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37)
93. 손님 (9)
저 호랑이가 김신록의 광림의 결정체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번개를 두르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불꽃을 두른 홍룡을 생각하면 이상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대체 언제, 어디에서 소환을 한 거지?’
염준열이 광림을 사용할 때에는 아공간의 틈이 벌어지고, 그 틈에서 홍룡이 나타난다.
그 과정에서 빛과 이능파, 열기 등이 발산되어 그 주변에 있다면 바로 알게 된다.
홍룡소환은 화려하고 범용성이 큰 기술이지만 그만큼 은밀한 행동은 어려워진다.
그에 비해 김신록이 불러낸 뇌호(雷虎)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홍룡 위에 올라타지 않았다면 염준열도 눈치채지 못했겠지. 마치 적연을 사용한 적호 같다.’
김신록이 불러낸 뇌호는 적호가 사용하는 적뢰를 품은 것처럼 붉은 번개를 두르고 있었고, 적연을 사용한 것처럼 기척이 없었다.
기척은 죽여도 모습까지 감추지 못했기에 시야에 포착되긴 했지만, 저렇게 조용히 소환해 움직일 수 있다는 건 전투할 때 매우 유리한 수로 활용할 수 있을 거다.
“조의신 군, 제 광림을 본 소감은 어떻습니까?”
뇌호에 시선을 준 사이 김신록이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도발이 지나치게 잘 먹힌 걸까, 김신록의 사기가 매우 높아 보였다.
김신록이 발을 디딜 만한 벽을 화염술로 태워 견제를 하고 홍룡의 힘을 모으고 있자니 저쪽에서 말을 걸었다.
“이번에도 호족의 힘으로 저를 막으실 겁니까?”
김신록이 광림을 사용하는 데에 성공했으나 후예로서의 약점은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다.
김신록을 이기는 건 간단했지만, 굳이 그 약점을 노릴 필요는 없었다.
“아뇨, 목표는 달성했으니까요.”
화르르륵! 파지직!
뒤에서 홍룡과 염준열이 부른 불꽃과 뇌호의 붉은 번개가 맞부딪쳐 폭발을 일으켰다.
홍룡이 자신의 몸에 올라타려는 뇌호를 떨쳐 내기 위해 거세게 몸을 뒤틀었으나, 역부족이었다.
불에 타는 것도 개의치 않고 뇌호는 홍룡에 올라타 염준열을 향해 발톱을 뻗으려 했고, 이에 염준열은 화염술로 대항했다.
그사이에도 홍룡과 뇌호가 각각 두른 불꽃과 번개가 충돌하여 간헐적으로 열기와 빛을 뿜어 댔다.
‘염준열을 도우러 가야 하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
염준열과 함께 상대하던 김신록을 혼자 상대하게 되었으니 여유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에도 김신록이 던진 압정이 내 머리카락을 스치고, 비도가 홍룡의 화염을 베고 있었다.
“이런!”
뇌호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염준열은 홍룡을 급강하시켰다.
이대로는 뇌호에게 당할 테니 홍룡에게 상대를 맡기고 일단 염준열은 내릴 생각인 거다.
하지만 뇌호가 이를 두고 보지 않았다.
크르르르!
뇌호가 크게 울부짖으며 번개의 출력을 높였다.
멀리서 보고 있는데도 눈이 아플 정도로 강렬한 빛이 수련장을 뒤덮었다.
소리도 기척도 없이 나타난 조용한 호랑이가 뿜었을 거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번개였다.
땅에 착지한 염준열을 보호하기 위해 홍룡이 뇌호의 몸을 휘감았다.
그러자 뇌호가 부른 붉은 번개에 홍룡이 작렬하였고 힘이 다해 강제로 소환이 해제되었다.
염준열이 허공에 녹아들듯 사라진 홍룡을 망연자실하게 보다가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파직, 파지직…….
뇌호는 홍룡의 방해가 사라지자 이번엔 염준열을 향해 걸어갔다.
바로 달려들지 않는 게, 마치 몰아넣은 사냥감을 어떻게 물어뜯을지 고민하는 호랑이처럼 보였다.
홍룡을 지워 버린 번개보다 더 짙은 이능파를 머금고 있었다.
염준열은 침착하게 화염술로 대항할 생각이지만, 홍룡도 녹여 버린 번개를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저 번개를 염준열에게 쏟을 생각인가?’
염준열은 졌다.
그리고 나 역시 상보심금파를 사용하거나 백호의 힘을 사용하지 않는 한 질 것이다.
