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64)
96. 오룡쟁주 (7)
운명력의 발동과 동시에 나타난 세 용은 인사를 받자 만족스러워했다.
[용족의 은인은 인사성이 밝군. 인간에게 인사받는 게 대체 얼마 만인지…….]
[이렇게 예의 바른 아이인 줄 알았으면 저번에 용왕신을 따라 같이 보러 오는 건데.]
[은인을 만나러 가는 건데 용왕신께서 네 동행을 허락할 리가.]
[내가 어디가 어때서?]
구름 사이의 용들이 목소리가 큰 편이라 동시에 말하자 귀가 웅웅 울렸다.
대뜸 무슨 일로 불러냈냐고 물을 수 없어서 셋이 잡담을 멈추는 걸 기다리기로 했다.
기다리는 사이 용들을 관찰했다.
‘용왕신 정도는 아니지만, 셋 다 강한 힘이 느껴져. 그리고 호랑이와 비교해 봤을 때…….’
황룡의 말에 의하면 적호와 적룡이 닮은 구석이 있다는데 아직 잘 모르겠다.
적호의 젊은 시절이나 말버릇을 생각하면 훨씬 점잖게 느껴졌다.
그리고 백룡과 흑룡은 시답지 않은 말싸움을 하며 투닥거렸다.
서로 상대방의 용궁을 공격해 대며 말썽을 피우던 사이라던데, 승천한 후에도 여전한가 보다.
진중하고 듬직한 내 최후의 플레이어블 캐릭터 백호군과 백룡 사이의 공통점을 찾기 어려웠다.
황룡이 용족들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바람에 현실을 왜곡해서 보는 게 아닐까?
[모습을 바꾸는 게 좋겠어. 올려다보느라 목이 아픈 것 같은데?]
시선을 받다가 뻘쭘해졌는지 흑룡이 말했다.
흑룡의 말에 백룡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적룡은 대답하는 대신 몸으로 구름을 움직였다.
적룡에 이어 흑룡, 백룡도 몸에 구름을 휘감았다.
휘이이!
구름 사이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가 잦아들었을 때, 거대한 용들은 사라져 있었다.
그 대신 눈을 가린 이들이 서 있었다.
용들은 승천한 후에도 사람에 가까운 형태를 취할 수 있던 모양이다.
세 용은 각각 붉은 옷, 검은 옷을 입은 여성 둘과 흰 옷을 입은 남성의 모습을 했다.
‘적룡과 흑룡은 여성, 백룡은 남성이구나.’
용의 모습을 할 때에는 비슷해 보였는데, 사람의 형태를 취하니 닮은 구석이 거의 없었다.
적룡은 적호와 비슷할 정도로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지만, 흑룡과 백룡은 땅에 닿을 정도로 머리카락이 길었다.
흑룡과 백룡, 둘 다 머리가 긴 편이었으나 백룡의 머리는 잘 정돈되어 있어 세 용을 실루엣만으로도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 이 모습이 편하네. 본신으로 돌아가면 힘의 제약이 없어져서 좋은데, 공간의 제약이 커지니 불편해.]
[용왕신께 어울리는 모습은 용이라고 한 건 너다. 안 그렇나, 흑룡?]
[용왕신을 뵐 때는 용의 모습을 취할 거야. 그런데 적룡은 볼 때마다 용의 모습을 하고 있었잖아.]
그럼 왜 지금 나타날 때 용의 모습을 한 걸까.
주변에 용왕신이 있는 것도 아닌데.
흑룡은 말이 많았기에 그녀가 하는 말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오늘은 특별히 용의 모습을 했던 거야. 용족의 은인이 내가 용이라는 걸 바로 알아봐 줬으면 했거든!]
그런 이유 때문에 불편을 감수하고 용의 모습을 한 건가.
딱히 지금 모습으로 나타났어도 장소와 옷차림을 고려하면 바로 알아봤을 거다.
밝고 솔직한 흑룡은 윤여랑과 죽이 잘 맞을 것 같다.
[용족의 은인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 아!]
흑룡은 가까이에서 말을 걸고 싶은지 휘적휘적 내 쪽으로 걸어오려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밟고 넘어질 뻔했다.
그래도 흑룡은 일단 상위 존재라 그런지 밸런스를 잃지 않고 둥실 떠올라 넘어지는 꼴은 면했다.
백룡이 혀를 차다가 흑룡을 향해 흰색의 댕기를 던졌다.
자주 있던 일이었는지 백룡이 던진 이능파 섞인 댕기는 홀로 움직여 능숙하게 흑룡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묶었다.
[이해해라. 우리는 비록 상위 존재가 되었지만, 용왕신을 가까이에서 섬기기 위해 선택을 한 용이다. 스스로를 신이라고 여기기보다는 그저 용왕신을 섬기는 용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적룡이 둘이 하는 꼴을 보다가 말했다.
