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45)
94. 용반호거 (7)
용제건은 몹시 신나 있었다.
얼굴만 척 봐도 알 수 있었지만, 등장한 시간을 봐도 용제건이 얼마나 신났는지 알 수 있었다.
‘약속한 시간보다 많이 이르게 왔는데.’
용제건은 용족과 합류하기로 한 시간보다 세 시간 이르게 왔다.
소풍 날이 되면 설레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잠을 못 자다가 새벽에 등교하는 아이 같았다.
용제건의 나이를 생각하면 아이에 비유하는 게 좀 그랬지만 하여튼 지금 모습은 딱 그 꼴이었다.
아직 시간이 안 됐으니 꺼지라고 문전박대당할 수도 있을 텐데, 잘도 이 시간에 왔다.
‘용제건이 아니라면 쫓겨났겠지.’
물론, 황지호가 김신록의 유일한 친구를 쫓아낼 리가 없었고 용제건은 이를 잘 알고 이용해 먹었다.
황지호는 용제건을 질린 얼굴로 보다가 차를 권했다.
“왔으니까 앉도록. 차나 마셔라.”
“응, 잘 마실게.”
“조의신, 너도 앉아라.”
이 상황에선 같이 마실 수밖에 없겠지.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아 황지호가 준비한 차를 마셨다.
오늘의 모닝 티는 생강을 저미고 꿀로 조린 편강을 우려낸 차로, 알싸한 맛이 났다.
‘생강은 겨울에 잘 먹긴 하지만 제철이 아닌데 의외네.’
생강으로 만든 차는 멀미에 좋다는데, 용궁으로 향하는 호랑이들을 위해 준비한 건지도 모르겠다.
용궁으로 향하는 방법은 제대로 듣지 못했으나 이런 차를 준비한 걸 보면 멀미가 날 수도 있는 방법으로 가는 걸까.
차를 마시면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용제건이 불쑥 말을 걸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차의 단맛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의신아, 요새 기숙사에 없다면서? 황호 씨네 저택에서 계속 살 거야?”
내가 기숙사에 머물지 않는 걸 알고, 지금 여기에 있는 걸 보면 당연히 할 법한 생각이었다.
지나치게 이른 시각이라 기숙사에 있다가 일찍 출발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용제건은 내가 기숙사에 머무는 중이 아니라는 걸 어디에서 주워들은 걸까.
용제건이 불필요한 정보를 취합하여 이상한 소리를 했다.
그런데 듣고 있던 황지호는 더 심한 헛소리로 받아쳤다.
“물론, 이 몸은 언제든지 환영이다. 본채에 머무는 걸 권장하지만, 조의신 네가 원한다면 별채 하나를 네 전용으로…….”
“그럴 예정은 없는데요.”
“그래?”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기 전에 차단했지만, 용제건은 만족스러워하며 히죽거렸다.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미 늦어 있었다.
“의신이는 방학 내내 황호 씨네 저택에서 지냈나 보구나.”
승천 직전에도 용제건 화법은 여전했다.
저 화법에 걸리지 않으려면 내가 할 말만 하거나 아예 무시해야 하는데, 나는 차마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무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용제건은 사직서를 제출했다고는 하나 우리 반 부담임 교사가 아닌가.
용제건이 유희계 용족이긴 해도 자기 업무를 태만하게 방치한 적은 없어 무시할 만한 교사는 아니었다.
그 뒤로도 용제건은 내가 곤란해할 만한 헛소리를 몇 개 했는데, 황지호가 용제건에게 맞장구를 치는 일이 많아서 더욱 곤란해졌다.
황지호의 말은 흘려듣고, 용제건의 말에는 최대한 신중하게 답하며 대화를 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
그때, 용제건이 가장 즐겨 놀려 먹는 상대가 등장했다.
김신록이었다.
김신록은 용제건이 왜 이렇게 이른 시각에 본채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 굳어 있었다.
김신록의 정지된 사고 회로가 다시 움직일 때까지 용제건은 싱글벙글 웃으며 지켜봤다.
용제건의 시선을 받고 울컥한 김신록은 곧 정신을 차렸다.
김신록이 정신을 차리자 용제건은 새로운 타깃을 향해 말을 걸었다.
“신록이도 여기서 잤구나. 호족들과 많이 친해졌나 보다.”
“…….”
김신록은 무시했지만, 용제건은 꿋꿋하게 말을 걸었다.
“내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만큼 호족들과 잘 지내고 있나 봐.”
“뭐라는 거야.”
“신록이가 황호 씨네 저택에서 방학 내내 먹고 잘 만큼 친하게 지낸다고 말하고 있어.”
