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725화 (725/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25)

92. 카운트다운 (6)

진웅팔선이 회복되어 X가 돌아오는 걸까, X가 돌아왔기에 진웅팔선이 회복되는 걸까.

어느 쪽이건 시델렌티움의 가설대로라면 두 현상은 동시에 발생할 것이다.

―그 사라진 X는 필시 호족, 웅족과 깊은 연이 있을 거다. 곤란하게 됐군.

시델렌티움이 그렇게 입을 움직이긴 했지만, 전혀 곤란해 보이지 않았다.

입이 웃고 있었다.

어차피 남의 일이라 방관하는 입장에서는 그저 즐겁기만 한 모양이다.

―X의 소멸은 천신과 신인이 이 땅과 가까이에 있을 때 벌어졌을 것이다.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는 아득한 신화 시절을 헤집어야 한다.

“그러면 신화 시절부터 존재한 호족과 웅족이 단서를 쥐고 있겠네.”

마침 은호가 신화 시절의 연표를 만들고 있으니 그걸 참고하면 되지 않을까?

어쩌면 그때 일을 되짚어 보던 호족들이 위화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나 나는 그들로부터 제대로 된 단서를 취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왜?”

―그들은 수천 년간 X의 부재를 알아채지 못한 당사자다.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지. 그들이 함께하며 쌓은 경험, 인연, 정, 확신이 객관적인 사고를 방해할 것이다.

‘당사자라서 얻을 수 있는 정보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델렌티움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생각이라는 건 한 번 굳어지면 바꾸기 어렵다.

머리가 부수어질 수준의 충격을 받아야 겨우 사고를 고쳐먹는 이도 있고, 죽을 정도로 강렬한 경험을 해도 끝까지 생각을 바꾸지 않는 이도 있지 않은가.

행여 부재를 눈치채더라도 그 빈자리에 들어가야 할 X를 다른 이로 착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화시대를 살았던 호족 중, 온전한 객관성을 얻은 호랑이가 있어.’

바로 은호다.

은호는 내가 있던 세계에서는 천성헌으로서 호족이 아닌 무관계한 인간의 입장으로 개천 신화를 접한 적이 있다.

은호가 신화 시절의 연표를 제작하는 이유가 X와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은호의 정보는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래도 시델렌티움에게 은호에 관해 밝힐 의리는 없었기에 입을 다물기로 했다.

―하물며 황호는 오랜 기간 사라진 친우들을 찾아 헤맸다. 부재조차 알아채지 못했던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것 같으냐?

황지호가 X의 존재를 쉽게 받아들일지 의문이긴 했다.

설령 바로 받아들인다 해도 황지호 입장에서는 기쁘면서도 마음이 복잡할 것 같다.

―열쇠를 쥔 건 너다.

“나?”

―호족들과 몹시 가까이 지내면서도 선을 긋고 있지 않은가. 네 자신에게도 엄격한 너라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구나.

내가 호족에게 X를 찾아 주는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까?

여태까지 나눈 대화를 되짚으며 생각해 본 후 말했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개입 자체가 필요 없을 수도 있어.”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X가 돌아오면 사라졌던 기억이 돌아올 수도 있잖아. 자연스럽게 호족들이 X의 부재를 깨닫고 그게 누군지 특정할 수 있을 거야.”

호족들에게 내 도움이 필요 없을 거라고 전하자 시델렌티움과 류장이 비슷한 표정으로 웃었다.

아이를 상대로 설교하는 어른이 지을 법한 미소라 괜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너를 ‘열쇠를 쥔 자’라고 비유했지.

“어, 그런데?”

―문을 가로막은 장애물을 치우고 빗장을 걷어 내고, 열쇠를 가지고 있는 데다 심지어 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다고 치자. 그러나 열리기 직전이라고 해도 문은 여전히 닫혀 있는 상태지.

그야 모든 조건이 갖춰졌다고 해도 문이 열린 것과 닫힌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 시델렌티움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누군가는 문을 열어야 하는 법이다.

X에 관해 모르는 건 시델렌티움도 마찬가지이면서 뭘 아는 척하는 건지 모르겠다.

시델렌티움이 저런 비유를 하긴 했지만, 현재 상황은 잠겨 있는 문이 있다는 걸 막 인지한 거나 다름없다.

어떤 장애물을 제거해야 할지, 빗장을 치우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열쇠를 움직여야 할지 아직 미지수다.

