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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731화 (731/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31)

93. 손님 (3)

긴장한 얼굴로 굳어 있는 리웨이와 달리 현무는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

현무는 황지호에게 말을 붙인 후, 나를 보며 웃고는 백호군에게 인사했다.

“백호, 잘 지내고 있었어? 네가 수인(囚人)이 된 이후로는 처음 보는구나.”

“그래.”

“답답하지는 않고? 세계를 유랑할 때마다 네 생각이 났어.”

“…….”

“옛날보다 말수가 부쩍 줄었구나.”

현무의 말투에서 그리움이 잔뜩 묻어났다.

백호군은 말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현무의 말에 가끔 고개를 끄덕이는 게 나름 반갑게 여기는 듯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지호가 한마디 했다.

“백호는 지금 이 땅에 묶여 있으나, 먼 옛날에는 호족 중 가장 자유로운 몸이었다. 교우 관계도 제법 넓은 편이었지.”

백호군은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권능을 소원으로 빌 정도였으니 그야 그럴 거다.

백호군은 교우 관계도 넓었구나.

그의 무위를 보면 누구나 친하게 지내고 싶긴 할 거다.

하지만 걸리는 점이 있었다.

‘그런 것치곤 플마고에서 백호군을 만나러 오거나 도움의 손길을 건네려는 이는 많지 않았는데…… 아.’

그 이유는 눈앞에 있었다.

바로 눈을 가린 현무였다.

백호군과 전설을 쌓아 올린 옛 친구들이라면 현무처럼 높은 신격을 지닌 이들일 가능성이 컸다.

예를 들어 황지호는 신격을 쌓지 않은 모양이지만, 만약 마음먹었다면 충분히 상위 존재가 될 수 있었을 거다.

백호군과 교류가 있는 이들 대부분은 상위 존재가 되어 이 땅을 떠났기에 더는 만날 수 없나 보다.

“청룡은 후예 사랑이 각별하다고 들었어. 지금도 후예와 잘 지내고 있어?”

“네 생각대로다.”

“하하, 그렇구나. 홍룡 같은 후예를 만나니 준엄한 청룡도 별수 없구나.”

청룡이 준엄?

홍염의 제왕 옆에서 홍룡 응원봉을 흔들며 플레이리스트를 보던 팔불출 청룡의 모습이 떠올랐다.

준엄한 구석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백호군과 현무가 청룡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사수(四獸) 중 백호, 청룡, 현무가 언급됐어. 그렇다면 남은 건…….’

마치 내 생각에 답을 주는 것처럼 백호군이 현무에게 물었다.

“주작은?”

플마고에서는 현무와 주작이 등장하지 않아 상위 존재가 된 줄 알았는데, 중국에 취재 여행을 갔을 때 둘이 진족으로 남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황지호와 예전에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여기는 현무의 근거지야?

―정확하게는 사수(四獸)로 추앙받던 백호, 청룡, 주작, 현무. 넷을 섬기던 이들이 세운 장소다. 주작과 현무는 여기에 자주 머물며 내킬 때마다 야시(夜市)를 열곤 하지.

그 대화대로라면 주작과 현무는 가까운 곳에서 지냈을 테니, 서로의 소식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주작의 이름이 나오자 현무의 입꼬리가 조금 내려갔다.

“주작은 인간 세계에서 잘 지내고 있을 거야. 아마도.”

아마도라니.

혹시 현무는 주작과 교류가 끊긴 걸까?

“주작이 운영하는 사업은 번창하고 있더군.”

“잘 알고 있구나.”

“이 몸이 황명 그룹을 이끌고 있다는 걸 잊었나? 사업가로서 주췌(Zhuque) 콘체른에 관해서는 당연히 알고 있다.”

황지호가 한 말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주췌 콘체른은 중국 이계 산업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초대형 기업 연대다.

중국의 이계 관련 사업을 거의 독점 중이나 다름없는 주췌 콘체른의 존재 때문에 플레이어 협회도 발을 못 붙일 정도였다.

그리고 주췌(Zhuque)는 주작(朱雀)의 중국식 발음이다.

‘주췌라는 이름에서 설립자가 주작과 관련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어. 기껏해야 가호를 받았을 거라고 여겼는데, 주작이 세운 곳이었구나.’

