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13)
91. 히든 피스 (5)
산령이 눈으로 따라가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사라졌다.
처음엔 예상한 경로에 산령이 보이지 않아 괜히 산령이 장난기와 의심을 발휘해 엉뚱한 방향으로 향한 게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다.
다소 빠르긴 했으나 산령은 칼바람 고개로 직진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빠르네. 하긴, 저 정도로 빠르지 않았다면 진작에 우기환 일당에 잡혔겠지. 백호군도 산령을 잡는 데 그렇게 수고를 들이지 않았을 거고.’
백호군도 산령이 달리는 방향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백호군의 시선은 곧바로 반대 방향으로 돌아갔다.
돌린 시선 끝에 3학년 0반 일당이 있었다.
“1학년 0반의 수상한 부반장이잖아!”
“여기서 뭐 하냐? 옆에 있는 건 누구야?”
우기환과 3학년 0반 부반장이 나를 알아보고 곧바로 말을 걸었다.
귀 쪽을 보니 두 사람은 이어폰을 폭주시켰을 때 영향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내가 첫 번째로 둔 수는 3학년 0반의 은신처를 제압해 저들이 사용 중인 무선 통신의 중계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내 수대로 움직인 적호가 은신처에 잠입해서 이어폰이 수신 가능한 총량을 뛰어넘는 수준의 전파와 이능파를 적뢰를 통해 쏟아 넣었다.
그 결과, 이어폰이 폭발을 일으켜 잠시 발을 묶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예상대로 반장과 부반장, 두 사람 외에도 강한 담임이 걸리지 않았어.’
임연화는 나와 백호군을 보고 놀라는 대신 흥미진진해하는 얼굴로 관찰했다.
사냥 과정에 변수가 생겨 제자들이 배워 가는 게 늘어나 이득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단순히 사냥이 더 즐거워질 거라 여겨서 저러는 걸지도 모른다.
“의신이 옆에 있는 애, 사관학교랑 교류전 할 때 검무 췄던 애지? 의신이랑 아는 사이였나 보네.”
임연화의 말에 두 번 놀랐다.
임연화가 백호군이 개막식에서 검무를 췄다는 것을 알아봤다는 점.
그리고 백호군 보고 ‘애’라고 표현한 점이다!
‘검무를 출 때 교복을 입어서 그런가? 그래도 지금은 평상복 차림인데…….’
백호군은 젊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바로 고등학생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지 않을까?
벌크업을 거치고 고생을 해서 우락부락해진 3학년 0반을 옆에 두면 고등학생이라고 못 부를 것도 없긴 한데…….
“쟤가요? 그때 가면 쓰고 있었는데 어떻게 알아요.”
“맞아요! 교사들도 그때 검무 춘 애가 누군지 모른다는데!”
“한 번 본 근육의 형태는 전부 기억하거든. 특히 강한 근육을 가진 상대라면 절대 잊지 않아.”
우기환과 부반장의 말에 임연화가 자애롭게 답했다.
임연화는 사람을 근육으로 판별하나?
단순히 얼굴을 숨기는 것만으로는 임연화의 눈을 속이는 건 불가능한가 보다.
뭐, 내 최후의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강한 근육을 지니고 있으니 바로 알아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임연화의 근육 판별안에 감탄하고 있을 때, 우기환 일당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건지 부들거리며 말했다.
“……강한 근육이라니, 우리한테는 한 번도 쓰지 않았던 표현인데!”
“키도 크고 체격이 좋긴 한데 우리도 덩치만큼은 지지 않습니다만?”
선배놈들은 임연화가 ‘강한 근육’이라는 표현을 쓴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게 억울하면 강해지지 그랬나.
원성이 빗발치자 임연화는 강한 담임 기준 약하고 어린 제자를 부드럽게 타일렀다.
“근육과 힘은 크기의 문제가 아니야. 너희 중 반 이상이 선생님보다 몸집이 큰데 약하잖니. 하여튼, 너희의 약하고 어린 근육이랑 저 강한 근육은 비교가 안 돼. 쟤랑 너희랑 싸우면 무조건 질 거야.”
임연화의 크나큰 자애 속에 날카로운 경계심이 깃들어 있었다.
호족 최고의 무재로 꼽히던 백호군의 역량을 알아본 듯했다.
강한 담임이 백호군의 실력을 인정하자 괜히 뿌듯해졌다.
“크으으윽!”
“싸, 싸움은 근육으로만 하는 게 아닙니다!”
