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00)
90. 가면 (4)
거주 구역, 지익회관.
밤샘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리는 이곳엔 수많은 학생들이 몰려 있었다.
이틀 연속 이어서 하는 파티인데도 지난 밤보다 사람이 더 많이 모였다.
크리스마스 당일 이벤트에 대비해 일찍 자러 갔던 학생도 마음 놓고 밤을 지새우고, 큰일을 치러 한시름 놓은 교사진도 파티에 합류한 덕이다.
파티에 참가한 이들 중에는 우주의 기운 건으로 난동을 피우던 3학년 0반도 있었다.
본래 이들은 밤샘 수색을 벌일 계획이었으나 성시완의 활약으로 일단 파티 중에는 휴전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연구부장 선생님, 내일도 우주의 기운을 수색하실 겁니까?”
“물론이죠, 약하고 귀여운 제자들이 제가 없는 사이에 열심히 싸웠으니까 상을 줄 생각이에요.”
함근형이 복잡한 표정으로 묻자 임연화가 뿌듯해하며 말했다.
임연화가 행여 마음을 바꿔 먹을까 봐 주시하고 있던 우기환이 발작하며 말했다.
“우리가 진족을 몇 명이나 때려잡았는데 약하고 귀엽다니!”
“진족도 진족 나름이지. 몹시 약한 소수의 진족을 상대로 기습하고, 숫자로 밀어붙여서 겨우 이겼잖니. 선생님이 상대였으면 한 주먹에 안개가 날아가서 단번에 제압당했을 거란다.”
“크윽!”
임연화는 우족이 들으면 피를 토할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했다.
만약 그 자리에 우마왕이 남았거나 아피스의 화신이 조의신을 따라가지 않고 남았더라면, 우족들이 판단을 달리해 처음부터 주무기를 꺼내 안개를 날려 버리거나 광림을 썼다면 학생들은 필패했을 거다.
실제로 계이담의 광림, ‘밤정적의 안개’를 주먹으로 날린 경력이 있는 임연화가 말하자 설득력이 넘쳤다.
졸지에 약하고 귀여운 제자가 된 우기환이 굴욕감에 부들거렸다.
지익회 학생들은 3학년 0반이 또 폭주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이를 지켜봤다.
다행스럽게도 2학년 0반은 따오기 옷차림을 한 제갈재걸과 단란하게 노닥거렸고, 1학년 0반은 조의신이 없어서 다소 섭섭해하는 눈치였으나 조용히 크리스마스를 즐기고 있었다.
0반의 동태를 살피던 안다인은 안심하였다.
‘파티 중에 사건이 발생하면 지익회에 협력할 생각이었는데, 문제가 없을 것 같아.’
부모의 끈질긴 연락 탓에 최악으로 시작한 크리스마스였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좋은 일만 가득했다.
주수혁과 만난 직후에는 다소 대화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조의신이 신문부 기획전에 초대한 이후로는 모든 게 잘 풀렸다.
사진을 통해 1년간 있었던 일을 되짚어 보니 화제가 끊이질 않았다.
덤으로 문새론으로부터 크리스마스 선물도 받았다.
―님들 사진이 많이 와서 원본 선물해 드림!
수백 장에 이르는 사진들에는 주수혁과 안다인이 찍혀 있었다.
두 사람만 찍힌 건 아니었으나 같은 공간에 둘이 있었다는 증거가 보이자 마음이 따뜻해졌다.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헤어지기 전, 두 사람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교환했다.
주수혁은 직접 만든 동백꽃과 수선화의 압화 책갈피를, 안다인은 주수혁이 읽고 싶어 하던 책의 구판본을 건넸다.
‘수혁이가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해서 다행이야. 수혁이가 준 선물도 멋졌고…… 마치 크리스마스 데이트를 하는 것 같았어.’
사실, 은광고 전체가 그걸 데이트라고 생각했으나 주수혁과 안다인만 친구끼리 한 축제 구경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둘은 손 한 번 잡지 못한 채로 데이트를 끝냈으나 특별한 날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었다.
크리스마스에 안다인에게 일어난 좋은 일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조금 늦었지만 김신록 선생님도 오셨어. 바빠서 못 오실 수도 있다고 들었는데 다행이야.’
김신록은 황명호 대저택을 나선 후, 곧바로 지익회관으로 왔다.