대부분의 기업인들이 황명 그룹이 호족과 관계가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설마 호족이 직접 운영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처럼 주췌 콘체른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금찬솔네 친척 중 하나가 주췌 콘체른의 이사회에 있다던데, 그럼 그 집안은 주작하고도 연이 있는 건가.

현무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주작하고는 내가 승천하는 문제로 싸운 이후로 얼굴을 보지 못했어. 주작은 정이 많거든.”

“정이 많은 것 같긴 하더군. 주작은 백호의 선처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냐고 묻기도 했지.”

“처음 듣는군.”

“하하하! 처음 말했으니까. 네가 주작의 소식을 궁금해하면 말하려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도통 입을 열지 않더군.”

황지호가 처웃고 백호군은 말없이 노친네를 쳐다봤다.

노친네는 이 순간을 위해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나 보다.

백호군은 처웃는 노친네로부터 시선을 뗀 후 말했다.

“주작을 못 본 지 얼마나 됐나.”

“이계 충돌 후 얼마 안 지나서…… 그러니까 주작이 주췌 콘체른을 세우기로 마음먹었을 때였을 거야. 이계 충돌 후에 진족과 상위 존재가 더 멀어졌다는 게 실감 났을 때였나.”

인간의 입장에서 봤을 때에는 이계 충돌 이후에 진족, 상위 존재를 가깝고 분명하게 느낄 수 있게 됐으나 진족 입장에서는 다를 거다.

진족은 현세에 끌려 나온 셈이니 인간과는 가까워졌으나 상위 존재와는 멀어졌을 거다.

그러니 이계 충돌 이후에 진족이 상위 존재가 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몹시 예민한 주제가 될 거다.

“주작은 너와 청룡이 한반도에 머무는 것도 서운하게 여겼으니까, 내가 승천하는 걸 기꺼이 여길 수 없겠지.”

현무가 상위 존재와 현세와의 거리감에 관해 말하자, 김신록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 갔다.

유일한 친우가 승천 직전이니 남 얘기처럼 들리지 않나 보다.

적호가 듣다못해 말을 끊어 버렸다.

“백호의 옛 친구는 말이 많군요. 잡담을 하려고 먼 길을 온 겁니까? 과묵한 벗을 본받는 게 좋겠군요.”

“아들 사랑이 각별하구나, 적호. 과거의 너를 기억하는 나로선 놀라울 따름이야.”

“저는 과거의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그래, 네 안중에 있는 이들은 많지 않았지.”

적호는 옛날에는 호족과 웅녀, 김신록 외에는 별 신경 안 썼나 보다.

사실 지금도 비슷한 것 같긴 하다.

“손님을 오래 세워 뒀군. 가지.”

황지호가 앞장서고 넓은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황지호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리웨이를 상대로 말을 걸었다.

“작년에 열여덟이라 했으니 이제 열아홉이 되었겠군.”

“아, 네. 만 나이 방식으로 나이를 세면 그렇습니다.”

“아직 고등학생인가?”

“네.”

리웨이는 황지호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했다.

중국의 교육 과정은 한국과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 중국의 국가 주관 대학 입학 통일 시험인 가오카오(高考)는 6월에 3일간에 걸쳐 치러지는데, 한국의 수능이 보통 11월에 치러지는 것과 비교되었다.

황지호는 이사장으로서 중국의 교육 과정에 흥미가 있는 건지 이것저것 물었다.

리웨이는 플레이어로서 플레이어 중등전문학교를 다녔는데, 이는 한국의 플레이어 특목고와 유사하였기에 이해하기 쉬웠다.

‘여기가 목적지인가.’

황지호와 리웨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복도 끝에 위치한 문 앞에 다다랐다.

문 너머에서는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문 가까이에 서니 지하의 공기가 더 차가워진 것 같았다.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린 것 같으니 묻지.”

“말씀하십시오.”

리웨이에게 말을 걸었던 건 단순히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보다.

황지호는 예전에 리웨이가 답하지 못했던 질문을 다시 할 생각인가 보다.

“이 너머에 우족의 수장이 있다. 내가 이 문을 열기를 바란다면, 너는 이유를 고해야 할 것이다.”