“내일 아침까지 케이크를 완성하겠습니다. 영원의 호수 분들 몫까지 준비하려면 서둘러야겠군요.”

MITRON을 나서기 전, 배웅 나온 류장이 주문을 확인하며 덧붙였다.

“가게 앞에 손님이 계십니다. 오늘은 영업 중이 아니라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MITRON 앞에 누가 왔다고?

류장이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나와 관계가 있는 누군가가 온 듯했다.

설마 기어코 황지호가 여기까지 온 건가.

치사하게 이 추운 날에 황유호를 고생시키며 여기로 보내지 않았겠지?

어린 황유호의 뺨이 얼까 봐 급하게 장갑을 끼고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황유호는 없었다.

“안녕, 의신아.”

“⋯⋯오늘은 영업 중이 아니라는데요.”

“의신이는 영업도 안 하는 베이커리에서 뭐 해?”

눈가리개를 한 용제건이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지만 말하는 게 몹시 얄미웠다.

답변이 조금 늦어지자 용제건이 바로 틈을 파고들었다.

“말할 수 없는 무언가를 했나 봐.”

“생일 파티에서 먹을 케이크 주문했어요.”

“아, 레나 생일 말하는 거구나. 그런데 주문은 디바이스로 하면 되지 않아? 애초에 쉬는 날에 주문을 받는 게 이상하긴 한데.”

용제건의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고 답했다.

다행히 금방 말을 돌리는 데에 성공했는데, 괜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 용제건이라면 능글맞은 화법으로 원하는 정보를 얻어 냈을 텐데. 왜 쉽게 포기한 거지?’

딱!

손가락이 맞부딪치는 소리와 동시에 시안색의 공간이 주변을 가렸다.

옥빛이 눈앞을 가려 눈을 가늘게 떴다.

“의신아, 진웅팔선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중이래.”

용제건이 왜 갑자기 공간술을 사용했나 싶더니 방음을 위해서였나 보다.

용제건은 내가 ‘그 단어’로서 웅녀와 거래를 한 걸 알고, 나도 용제건이 웅녀와 거래를 한 걸 알고 있다.

그러니 거리낌 없이 정보의 출처를 확인하기로 했다.

“비탄의 웅녀로부터 들었나요?”

“놀라지 않네. 나는 좀 놀랐는데. 혹시 의신이가 안 놀라는 건 여기에 들른 말 못 할 이유와 관련이 있어?”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훌륭한 감에 찬사가 나왔으나 용제건의 페이스에 휘말릴 순 없었다.

마음의 평정을 되찾은 후, 용제건과 다시 정보 교환을 개시했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용제건이 승천의 결심을 굳혔다는 게 느껴졌다.

진웅팔선이 눈을 떠 김신록을 노릴까 봐 걱정하나 보다.

“승천하기 전에 제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 것, 잊지 않으셨죠?”

“물론이지. 설마 승천하지 말라는 소원을 빌 거니?”

“아뇨.”

“응, 의신이는 나를 곤란하게 할 소원을 빌지 않겠지.”

용제건의 말대로다.

승천 여부처럼 중요한 선택지는 자신이 직접 골라야 하지 않나?

그래서 다른 소원을 빌기로 했다.

“제 소원은 하나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용궁에서 승천하지 말 것.”

“승천하는 장소는 관계없긴 한데⋯⋯ 그게 소원이야?”

“네.”

용제건은 내 말의 뜻을 가늠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수수께끼가 될지도 모르니 직접 풀어 볼 생각인가 보다.

*    *    *

다음 날, 영원의 호수 팀 빌딩.

반 아이들과 영원의 호수가 총력을 다해 준비한 깜짝 생일 파티는 성황리에 이루어졌다.

무대 위에서 권제인이 ‘생일 축하합니다’를 연주하고, 사월세음이 허공에서 눈이 아플 정도로 밝은 빛깔의 꽃가루를 뿌려 대자 권레나가 왈칵 눈물을 쏟았다.

“얘들아, 고마워⋯⋯!”

김유리가 씌워 준 고깔모자를 쓴 권레나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가장 화려한 색의 고깔모자는 권레나가 쓰고 있으나, 파티에 참석한 이들 전원이 모자를 쓰고 있었다.

저 고깔모자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모자 제작은 민그린과 송대석, 진정묵이 맡았는데, 송대석이 엄청 불평해 댔다.