김신록이 나타나자 바로 기다렸다는 듯이 학생들이 크리스마스 인사를 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김신록 주변에는 현재 담당하고 있는 1학년 1반과 지익회 학생 외에 2학년, 3학년 학생도 있었다.
김신록은 비록 부장급 교사처럼 화려한 활약을 하지 않았지만, 수수하게 인기가 있고 인망이 두터워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온화한 얼굴로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던 김신록은 디바이스에 연락이 왔는지 잠시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비웠다.
그사이 안다인은 빈 커피잔을 채우기 위해 커피 디스펜서 쪽으로 향했다.
“다인아,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
“……!”
자리를 비웠다고 생각한 김신록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조금도 기척을 느끼지 못한 안다인이 당혹스러워했다.
‘선생님은 오랜 시간 살아온 호족과 웅족의 후예라고 하셨지. 지금까지는 힘을 감추고 계셨구나.’
김신록은 절묘하게 지익회관 기둥에 몸을 감추고 있었다.
안다인은 정황상 김신록이 사람들 앞에서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할 생각이라고 파악했다.
“네, 어디로 가면 될까요?”
“은휘관으로 가자. 뒷문에 에어 셔틀에 대기 중이야.”
김신록은 다소 다급해 보이고 혼란스러워 보였다.
갑자기 야밤에 담임 교사가 이사장실로 학생을 불러내는 건 이상한 일이었으나 안다인은 의심 없이 이를 따르기로 했다.
그저 안다인은 김신록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김신록 선생님이 후예라는 건 학교도 알고 있겠지. 내가 그 비밀을 알게 된 바람에 선생님이 곤란해지신 게 아닐까?’
은휘관으로 향하는 에어 셔틀에 올라탄 후, 계속 말이 없던 김신록이 입을 열었다.
“다인아, 내가 불러내긴 했지만 아무리 교사라 해도 이런 시간에 호출하면 이유 정도는 물어야 하지 않겠니?”
“함부로 결정한 게 아니에요. 김신록 선생님만큼 신뢰하는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전후 사정을 확인한 후에 결정을 내렸을 거예요.”
“그, 그래…….”
안다인의 믿음이 철철 넘치는 말에 김신록이 민망해했다.
이 광경을 보면 용제건이 한껏 황홀한 표정을 지었을 텐데, 아쉽게도 이 자리에 없었다.
안다인은 선을 긋던 김신록의 진짜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기뻤다.
안다인이 생긋 웃으며 김신록을 보자 김신록은 변명하듯이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 은휘관으로 가야 하는 건……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서…… 그분들이 나도 기다리고 계신다고 하니까…….”
“그분들요? 은휘관에는 이사장님이 계시는 게 아닌가요?”
“이사장님도 계시긴 한데…….”
김신록이 말을 아끼는 사이, 에어 셔틀은 금방 은휘관에 도착했다.
은휘관에 도착하자 황명호의 비서가 그들을 직접 맞이했다.
가면을 쓴 것 같은 얼굴을 한 비서의 손에는 하이엔드 명품 패션 브랜드, 느루의 로고가 박힌 쇼핑백이 있었는데, 마치 급하게 옷을 조달하고 온 것처럼 보였다.
비서는 곧장 호랑이가 조각된 문 앞, 이사장실로 안내했다.
비서가 둘에게 들어갈 준비가 되면 노크를 할 것을 권한 후 물러나자, 김신록이 말했다.
“……내가 있어도 될 자리인지 모르겠다.”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김신록 선생님이 곁에 있어 주시면 마음이 든든할 것 같아요.”
김신록은 여기까지 와서 물러나려 했으나 안다인이 이를 만류했다.
고민 끝에 김신록은 제자의 부탁을 받아 주기로 했다.
김신록이 이사장실 문을 노크하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도록.”
당연히 황명호나 다른 어른이 답할 줄 알았는데, 이사장실 안에서 들린 건 예상보다 앳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안다인도 알고 있는 학생 같았다.
‘지호 목소리 같아.’
0반의 황지호가 황명호의 친척이었다는 것을 떠올리며 안다인이 문을 열었다.
문을 연 순간, 안다인의 눈에 말끔한 정장 차림을 한 두 남녀가 보였다.
그들은 문이 잘 보이는 위치에 서서 안다인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
눈이 마주친 순간 안다인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뱉었다.