차라리 계속 무시했으면 좋았을 텐데, 용제건의 말을 무시하지 않은 대가는 컸다.
용제건은 맞는 말을 하긴 했지만, 김신록이 듣기에는 상당히 불편한 말이었다.
수천 년간 벌어져 있던 거리가 1년 만에 메워졌는데 마음이 쉽게 따라올 리가 없었다.
용제건의 말을 들은 김신록이 기가 막히는 듯 뭐라 말하지 못했다.
조용히 나타난 적호가 말했다.
“황호의 저택에는 오래전부터 아들의 방이 있었습니다.”
“적호, 네 방도 있었지. 밖에 나도느라 도통 오질 않았지만.”
“바빴습니다. 제 아들도 바빴죠. 성실하고 다망한 제 아들이 일하느라 바빠 교직원 사택에 머문 겁니다.”
황지호가 한마디 하면서도 적호 몫의 차를 내밀었다.
황지호의 말에 의하면 결국 적호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호랑이 저택에 오질 않았던 모양이다.
부전자전 아니랄까 봐 아버지나 아들이나 똑같았다.
황지호와 적호가 옛일을 가지고 투닥거리는 걸 두고 용제건이 한마디 얹었다.
“응, 신록이가 많이 바빴지. 일부러 바쁘게 살기도 했고.”
별말 아닌 것 같지만 날카로운 말이었다.
용제건의 말뜻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김신록의 일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호족의 일에 연루된 자의 고문.
다른 하나는 은광고 교사로서의 업무.
둘은 성질이 크게 다르지만 결국은 전부 호족과 관련되어 있고, 호족을 위한 일이었다.
‘김신록은 호족의 인정을 받기 위해 바쁘게 지낸 거겠지. 황지호의 권유를 부담스럽게 느껴 피할 겸.’
용제건이 한 말의 속내를 알아차린 건지 황지호와 적호가 말을 멈췄다.
승천을 앞둬서 그런 건지 용제건은 거침없이 굴었다.
김신록은 용제건이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한 건지 파악을 제대로 못 한 걸까.
처음과 다름없이 용제건을 노려보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제 덜 바쁘게 잘 지내서 다행이다. 그렇지?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
“물론입니다. 아들과 저는 친하게 지낼 겁니다.”
적호가 단언하자 용제건이 기분 좋게 웃었다.
적호의 대답에 안심했고 이 상황이 아주 즐거워서 저러는 걸 거다.
기분이 좋다 못해 하늘을 찌를 기세인 용제건이 좋아 죽는 일은 또 발생했다.
출발 직전, 인사하러 온 이 중에 안다인이 포함되어 있던 게 그러했다.
“안녕하세요, 용제건 선생님.”
“그래, 다인이 왔구나. 정말 호족의 일원이 됐구나.”
“네, 저는 호족이니까요.”
안다인은 성실하게도 오전 훈련을 마치고 은호의 후예들과 등장했다.
안다인은 고된 훈련을 마친 듯 이능파와 체력이 상당히 소모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곧게 서 있는 모습이나 정돈된 외관만 보면 피로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과연, 플마고의 완전무결한 초인 히로인이라 불릴 만한 모습이었다.
‘호족 부부가 봐주질 않나 보네.’
일상생활 중에선 호족 부부는 안다인을 아기 다루듯이 애지중지하지만, 전투 훈련은 전혀 달랐다.
호족 부부는 신화 시절부터 전쟁을 경험해 왔고, 지금도 전시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안다인의 가능성을 알아본 호족 부부는 그녀의 잠재 능력을 이끌어 내기 위해 거칠게 밀어붙였다.
한 번 안다인을 잃은 경험이 있었기에 호족 부부는 그녀를 강하게 키우기로 마음먹은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안다인은 그 정도의 훈련에 지지 않아.’
처음엔 안다인이 훈련 중에 다치는 건 아닐까 조금 걱정하긴 했다.
그러나 막상 훈련을 시작해 보니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다인은 호족 부부가 요구하는 것 이상의 성과를 냈다.
훈련을 마칠 때마다 안다인이 훈련의 난이도를 올려 달라고 부탁할 정도라 한다.
호족 부부가 나를 볼 때마다 그런 내용의 안다인 자랑을 하는데, 타이틀 히로인의 늠름한 모습에 나도 덩달아 뿌듯해졌다.
“김신록 선생님이 일주일간 자리를 비우신다고 들어서요. 인사드리러 왔어요.”
“……감사합니다.”
“…….”
김신록이 딱딱하게 답하자 안다인이 슬퍼하는 얼굴로 응시했다.
김신록은 제자를 슬프게 할 마음이 없었는지 크게 당황해서 말투를 고쳤다.