예전에 현무와 리웨이를 만났을 때, 황지호는 리웨이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리웨이는 염제 신농과 광림으로 이어진 존재로서, 만약의 경우에 적호를 치료할 수 있는 드문 능력자였기 때문이다.

유상희가 있긴 하지만, 유상희 한 명에게 친우의 목숨을 맡길 수는 없기에 황지호는 리웨이에게 두 가지를 청했다.

첫째, 호족이 요청할 때 광림을 써 줄 것.

둘째, 이 거래 내용을 외부로 유출하지 말 것.

그러자 리웨이는 이리 답했다.

―한반도에는 12지 동맹이 존재한다고 들었습니다.

―우족(牛族)의 수장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황지호는 이유를 고하면 생각해 보겠다고 답했으나 리웨이는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리웨이가 있다는 건, 말할 결심이 생겼기 때문일 거다.

리웨이는 숨을 몰아쉬다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 우족의 수장을 만났습니다.”

리웨이의 아버지라면 염제 신농의 가호를 받았던 자 아닌가?

황지호는 처음 리웨이의 아버지와 접촉할 예정이었으나 막상 중국에 와 보니 그는 죽어 있었고, 대신 리웨이가 있었다.

리웨이의 아버지가 죽은 건 황지호도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아버지는 우족의 수장을 만나기 직전, 이 말을 남기셨습니다.”

“무슨 말을 했지?”

리웨이는 자신의 발밑과 문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망설임 외에도 희미한 죄책감이 어려 있었다.

“자신이 돌아오지 못하면, 우족의 수장으로부터 달아나라고. 그리고 한반도에 발을 디뎌서는 아니 된다고.”

리웨이의 아버지가 맞이한 죽음과 우마왕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그 관계성은 아직 모르겠지만, 리웨이는 아버지의 유언을 어긴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하지만 너는 우족의 수장을 만나게 해 달라고 청했고, 이곳에 왔다. 유언 때문에 이 몸의 거래에 응한 건 아닌 것 같군.”

“……보여 드릴 게 있습니다.”

리웨이는 품에서 낡은 수첩을 꺼냈다.

수첩에는 이름으로 추정되는 글자가 적혀 있었는데, 리웨이와 성이 일치하는 것을 보니 그의 아버지가 남긴 유품 같았다.

“아버지가 남긴 일기에 따르면, 우족의 수장은 아버지에게 위험한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그게 네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이 있나 보군.”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던 것 같으니까요.”

“직접 보겠다. 그 내용이 적힌 페이지를 펼치도록.”

황지호의 말에 리웨이가 바로 페이지를 넘겼다.

몇 번이나 다시 읽었던 걸까, 리웨이는 몇 페이지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전부 기억하는 것 같았다.

리웨이가 펼친 페이지를 읽던 황지호의 눈빛이 조금 흐려졌다.

“터무니없는 내용이지만, 부정할 수 없군. 비슷한 짓거리를 하려던 놈들이 한반도에도 있었고, 우마왕이 쓰던 힘도 있었으니.”

“무슨 내용이 적혀 있습니까?”

적호의 질문에 황지호가 답했다.

“우마왕은 상위 존재의 힘을 빼앗으려는 시도를 했다. 염제 신농의 가호를 받고, 광림으로 이어진 인간을 매개로 염제의 힘을 앗아 가려 했더군.”

“그런 터무니 없는 짓을……!”

“터무니없지 않다. 우마왕은 신에 가까운 존재였던 구갈안나의 힘을 빼앗아 사용하지 않았더냐.”

황지호의 말대로였다.

구갈안나는 신화 속에서 신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던 하늘의 황소 아니던가.

구갈안나가 마음먹으면 언제든 상위 존재로 오를 수 있었을 거다.

그리고 우마왕과 비슷한 짓을 하려던 집단이 한국에도 있었다.

그들은 강력한 힘을 지닌 진족으로부터 힘을 강탈한 후, 치유의 신으로부터 가호를 받고 광림으로 이어진 플레이어를 대상으로 흉계를 꾸몄다.

‘무지기를 감금하고, 유상희를 협박하던 TC 연구소 건과 비슷해.’

상위 존재를 인공적으로 강림시키려던 프로젝트의 진정한 목적은 따로 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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