―저 무림인 놈 붓글씨 엄청 못쓰네. 나보다 못쓸 줄은⋯⋯ 크윽!

―대석이는 마음하고 말이 못됐어!

고깔모자에는 파티 참석자의 이름을 붓글씨로 쓸 계획이었고 진정묵이 그 역할을 자처했다.

본인이 자처한 데다 진정묵은 자칭 무림인이니까 붓을 다루는 데에도 능숙할 것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힌 결과 대참사가 났다.

그림인지 글자인지 구분이 안 가는 지렁이가 모자 위를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진정묵은 탄식하며 순순히 다른 역할을 맡았다.

―⋯⋯정진하겠소.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군.

결국 송대석과 민그린이 글씨를 쓰고, 진정묵은 종이로 모자를 만드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역할 분담이 꼬이는 바람에 고깔모자 퀄리티는 예정보다 떨어졌지만, 권레나나 영원의 호수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조카 생일을 축하해 준다고 반 애들이 다 왔는데 뭘 해도 신경 쓰이지 않겠지.’

권제인의 생일 축하 연주 이후에는 구슬비와 옹길동이 준비한 마술쇼를 선보였다.

이능 없이 손재주만으로 선보이는 마술이 신선하게 느껴졌고, 옹길동의 쇼맨십과 구슬비의 서포트가 적절히 어우러져 아주 보기 좋았다.

하지만 옹길동이 좀 눈치 없게 굴었다.

“오늘 가장 축복받을 주인공과 세계 최고의 연주가에게 찬사를!”

마술쇼의 막바지, 옹길동이 관객석 한가운데 나란히 앉아 있던 권레나와 권제인에게 꽃을 선물했다.

권레나에게는 우정과 응원을 상징하는 노란색 프리지아를, 권제인에게는 동경과 특별함을 상징하는 보라색 프리지아를 건넸다.

완전히 일치하지 않아도 두 사람의 이능파색에 가까우면서도 좋은 꽃말을 지닌 꽃을 고른 센스가 돋보였다.

마술로 순식간에 꺼낸 프리지아 꽃다발을 우아하게 건네는 모습은 그림이 되었다.

그런데 이게 애드립이었는지 구슬비는 놀란 얼굴로 얼어붙었고 쇼가 끝난 후에도 같은 표정으로 굳어 있었다.

“왜 갑자기 프리지아를⋯⋯.”

“1월 7일 탄생화인 흰색 튤립은 ‘실연’이라는 슬픈 꽃말을 지녔지. 아름다운 꽃이나 오늘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프리지아를 택한 거다.”

구슬비는 꽃말이 궁금해서 질문한 게 아닌 것 같은데.

옹길동은 배려심은 깊었으나 눈치가 없고 오글거리는 소리를 잘했다.

다음으로는 권레나의 생일 선물을 두고 이벤트를 벌였다.

스무고개 방식으로 질문과 답을 주고받은 후, 답을 적어 내 무슨 선물인지 맞히는 게임이었다.

답을 맞힌 사람은 원하는 케이크나 과자를 택해 먹고, 틀린 사람은 얼굴에 낙서가 그려졌다.

낙서를 그리는 권한은 주인공인 권레나와 문제를 낸 사람에게 주어졌다.

‘어차피 나중엔 다 같이 원하는 만큼 먹겠지만⋯⋯ 상관없나.’

중요한 건 생일 파티를 즐기는 것이었기에 딱히 이 점을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참고로 현재 김유리와 나, 황지호를 제외한 모든 아이들의 얼굴에 낙서가 하나씩 그려져 있었다.

또, 목우람은 전패한 바람에 얼굴이 낙서로 가득했다.

“다음은 지호 차례야.”

“드디어 내 차례로군. 이 몸의 선물을 맞혀 봐라.”

하필 다음은 노친네였나.

황지호가 밀봉한 상자를 들고 무대에 오르자 독고미로와 한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반드시 맞히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쟤 요리 잘하잖아. 먹을 거 준비하지 않았을까?”

“어제 MITRON 가겠다고 계속 버틴 게 걸려.”

“그럼 혹시 케이크 아닐까요⋯⋯?”

“케이크는 부반장이 사 왔잖아.”

“‘하하하! 이 몸의 수제 케이크를 먹게 해 주마!’라면서 케이크를 만들어 왔을지도 모릅니다.”

황지호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말했다.

“답을 정해 두고 생각하면 맞힐 수 없을 거다. 자, 질문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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