“……고, 고맙구나.”
“아니에요, 은사이자 가족인 김신록 선생님이 자리를 비우는데 인사하러 오는 건 당연하죠.”
안다인이 부드럽게 웃으며 답하고 김신록이 쑥스러워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용제건이 아주 즐겁게 지켜봤다.
안다인은 떠날 예정인 이들에게 하나씩 인사했다.
무려 나에게도 인사를 해 줬다.
“의신아, 조심해서 잘 다녀와.”
“응, 조심할게.”
은호의 후예들에게도 인사를 받고, 타이틀 히로인에게도 인사를 받아 사기가 몹시 올랐다.
안다인은 마지막으로 김신록에게 한 번 더 말을 걸었다.
“김신록 선생님, 성국언 선배님이 하셨던 말씀을 기억해 주세요.”
김신록은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조금 머뭇거리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안다인은 이에 만족하고 물러났다.
호랑이 저택을 나서고 1차 목적지인 붉은 사자 팀 빌딩으로 향하는 사이, 용제건은 계속 김신록을 졸라 댔다.
“신록아, 다인이가 말한 ‘성국언 선배님이 하셨던 말씀’이 뭐야? 나도 알려 줘.”
“……싫어.”
“그럼 본인한테 직접 물어봐야 하나.”
“그러든가.”
김신록의 정체를 아는 성국언이 뭐라 말했을지는 뻔한 거 아닌가.
용제건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 같은데.
아니, 짐작은 가도 김신록의 입에서 직접 그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걸까.
붉은 사자 팀 빌딩에 도착할 때까지 용제건은 계속 저랬다.
용제건은 아쉬운 척을 하며 김신록을 긁어 댔지만, 연신 웃고 있어서 조금도 아쉬워 보이지 않았다.
“자, 이 문을 나선 순간부터 호족과 의신이는 일행이 아니게 돼.”
리무진 문을 열기 전, 용제건은 마지막으로 확인을 하며 말했다.
호족과 나의 관계성을 배신자 앞에서 공공연하게 드러내지 않기 위해 작은 수를 뒀다.
호족과 나는 함께 초대된 게 아니라 따로 초대되었다는 설정이다.
“의신이는 내가 마음에 드는 은광고의 아이로, 용왕신께 부탁드려서 특별히 용궁 출입 자격을 받은 걸로 되어 있어.”
지금 배신자 색출과 용궁의 위기가 걸려 있는 상황이다 보니 언뜻 듣기에는 터무니없는 거짓말 같지만, 전부 진실이다.
용제건은 용왕신의 계시를 받을 때 나를 용궁에 초대하고 싶다 했고, 운명력이 발동하며 등장한 용왕신은 그 얘기를 꺼내며 내게 출입증 역할을 하는 비늘이 들어간 구슬을 건넸으니까.
“그리고 신록이는 내 친구라서 초대한 거고, 적호 씨는 신록이의 아버지로서 같이 온 거고.”
“확인했습니다.”
용제건이 갑자기 많은 이들을 초대한 셈이 되었다.
그래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용제건은 제가 즐거운 일이라면 괴짜짓을 서슴없이 해 댔으니까.
게다가 승천을 코앞에 두고 있으니 마지막으로 용궁에 마음에 드는 이를 부르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적호 씨, 용궁의 지도는 전부 외웠지? 유도는 하겠지만 ‘범위에 맞춰서’ 행동해야 하니까 조심해서 움직여 줘.”
“알겠습니다. 조의신과 제 아들과 따로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으니 주의해 주십시오.”
마지막 확인을 끝내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연 순간, 공기가 달라진 것 같았다.
붉은 사자 팀 빌딩 전체에 거대한 이능파가 흐르고 있었다.
결계가 쳐진 리무진 밖으로 나온 순간 황지호가 내 손목에 새긴 인장이 반응해 조금 욱신했다.
현재 이곳에는 이능파만 흐르고 있는 게 아니라 지력도 움직이는 중이라는 뜻이다.
“이쪽이야.”
용제건의 안내를 받아 지하 깊숙한 곳으로 이동했다.
저번에 붉은 사자 팀 빌딩에 방문했을 때보다 더 깊은 곳이었다.
황명호 대저택의 지하처럼 힘의 밀도가 점점 커졌다.
“어서 오게.”
푸른 용이 양각으로 새겨진 문을 열자 청룡이 기다리고 있었다.
청룡의 등 뒤로 다섯 명의 무녀가 원 형태로 서 있는 게 보였다.
오간색으로 빛을 두른 무녀들 사이에 거대한 힘이 휘몰아쳤다.
그 힘의 정체는 용궁으로 향하는 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