승패는 기울어졌는데, 김신록의 부른 뇌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움직임이 이상해진 건 뇌호뿐만이 아니었다.
“김신록 선생님?”
“으…….”
홍룡이 사라진 직후부터 김신록의 몸놀림이 둔해졌다.
비도가 미처 지우지 못한 불꽃이 김신록의 옷자락을 그을리고, 김신록이 조금 비틀거렸다.
집중해서 보니 이능파가 흐트러져 있었다.
‘설마 오랜만에 다루는 광림이라 부하가 온 건가.’
홍룡보다 더 거세게 날뛰는 뇌호를 부리는 건 쉽지 않을 거다.
김신록은 뇌호를 부른 게 오랜만인 데다 나를 상대하면서 홍룡과 싸웠다.
어쩌면 지금 저 뇌호는 김신록의 제어에서 벗어난 건지도 모른다.
플마고 속에서 염준열이 폭주를 일으키기 전, 홍룡이 제어에서 조금 벗어난 듯한 행동을 보일 때가 있었다.
에너미의 공격을 지시했는데, 필요 이상의 이능파를 소모해 공격을 하거나 주변에 있는 오브젝트나 필드를 전부 태워 버리는 등, 플레이어의 의사와 관계없이 홍룡의 움직이는 게 그러했다.
나는 즉각 김신록을 상대하는 것을 관두고 홍룡을 타고 염준열을 향해 강하했다.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합니다.〉
쉬이익!
목적을 달성해 사용하지 않을 작정이었던 무명의 운명 카드를 다시 꺼내 백호군의 힘을 발동했다.
백호군의 힘을 빌려 뇌호를 막을 생각이었지만, 거리가 있는 데다 뇌호가 지나치게 빨라서 막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염준열은 마지막까지 싸울 생각이었는지 화염술을 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방해하기 전에 염준열을 공격할 생각인 건지, 뇌호가 번개를 발산했다.
파아아아앗!
내가 뇌호 앞을 막는 것보다 빛이 시야를 뒤덮은 게 먼저였다.
힘이 발동한 후라면 근원이 연결된 진족이 뒤늦게 후예를 막는다 해도 힘의 여파가 사라지진 않는다.
충격을 각오하고 염준열의 앞을 막았을 때였다.
그러나 예상한 충격은 오지 않았다.
슈우우우…….
빛이 가라앉자 누군가가 앞을 막아선 게 보였다.
황지호와 청룡이었다.
황지호의 결계가 뇌호의 움직임을 묶고, 청룡의 푸른 불꽃이 뇌호의 번개를 상쇄했다.
“대련은 여기까지다. 수고 많았다.”
철없어 보이던 황지호와 청룡이 수장답게 행동하며 안심감을 주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한편 번개를 쏟아 내고, 대련이 중지되자 김신록이 진정한 건지 안색을 바꾸고 이쪽으로 달려왔다.
김신록은 염준열이 무사한 걸 확인하고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그사이에 뇌호는 귀를 접고 이쪽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죄송합니다. 지나쳤습니다.”
“아니에요. 김신록 선생님께 많이 배웠어요. 대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호가 만일의 경우는 벌어지지 않을 테니 양보 없이 싸우라고 말하지 않았나. 나도 동의했고, 준열이도 그 말을 들었다.”
청룡은 마음에 두지 않는 것 같았고, 염준열은 좋은 대련을 해 줘서 감사 인사를 하기도 했으나 김신록의 마음은 편해 보이지 않았다.
김신록은 염준열이 크게 다칠 뻔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는 건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황지호는 김신록을 두둔하지는 않았으나 적절히 이야기의 흐름을 바꾸었다.
“덕분에 김신록이 뇌호를 불러내었다. 감사를 표해야겠군. 고생 많았다.”
“대련은 의신이가 다 해서 한 것 없이 가르침만 얻어 간 기분인데…….”
염준열은 나를 보며 웃다가 표정과 말꼬리를 흐렸다.
염준열과 뇌호 사이를 막고 공격을 받으려 했던 게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하지만 나는 호족의 힘을 쓸 수 있어 뇌호의 힘이 발동된 후라도 염준열보다는 영향을 적게 받을 테니 최적의 선택이었다.
결과적으로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니 잘못된 건 없었다.
“의신아, 나를 또 감싸려 했구나.”
또?
방송국 사건을 말하는 건가.
그때 용제건 대신 공격을 받았으니 염준열을 감쌌다고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전체적으로 따졌을 때 염준열을 구하는 수의 일환이긴 했지만.