저 용들은 지금까지 만난 여러 상위 존재들 중에 가장 신답지 않긴 했다.
눈을 가리고 있고, 신격에서 오는 압박감이 좀 느껴지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상위 존재와 교류를 해 봤으니 알겠지만, 배알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지금도 저 밖은 자정이 막 지난 시각이겠지.]
적룡의 말대로 몇 번 경험해 봤기에 잘 알고 있었다.
상위 존재와 꽤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대화를 마치면 시간이 거의 흐르지 않았었다.
지금도 외부의 시간은 기껏해야 몇 초 정도 지나지 않았을까?
그 점을 알고 있지 않았더라면 여유를 부리는 용들에게 수를 써서 독촉했을 거다.
[용왕신께 해를 입힌 자가 황룡에게 쓴 수작은 알고 있겠지. 황룡은 오랜 시간 홀로 있었기에…….]
말을 하려던 적룡이 말을 멈췄다.
적룡의 얼굴이 눈에 띄게 험악해졌다.
적룡뿐만이 아니라 백룡도 흑룡도 표정이 굳었다.
‘용궁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자정을 기점으로 용궁에 무슨 일이 벌어진 듯했다.
이곳에선 시간이 거의 흐르지 않았기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감지하는 게 늦는 듯했다.
용들의 태도를 보았을 때, 이 순간 용궁에 습격이 가해질 것이라고 예상하여 나를 불러낸 게 아닌 건 확실하다.
흑막은 일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자 상위 존재도 예측하지 못할 정도의 초강수를 둔 거다.
적룡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적이 움직였다.]
“지금 적이 용궁을 공격 중인가요?”
[그렇다. 날이 바뀌자마자 이무기를 부르는 의식을 거행하고, 무녀들의 힘으로 용궁을 장악하려는 중이다.]
경악할 만한 사실이었지만, 이번 시나리오에 있어서 늘 최악의 사태를 상정하고 준비했기에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적룡은 현재 용궁에서 벌어진 일에 관해 설명했다.
설명에는 용궁의 색이 오간색으로 변했고, 무녀들이 용이 되려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한테도 그 의식의 여파가 오나 봐! 내 궁 색이 이상해지고 있어!]
[백룡궁이 자색으로 물들고 있다. 용궁을 이 정도로 더럽히고 있었다니.]
이무기를 부른 의식의 결과물이 지금 상위 존재와 만나는 이곳에도 미치고 있었다.
세 용을 상징하는 적룡궁, 흑룡궁, 백룡궁이 다른 색으로 물들어 용궁 내의 존재감이 흔들리는 것이다.
‘구름이 처음 봤을 때보다 옅어졌어.’
적룡, 흑룡, 백룡이 감고 있는 구름의 빛이 옅어졌다.
용궁은 용왕신이 아니라 이무기신이, 오방색의 용이 아닌 오간색의 무녀가 지배하는 공간이 되었으니 승천한 세 용의 힘이 약해지려는 것이다.
세 용은 상황을 파악한 후에 곧 침착함을 되찾았다.
용궁과 지상에 존재하는 용족들을 위해 결의를 굳힌 듯했다.
[아직 그들이 저지른 의식의 여파는 용궁에 한정된 상태다.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다.]
아직이라는 말은 일이 굴러가는 방향에 따라선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용궁의 거대한 힘을 제 것으로 삼고 용족들을 제압하면, 용궁 밖으로도 그들이 벌인 짓의 여파가 미치고 말 거다.
하지만 적룡은 포기하지 않았다.
[백룡, 흑룡. 어려운 부탁을 해도 되겠는가.]
적룡이 짧은 침묵 끝에 두 용에게 물었다.
백룡과 흑룡은 그 부탁이 무엇인지 묻지도 않고 흔쾌히 응했다.
[부탁하지 않아도 된다. 하겠다.]
[나도!]
적룡이 둘을 보며 입꼬리를 조금 올려 웃었다.
적룡은 마음이 가벼워졌는지 처음 만났을 때보다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원래 용족의 은인을 만나려던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상황이 달라졌구나.]
이 상황은 세 용이 의도한 게 아닌 듯했다.
운명력은 온전히 상위 존재의 의도로 발동하는 게 아닌 걸까?
상위 존재와 만나는 것 외에도 운명력은 다양한 형태로 발동하긴 했다.
장남욱이 아이템 카드를 한 장 더 건네 실기 시험에서 위기에 벗어나거나.
카드가 이끄는 대로 기숙사 창문을 열었다가 권레나를 구하게 되거나.
꽃잎을 따라 뛰어갔다가 염준열을 제자로 받게 되는 계기가 생기거나.
체스 대회에서 시간패당하기 직전에 반 아이들의 응원을 보게 되거나.
‘이번에는 상위 존재와 다른 건으로 이야기하려다가 새로운 수를 두게 될 것 같네.’
