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38)
93. 손님 (10)
갑작스러운 초대였으나 용족 손님들은 모두 응했다.
‘미리 초대하는 건 어려웠겠지. 오늘 김신록이 성과를 내지 못했으면 축하연이고 뭐고 없었을 테니까.’
대련했던 셋이 환복을 마친 후, 황명호 대저택으로 향했다.
대문을 넘기 전, 청룡이 말했다.
“황호와는 오래 알고 지냈지만, 이 저택에 발을 들이는 건 처음이군.”
청룡에 이어 용제건도 말했다.
“신록아, 나 말고 다른 용이 온 건 처음이지?”
“몰라.”
“그래, 이 저택을 방문한 다른 용에 관해선 모른다는 거구나.”
용제건은 자신 외에 이곳에 방문한 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김신록에게 물어봤다.
그야 없는 게 당연했다.
황지호가 저택 출입을 허락할 만큼 신뢰하는 용이 있었다면 크리스마스 같은 큰 작전을 대비할 때 언급됐을 거다.
‘황지호는 주변에 관심이 없었나? 아니면 백호군과 친분이 있는데도 청룡을 경계한 걸까?’
황지호가 안내한 곳은 본채가 아닌 별채였지만, 저택 부지 안에 청룡을 포함한 용을 셋이나 들인 것만으로도 큰 결심을 했다고 본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여기에서 저 셋이 전력을 다해 공격해 온다면 저택이 무사하진 않을 거다.
이쪽은 신역이고 다른 호족을 동원하기 쉽다는 등의 홈 어드밴티지가 있으나 피해는 나올 것이다.
특히 저택에 체류 중인 은호와 그 후예들, 안다인 가족이 화를 입을 가능성이 컸다.
황지호는 청룡을 믿고 저택 안으로 들인 것이다.
“용족은 호족의 정예들을 용궁에 들일 예정이다. 용궁은 용왕신과 가장 가까운 장소 아닌가. 그러니 이쪽도 신의를 보여야겠지.”
곧 용궁에 가는 걸 생각해서 호족도 청룡을 한 번 초대했나 보다.
집단의 대표가 동맹을 맺은 상대의 영역에 번갈아 방문하는 건 큰 의미가 있으니 황지호 말뜻이 이해가 갔다.
“오늘 소개할 이들은 전원 은광고 소속이거나 그 예정이다.”
연회장으로 사용하는 원통형 별채의 문을 열자 별채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예상대로 그 자리에는 안다인 가족이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이도 있었다.
‘안다인하고 은호의 후예들이 있을 줄은 알았는데, 김유리까지 있었나.’
이 자리에는 죽호와 김유리도 있었다.
황지호가 중간에 서서 차례로 소개를 할 때까지 인사 외의 말을 꺼낸 이는 없었지만, 다들 생각이 많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특히 염준열은 학생회 후배인 두 사람이 왜 이 자리에 있는지 의문스러운 듯했다.
황지호가 안다인을 호족 부부의 아이로, 김유리를 호족 수석 주술사인 죽호의 제자로 소개했으나 염준열의 의문은 더 깊어진 것 같았다.
“다인이랑 유리는 그러니까…… 인간인 것 같은데…….”
“하하하! 사정이 있었다. 저 둘은 인간이지만, 호족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도록.”
염준열은 혼란스러워했지만, 사정이 있다는 말에 깊이 묻지는 않았다.
긴장하고 있던 김유리는 아는 얼굴이 보이자 마음을 놓고 이야기했다.
오늘 김유리는 스승인 죽호를, 안다인은 부모인 호족 부부를 소개했다고 한다.
서로 담소를 나누고 저녁을 함께할 예정이었는데, 황지호가 불러내 이 자리에 오게 된 듯하다.
김유리가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전달하고 있을 때, 이를 가만히 듣던 청룡이 말했다.
“죽호의 제자는 목련의 화신이로군.”
“……바로 알아보셨군요.”
청룡이 지적하자 죽호가 자연스럽게 김유리의 앞에 섰다.
마치 김유리를 보호하려는 것 같은 위치였다.
지켜보던 황지호가 끼어들어 말을 걸었다.
“한눈에 알아보는 걸 보니, ‘그쪽 능력’을 완전히 버리진 않았나 보군.”
“필요가 없어 쓰고 있지 않을 뿐, 버린 건 아니다.”
황지호가 말하는 그쪽 능력이란 물을 가리키는 걸 거다.
현재 청룡은 불꽃을 주로 다루지만, 청룡을 수신(水神)으로 보는 전승도 적지 않다.
청룡은 불과 물, 두 속성을 동시에 다뤄 용족의 수장에 걸맞은 사기급 능력자라 볼 수 있다.
그런 사기급 능력을 필요가 없다는 핑계로 쓰지 않는 이유는 명확했다.
바로 염준열이다.
‘염준열이 물에 약하니 쓰려고 하지 않는 거겠지.’
