 색 배합이 똑같았다.
딱 보니 전투로 인해 망가진 부분을 수선하면서 대놓고 커플룩으로 바꿔 버린 것 같았다.
저렇게 갖춰 입었는데 땅을 파는 꼴은 못 보겠다.
둘이 데이트를 즐길 계기 정도는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가서 바람을 잡자.”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1분 1초가 아까운 와중에 망설일 틈은 없었다.
황지호가 내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되물었다.
“바람?”
“지금 두 사람은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제대로 된 화젯거리를 못 찾는 거야. 그럼에도 약속을 취소하지 않고 있는 건 같이 있고 싶어서겠지.”
“흠, 본인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심리 상태와 주변 상황에 관한 이해가 깊군.”
“아, 그건 그렇긴 함요.”
황지호는 왜 굳이 ‘본인을 제외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표현하는 거지?
문새론도 동의하는 게 좀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매우 급한 문제가 있으니 일단 무시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내가 가서 대화를 하도록 유도할게. 그리고 그대로 신문부가 준비한 전시실로 유도할 거야.”
“나와 문새론이 해야 할 일이 있는 것 같군.”
“어.”
나는 신문부가 대관한 전시실의 구조, 조명, 이동 루트 등을 고려해 수를 두었다.
황지호와 문새론은 신문부로서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두 사람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쉽게 풀릴 거야.”
둘이 행복하게 데이트하는 것만으로도 선물을 받는 기분이 드는 사람이 많을 테니, 다들 도와줄 거다.
돌아가기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