적룡이 제안을 하기 전, 백룡이 말했다.
[그 전에 황룡의 안위를 묻고 싶다.]
[맞아, 지금 황룡이 제일 위험하잖아. 그 이무기의 비늘에 잠식되어 있는데 이런 의식이 벌어졌으니까!]
청룡은 흑룡이 매정하다고 했지만, 매우 걱정하는 티가 났다.
백룡과 흑룡의 생각대로 황룡은 몹시 위험한 상태였다.
이무기의 비늘이 몸에 축적된 채로 지금 의식이 거행되었다면, 최악의 경우엔 이무기의 권속으로 전락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내가 수를 두지 않았다면 말이다.
‘승천한 용들은 용궁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부 알지 못하나 보구나. 상위 존재로서의 제약 탓일까, 용왕신이 용궁에서 멀어진 탓도 있겠지.’
나는 세 용을 안심시키기 위해 말했다.
“괜찮을 거예요.”
* * *
조의신을 배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변이 발생했다.
황룡궁이 불에 그을린 것 같은 유황색으로 변하는 것과 동시에 황룡이 비틀거렸다.
다급히 황룡을 부축한 김신록은 기척 여럿이 이쪽으로 가까이 오는 걸 느꼈다.
용궁의 무녀들이었다.
‘이토록 빠르게 공격하다니. 황룡의 상태는 좋지 않다. 내가 싸워야 해.’
김신록은 황룡의 등을 지지한 손으로 비도를 뽑을 준비를 했다.
무녀들이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 비도를 꺼내 공격할 생각이었다.
“살기가 느껴지는군요.”
용궁의 무녀들 사이로 유황이 등장했다.
유황을 본 김신록이 눈을 의심했다.
유황은 옷차림과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알아보지 못할 만큼 변모해 있었다.
유황의 피부 일부는 비늘로 덮여 있었고, 동공의 모양은 변해 있었다.
“황룡 님, 그 아이를 제압해서 넘겨주시겠습니까?”
유황은 마치 자신이 용족이라도 된 듯한 말투를 사용했다.
‘그 아이’가 자신을 가리키는 말임을 알고 김신록이 실소를 삼켰다.
“……지금 용제건의 친구를 해하라고 명하는 건가?”
“네, 저는 지금 이무기신을 대리하고 있답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무기신께 거역할 수 없지요.”
유황의 말투에서는 자신감이 넘쳤다.
몸에서 용의 힘이 넘치니 보이는 게 없는 듯했다.
“최근엔 손님의 제안대로 먹고 있는 게 있지.”
황룡은 유황의 헛소리에 답하는 대신 자신이 할 말을 했다.
황룡은 품에서 반쯤 조각난 비늘을 꺼냈다.
그 비늘을 본 유황의 동공이 세로로 더욱 크게 열렸다.
“용왕신의 비늘……!”
조의신은 황룡에게 무녀들에 관해 밝힌 후 어느 제안을 했다.
―이대로 몸에 이무기의 비늘을 남겨 둘 수 없어요. 그걸 없앴으면 해요.
―하지만 벽사로도 제거할 수 없었다.
―이무기의 비늘보다 더 강력한 걸 먹으면 돼요.
조의신은 자신이 용궁 통행증으로 받았다는 용왕신의 비늘을 건네며 그렇게 말했다.
황룡은 그 이후 조의신의 제안에 따라 용왕신의 비늘을 먹어 왔다.
그 덕에 지금도 황룡은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의신의 제안은 하나 더 있었다.
황운호에서 만났을 때, 조의신이 말했다.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적습이 발생할 수 있어요. 그때에는 이렇게 움직여 주셨으면 합니다.
조의신은 어디까지 밖을 내다본 걸까.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지만, 황룡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적습이 발생했으니 움직여야 할 때다.
조의신이 한 제안은 이러했다.
―용궁을 완전히 재구축해 주세요. 무녀들이 용궁에서 길을 잃을 정도로 낯설고 복잡하게요.
‘용족의 은인이 둔 수를 어그러뜨릴 수는 없다.’
황룡궁이 잠식되고 있어 몸도 가누기 힘든 상태였으나 황룡은 이능파를 끌어올렸다.
한 번에 소화시킬 수 없어 조금씩 먹어 온 용왕신의 비늘이 황룡의 힘에 응하듯 강한 빛을 내었다.
용왕신이 힘을 빌려주는 것 같아 황룡은 마지막 힘을 짜내었다.
고오오오……!
황룡에게서 뻗어 나간 구름이 용궁 전체를 뒤덮었다.
용궁의 색은 변하고 있었지만, 아직 완전히 변화를 마치지 않았기에 황룡의 권능은 멀리 닿았다.
쿠구구구구구!
구름 속에서 굉음과 함께 용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리가 멎었을 때, 용궁의 형태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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