가랑비만 내려도 염준열보고 외출을 자제하라고 매달리는데 수장급의 능력자가 물을 써 댈 리가 없다.
하지만 김유리가 품은 힘에 관해 꿰뚫어 보는 걸 보니, 청룡의 말대로 물을 다루는 힘을 완전히 버린 건 아닌 것 같다.
청룡은 푸른 빛이 일렁이는 눈으로 김유리를 살피다 이능파를 거뒀다.
“호족 수석 주술사의 제자답게 힘은 잘 갈무리되어 있군. 하지만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 수련을 거듭하고, 그 광림을 사용할 때는 주변을 잘 살펴야 할 것이다.”
“네, 정진할게요!”
“대답이 시원시원해서 좋군.”
청룡이 호의적으로 말하고, 김유리도 밝게 답하자 죽호가 안심하고 물러섰다.
김유리 같은 힘을 품은 능력자가 염준열 주변에 있으면 당장 떼어 놓으라고 날뛸 것 같았는데, 황지호가 중개한 자리라서 그런지 청룡은 자신을 자제했다.
또, 앞서 염준열이 김유리와 친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던 것과 실제로 김유리가 힘을 어느 정도 제어하고 있어서 좋게 넘어간 것 같다.
“준열이 오빠…… 염준열 선배님은 학생회장이라고 들었어요! 학생회장은 무슨 일을 해요?”
“선도부랑 지익회 얘기도 궁금해요!”
“그래, 그러면 학생회 이야기부터 할까?”
은호의 후예들은 다른 진족의 후예는 처음 봐서 그런 건지 염준열을 잘 따랐다.
염준열은 후예 후배가 늘어난 게 기쁜 건지 다정하게 질문하는 것들을 모두 답해 주었다.
예상치 못한 자리였으나 참석자들이 각자 교류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물론, 이 축하연이 개최된 이유인 김신록의 광림 이야기가 가장 큰 화젯거리가 되었다.
―크르르르…….
영상 속의 뇌호가 목을 울리는 소리가 연회장에 퍼졌다.
축하연이 열리는 동안, 적호와 용제건이 촬영했다는 대련 영상이 공개되었다.
적연으로 숨어 있는 동안 그냥 지켜보기만 한 게 아니었나 보다.
영상은 한 각도로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저 둘은 디바이스를 여러 개 동원해 다양한 앵글로 동시에 촬영을 진행한 것 같았다.
“대련 영상을 촬영해 두면 아들의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멋진 모습이 찍힐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실물보다는 못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백호?”
“그렇군.”
“영상이 불필요할 만큼 아들이 좋은 성과를 냈으니 사실 아들에게 큰 도움은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만, 좋은 기록 자료가 되겠죠. 안 그렇습니까, 황호?”
“하하하하! 그렇다. 잘 찍었다. 그런데 이 몸이 준비한 디바이스에 비해 영상 숫자가 적은 것 같은데.”
“그건 따로 편집해 두었습니다. 디저트로 아들이 좋아하는 곶감을 먹을 때 공개할 예정입니다.”
호족 어르신들이 후예 자랑에 정신없었다.
후예 자랑에 정신이 없는 건 호족만이 아니었다.
“준열이의 성장이 느껴지는구나. 염방열과 훈련할 때보다 홍룡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어!”
“칭찬 감사합니다, 청룡 삼촌.”
청룡은 영상의 카피본을 나중에 보내 달라며 요청했고, 황지호는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염준열은 겸허하게 칭찬을 받아들이고, 영상을 보며 속으로 반성회를 하는 것 같았다.
판단이 아쉬웠던 부분이나 이능파 컨트롤이 미숙한 순간을 체크하는 성실한 모습에 좋은 제자를 뒀음을 실감했다.
“김신록 선생님이 부른 뇌호는 호족의 후예다운 멋진 광림이에요. 자연계 이능까지 다루시다니…….”
“응, 그렇지? 얼마나 감동했는지 적호 씨는 촬영에 집중하지 못하더라고. 그래서 지금 나오는 부분의 영상은 내가 대신 찍었어.”
안다인은 김신록의 활약을 보며 매우 기뻐하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의 활약을 보는 게 기쁜 건지 어색할 수도 있는 자리에서 연신 웃고 있었다.
심지어 용제건이 장난스럽게 말을 걸어도 평소 보이던 경계심 없이 솔직하게 답을 했다.
이 장소의 분위기, 절친의 태도를 보며 김유리는 초반에는 살짝 당황했지만, 빠르게 적응했다.
“아하하, 다인이가 좋은 가족과 선생님을 둬서 다행이야.”
“응, 김신록 선생님은 같은 호족이니 가족이기도 해.”
하지만 이 장소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바로 김신록이었다.
김신록은 축하연이 끝날 때까지 영상을 보며 정신을 못 차렸다.