염준열은 뭐가 불만스러운지 또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그전에 황지호가 말했다.
“너희도 그만 나오도록.”
황지호가 말하는 너희는 누구지?
은련관에 우리 외에도 누가 더 있단 말처럼 들렸다.
뇌호가 기척을 숨기고 나타난 직후, 주변을 경계했지만 별다른 건 느끼지 못했는데, 황지호가 괜한 소리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뇌호보다 더 기척을 잘 숨기면서 은련관에 출입이 가능하고, 이 자리에 부를 만한 누군가.’
답은 금방 나왔다.
스으으으.
백호군 주변에서 붉은 안개가 피어오르다 흩어졌다.
붉은 안개가 걷히자 울컥한 표정의 적호와 황홀한 얼굴을 한 용제건이 보였다.
저 둘은 적연으로 몸을 감추고 계속 이 대련을 지켜보고 있었나 보다.
김신록을 놀래켜 주기 위해 숨긴 걸까.
그런데 대체 왜 나한테까지 숨긴 거지?
처웃을 기세로 이쪽을 보는 황지호를 보니, 그저 내 반응을 보려고 숨겼나 싶다.
“……어?”
김신록은 저 둘이 저기에서 나타날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건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김신록은 그냥 망연하게 서 있었으나 눈치 없게도 그의 힘을 구현한 존재, 뇌호는 아버지를 발견하고 냉큼 그쪽으로 달려갔다.
뇌호는 적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그를 올려다봤다.
김신록은 뇌호의 소환을 해제할 생각을 못 하는 건지 당황스러워했다.
“우리 아들의 광림을 보게 되는 날이 오다니……!”
적호는 감격에 겨워하며 뇌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뇌호는 눈을 감고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파직.
뇌호는 번개를 두른 탓에 적호의 손바닥에서 스파크가 일어났다.
적뢰를 다루는 적호에게 번개 내성이 조금 있는 건지, 손이 타들어 가지는 않았다.
그래도 손바닥에 이능파라도 감고 쓰다듬는 게 좋을 텐데 적호는 꿋꿋하게 맨손으로 뇌호를 쓰다듬었다.
“신록이가 부르는 호랑이는 오랜만에 보네.”
용제건은 적호에게 쓰다듬어지고 있는 뇌호의 옆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꼬리를 쿡쿡 찌르려 했다.
뇌호는 용제건의 찌르기 공격이 귀찮은 건지 꼬리를 휙휙 휘둘러 손을 치우려 했다.
물론 용제건은 손을 치우지 않았다.
얼굴이 벌게져서 뇌호를 보는 김신록과 어이없어하는 나를 두고 황지호가 처웃었다.
“하하하! 놀랐나? 모처럼 김신록이 광림을 쓸 예정인데, 적호가 직접 보지 않으면 아깝지 않겠나. 하나 김신록이 긴장할까 봐 모습을 감출 것을 권했다.”
“그런데 용제건 선생님은 왜?”
내 질문에 답한 건 용제건이었다.
“우연히 적호 씨의 계획을 알고 나도 같이 가면 재밌겠다 싶어서.”
우연히 알아냈을 리가.
보나 마나 염준열이 호족으로부터 초대를 받자 무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여기저기 찔러 보고 다닌 게 틀림없었다.
그러다가 적호와 대화를 하고, 용제건 특유의 화법으로 계획을 알아내 동참한 것 같다.
리플레이 이후 적호는 용제건을 유하게 대했으니까 승낙했을 거다.
‘저 둘이 보이지 않았던 게 약이 된 건지, 독이 된 건지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김신록이 광림을 다루게 됐으니 잘된 걸까.’
김신록이 광림을 오랜만에 사용했기에 사고가 일어날 뻔했지만, 한 번 불러냈으니 요령을 얻으면 금방 늘 것이다.
지금 기세를 보면 염준열보다 더 능숙하게 소환 광림을 다루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 후예가 다시 광림을 사용하게 된 기념으로 축하연을 열 생각이다. 저녁 일정이 없으면 함께하지.”
어차피 오늘 더 대련을 하는 건 무리였기에 황지호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김신록을 다독일 겸, 다 같이 저녁 식사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황지호는 한마디 덧붙였다.
“축하할 이는 많을수록 좋겠지. 용족의 손님 외에도 우리 호족의 새로운 일원도 부르겠다.”
새로운 호족의 일원은 한 명밖에 없다.
황지호는 용족들에게 안다인을 소개할 모양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