“맞아, 우리한테는 이능도 있어!”
임연화한테 이능으로도 안 돼서 근육을 키우던 선배놈들이 태세를 전환했다.
우기환은 핏발 선 눈으로 말했다.
“어쨌든, 지금 이곳은 전쟁터다. 하산하라!”
“싫어요.”
“뭣!”
내가 딱 잘라 말하자 공기가 싸늘해졌다.
일단 예의 바른 후배로 지내던 내가 이렇게 받아칠 줄은 몰랐나 보다.
임연화만이 평정을 지키고 있었는데, 나와 백호군을 발견한 시점부터 이런 전개가 되리라 예상했나 보다.
“서, 설마 너도 우주의 기운을 노리고 온 거냐!”
“노리지는 않지만, 선배님들을 저지할 생각이에요.”
“제길, 옛날에 천익산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수상했어!”
전에 성국언의 괴담 조사 의뢰를 위해 천익산에 갔다가 마주쳤을 때를 말하는 걸까?
수상하게 여겼던 것치고는 우기환은 신나게 천익산 안내를 해 줬는데.
우기환이 나를 몰아세우며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사이, 3학년 0반 쪽에서 눈빛을 주고받고 손짓을 하는 게 보였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아서 우기환이 하는 헛소리에 답하는 대신 말했다.
“탐지 레이더를 가동해서 표적을 찾으시려는 건가요?”
“……!”
내 추측이 맞았는지 3학년 0반 선배놈 중 몇몇이 움찔거렸다.
3학년 0반은 담임과의 대결을 대비해 천익산 곳곳에 탐지 레이더를 설치해 뒀다.
통찰계 이능만으로는 기척을 숨긴 담임을 포착하는 게 어렵기 때문에 벌인 수작이었다.
“그런 걸 준비해 뒀어? 선생님을 레이더로 포착할 수 있을지 궁금하네.”
임연화가 기대에 찬 얼굴로 저러는 걸 보니 탐지 레이더를 상대로도 몸을 숨길 자신이 있는 것 같다.
어차피 당분간 탐지 레이더를 사용할 수 없을 테니 3학년 0반이 뭔 짓을 해도 소용이 없겠지만 말이다.
“설치한 탐지 레이더는 전부 철거했으니 소용없어요.”
이렇게까지 말하니 3학년 0반 선배놈들도 내가 뭔 짓을 했는지 알아챈 것 같았다.
선배놈들은 우주의 기운 포획을 목전에 뒀다는 흥분감을 가라앉히고 점차 냉정을 되찾았다.
‘이제 슬슬 진정이 됐나 보네.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일망타진하기는 쉽지만, 저쪽이 만전일 때 쓰러뜨려야 의미가 있으니까.’
우기환이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침착해진 어조로 물었다.
“……이어폰을 폭발시킨 것도 네 짓이야?”
“네, 제가 한 짓이에요.”
“어떻게 그걸 다…… 한두 개도 아니고, 철저하게 숨겨 놨는데!”
우기환은 아직도 정신을 제대로 못 차렸나 보다.
나는 우기환을 비롯한 원시인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설명했다.
“선배님들이 직접 은신처에 있는 지도를 보여 주셨잖아요. 얼마 지나지도 않은 일인데 잊으신 건 아니죠?”
“그, 그걸 아직도 외우고 있다니!”
작전이 구체적이고 세세할수록 한 번 새면 허를 찌르기 쉬워진다.
지난 날, 은신처에 초대받아 지도를 열람했던 덕에 수를 두기 몹시 수월했다.
전투태세를 갖추는 선배놈들을 보며 말했다.
“저는 우주의 기운을 노리고 있지 않아요.”
“거짓말하지 마라!”
“네, 지금 선배님은 믿지 않으시겠죠.”
내가 몇 마디 하고 산령의 정체를 밝힌다고 해서 선배놈들이 쉽게 나가떨어질 리가 없다.
그래서 3학년 0반 선배놈들 수준에 맞춰서 수를 두기로 했다.
“그러니까 우선 우주의 기운 없이 선배님과 임연화 선생님을 이길 거예요.”
딱!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튀기자 손목에 새겨진 인장이 열을 품었다.
그러자 황지호가 지력의 사용을 허가한 증거가 빛나고, 이에 반응해 바닥에서 황금빛 입자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파아아…….
정체는 몰라도 심상치 않은 힘이 움직였다는 걸 알아챈 건지 3학년 0반 선배놈들이 몸을 굳히고, 이능파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반응한 건 임연화였다.