김신록이 초연한 표정으로 현실을 무시하려 할 때마다 용제건이 장난질을 걸어 정신을 들게 했다.
영상의 마지막에는 적호의 쓰다듬을 받는 뇌호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는데, 김신록은 차마 영상을 주시하지 못했다.
다들 그런 김신록을 보며 흐뭇한 얼굴을 했다.
‘호족 부부도 김신록을 보면서 저런 표정을 짓다니. 적호를 보는 심정은 좀 복잡해 보이긴 한데……’
호족 부부는 김신록을 받아들이긴 했어도 적호는 어떨지 모르겠다.
호족 부부와 적호는 축하연이 파할 때까지 서로 말을 주고받는 일이 없었다.
* * *
은광고에는 봄방학이 없다.
그래서 중간에 등교하는 일 없이 겨울방학이 이어졌다.
방학 중에는 2학년에 벌어질 일들을 준비하느라 대부분 호랑이 저택과 은광고에서 보냈는데, 외출을 아예 안 한 건 아니었다.
막 2월이 되었을 때, 방학 때 만나기로 약속한 이들을 보러 갔다.
장남욱과 유상훈이었다.
“주오 드래곤즈에서 스프링캠프를 시작했는데, 훈련 과정을 공식 채널에서 공개하는 중이야. 아쉽게 우승을 놓쳐서 사기가 많이 떨어졌을까 봐 걱정했는데, 선수단 분위기가 좋았어.”
장남욱은 예나 지금이나 말이 많았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자마자 우리의 안부를 묻는 데 30분을 쓴 장남욱은 이번엔 주오 드래곤즈에 관해 이야기하느라 바빴다.
주오 드래곤즈 하니 만년 꼴찌인 TC 나이츠가 받은 예언이 떠올랐다.
‘예언가 우기환의 말에 의하면 TC 나이츠는 앞으로도 꼴찌라는데.’
야구팬 옥토연은 가끔 디바이스로 ‘올해는 다르다!’라며 희망 회로가 가득한 메시지를 보냈다.
작년에 신인 드래프트로 지명한 선수가 괜찮은 투수인데 가을야구를 생각할 만하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내용이었다.
예언을 전해 줘서 희망 고문을 끝내 주는 건 가혹한 건지, 자비로운 건지 구분이 안 갔다.
“야, 빨리 가자.”
“아, 응. 말이 좀 많았네. 벌써 입장할 시간이 되었구나.”
오늘은 유상훈의 희망대로 프로 농구를 관전하러 왔는데, 그리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장남욱은 눈치를 봤지만, 나는 대놓고 묻기로 했다.
“무슨 일 있어?”
내가 묻자 유상훈은 느리게 답했다.
“졸업식에 기분 더러운 일이 생길 것 같다.”
“졸업식? 아, 은광고 졸업식은 2월이지. 상희 누나 축하드리러 가야겠다. 꽃 같이 사러 가자.”
보통 고등학교는 보통 1월 말이나 2월 중순에 졸업식을, 3월에 입학식을 하고 은광고도 마찬가지다.
이와 달리 사관학교는 2월 말에 입학식, 진학식을 한 후 3월 초에 졸업 및 임관식을 한다.
사관학교는 아직 여유가 있지만, 은광고는 졸업식이 바로 앞까지 다가온 셈이다.
그런데 졸업식에 기분 나쁜 일이 벌어질 것 같다니, 무슨 사건이라도 터지는 건가?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대비해 둘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아, 됐어.”
유상훈은 뭐라 말을 하려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딱히 졸업식에 무슨 사건이 벌어질 기미는 없고, 은광고 졸업식의 경비는 호족이 직접 담당하니 별일 없을 텐데.
일단 경계를 해 둬야 하나 싶었지만, 유상훈은 그런 게 아니라며 계속 툴툴거렸다.
‘뭐 어떻게 하라는 거지.’
졸업식에 유상훈이 싫어하는 일이 벌어지는 걸까?
하지만 말을 안 하면 대처할 수 없다.
유상훈의 나쁜 기분은 다행히 농구 경기가 진행되며 풀렸다.
한국프로농구는 10월부터 4월 사이 정규 시즌의 6라운드, 재편성 경기, 플레이오프, 챔피언 결정전을 거쳐 우승팀을 결정한다.
오늘 경기는 5라운드 시점 1, 2위 팀이 벌이는 역사 깊은 클래식 더비로, 플레이오프에서 자주 마주치는 두 팀의 라이벌 매치였다.
클래식 더비라는 이름답게 이날은 한자로 이름을 새긴 유니폼을 입고 경기했다.
경기 결과는 유상훈이 응원하는 농구팀의 대승이었다.
‘기분은 나아진 것 같은데, 졸업식 얘기만 하면 좀 이상해지네.’
유상희가 졸업해서 쓸쓸해지기라도 한 걸까?
일단 뭔 일이 터질지 모르니 졸업식을 잘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2월 4일.
염준열의 생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