미안함, 슬픔, 다정함, 기쁨 등의 온갖 감정을 담은 눈을 한 두 사람은 안다인과 몹시 닮아 있었다.
그 눈을 본 순간 안다인은 아주 오랫동안 가슴에 억눌렀던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저 자신과 닮은 외모를 한 이들이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안다인은 이들의 얼굴을 보는 걸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기분이 들었다.
“혹시.”
안다인은 급히 말을 멈췄다.
그녀는 밑도 끝도 없이 치밀어 오른 의문을 겨우 삼켰다.
최전선에서도 언제나 냉정함을 잃지 않았던 안다인의 이성이 겨우 ‘부모님’이라는 말이 나오는 걸 막았다.
안다인은 자신의 친부모가 여러 차례 친자 확인을 한 것과 그 검사 결과에 관해 알고 있었다.
검사 결과상, 그들이 자신에게 삶을 부여한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을 보니 자신이 믿고 있던 상식, 억지로 무시하던 의문과 그리움이 마구 치솟기 시작했다.
왜 그렇냐고 묻는다면 ‘그냥’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안다인은 저 둘의 얼굴을 보니 그냥 제 마음을 다스리기 어려웠다.
뚝, 뚝…….
안다인이 그 둘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을 때, 부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눈물을 보니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본능이 그렇다고 외치고 있었다.
결국 한 번은 억눌렀던 말이 안다인의 이성을 무시하고 새어 나왔다.
“엄마, 아빠……?”
그 말을 한 순간, 안다인의 시야가 흐려졌다.
안다인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 앞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다음 순간 그녀는 부모의 품에 안겨 있었다.
처음 느껴 보는 다정한 온기와 체온에 안다인은 표현하기 힘든 안심감을 느꼈다.
이 안도를 느끼고 나니 더는 의심을 품을 수 없었다.
“우리가 너를 지켰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미안해…… 너는 계속 기다려 줬는데…….”
안다인의 부모는 그녀를 품에 안고 계속 사죄의 말을 했다.
먼저 진정한 안다인이 둘을 달래기 시작했다.
“계속 뵙고 싶었어요. 얼굴을 보여 주실 수 있나요?”
안다인은 자신이 어째서 계속 기다렸다는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줄곧 기다린 것 같은 기분이 든 건 사실이었다.
안다인은 매우 천천히 고개를 든 두 사람을 올려다봤다.
안다인은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으나 부은 눈으로 우는 두 사람을 달래기 위해 웃었다.
두 사람이 눈물을 그친 후에야 안다인은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안다인은 제일 먼저 이 자리에 자신을 데려온 김신록을 부모에게 소개했다.
“김신록 선생님은 제가 제일 존경하는 분이에요.”
부부는 눈물을 그치고 안다인의 담임 선생님 자랑을 들었다.
안다인의 말이 길어질수록 김신록의 고개가 천천히 내려가고 얼굴이 벌게졌다.
한참 김신록을 소개한 후에야 안다인은 이 자리에 김신록 외에도 조의신, 황지호의 모습을 한 황호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상석에 앉은 황호는 수천 살을 먹은 노인이 흐뭇한 광경을 보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고, 조의신은 수상한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조의신의 그 표정은 부부가 그를 안다인에게 소개해 줄 때까지 계속되었다.
“너와 우리를 찾아 준 은인이란다.”
갑자기 은인 소리를 듣자 조의신의 얼굴에서 수상함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대신 겸연쩍은 표정을 짓고는 화제를 돌리려 시도했다.
그러나 황지호의 모습을 한 황호까지 대놓고 은인 소리를 해 대 조의신은 도망칠 길이 없었다.
‘의신이가 몇 번이나 나를 구해 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주수혁과 대화를 원활하게 하도록 도와준 것도 그렇고, 조의신에게는 몇 번이나 신세를 졌다.
어쩌면 조의신은 지금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 안다인을 도와 줬을지도 모른다.
아니, 안다인은 조의신이 자신에게 줄곧 도움을 줬을 거라 굳게 믿었다.
“고마워, 의신아.”
“……아니야, 난 한 게 없어.”
안다인은 짧은 감사 인사를 했는데도 조의신은 아주 큰 보상을 받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안다인은 조의신이 자신의 은인임을 재차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