“얘들아, 물러나!”
콰콰콰콰콰!
임연화가 외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땅의 벽이 솟아올랐다.
거대한 벽이 세워지고 지면이 몇 차례나 꿈틀거리며 흙을 토하고, 균열을 만들어 냈다.
이윽고 땅의 움직임이 안정되었을 때, 3학년 0반과 임연화는 완전히 분단되어 있었다.
“3학년 0반은 힘의 논리로 돌아가죠.”
경악하는 선배들을 상대로 말했다.
“그러니 힘으로 승부해요.”
* * *
산사태, 지진 수준의 힘이 진정된 후.
임연화는 자연재해 수준의 이능이 발동하자 학생들이 도망칠 수 있도록 땅의 기세를 죽였다.
임연화는 그 짧은 사이에 주먹으로 땅을 내리치고 마법진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발로 분쇄하는 등, 3학년 0반은 상상도 못 한 활약을 펼쳤다.
그래서 임연화는 학생들을 따라가지 못했다.
‘의신이가 이능파를 흘리자 땅이 반응했어. 방금 건 순전히 의신이의 힘이라기보다는 땅에 묻힌 힘이 움직였다고 봐야 해.’
조의신은 지력을 움직여 사전에 땅속에 심은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임연화는 그 구체적인 매커니즘을 파악하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지금 임연화가 가장 궁금한 건 땅에 묻혀 있던 마법진을 새긴 자의 정체였다.
‘그건 의신이의 힘이었나? 아니면 뒤에 서 있던 검무를 춘 애의 힘? 아니, 그렇다고 하기엔 그 힘은 어딘가…….’
임연화는 그 마법진에서 느껴진 것과 유사한 힘을 다루는 자를 알고 있었다.
임연화는 교직원들의 이능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을 만큼 은광고에서 길게 근무했다.
그 교직원 중에는 이사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임연화가 분쇄한 마법진은 은광고의 이사장, 황명호가 사용하는 결계술과 비슷한 느낌이 났다.
“훌륭하군. 대처하는 데 좀 더 애를 먹을 줄 알았는데, 이리도 쉽게 정리하다니.”
“……이사장님?”
황명호 이사장의 모습을 한 황호와 임연화의 눈이 마주쳤다.
임연화는 자신을 채용한 은광고의 이사장에게 감사의 마음을 품고 있었지만, 무조건 좋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이사장은 은광고의 어둠을 오래도록 방치했으니까.
은광고의 이사장은 교직원들이 은광고를 엉망으로 만들 수 있을 만큼 빈틈이 많고, 그들의 부패를 방치할 만큼 태만하고, 겉보기에는 관대해 보이나 무서운 구석이 있었다.
‘이사장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임연화는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불만을 숨겼다.
임연화는 은광고의 어둠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으나 그녀의 강함만으로 헤쳐 가는 건 불가능했기에 나설 수 없었다.
그랬기에 임연화는 지킬 수 있는 범위에 있는 것들, 자신이 담당하는 학생들을 철저히 지키며 지내 왔다.
올해 들어서야 이사장이 조금씩 움직여 그녀도 숨통이 트였으나 그저 좋게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임연화의 속을 읽은 것처럼 황호가 말했다.
“자네와 싸울 생각이네. 자네도 나와 싸워 보고 싶지 않았나?”
그야 한 대 쳐서 정신을 차리게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다.
이사장은 강하니까 진심으로 때려도 죽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사장님과 싸울 수 있다면 영광이죠. 교직이 걸려 있어서 문제지만요.”
임연화는 냉큼 덤비는 대신 말했다.
강한 담임의 약점은 교직이라는 직위 그 자체였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은광고가 아니면 그녀를 감당할 수 있는 학교가 없었다.
은광고에서 교직을 잃으면 다시 플레이어 군으로 끌려가 인간 병기로 살아야 할 텐데, 그렇게 되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내게 문제가 생기더라도 자네의 교직이 흔들릴 일은 없네.”
“그래요?”
임연화는 황호가 허언을 하는 게 아니라 판단하고 싸울 준비를 했다.
그 모습을 본 황호가 웃었다.
천익산에서 벌이는 강자와의 1대1 싸움.
그것도 황호의 은인, 조의신이 깔아 준 판이라 생각하니 우마왕과의 대결이 떠올랐다.
그 대결의 과정과 결말을 생각하며 황호가 말했다.
“이번에는 체면을 세울 생각이다. 덤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