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69)
96. 오룡쟁주 (12)
백룡궁의 중심.
무녀를 관찰하며 즐길 마음 만만이었던 용제건은 무녀들을 따라 백룡궁에 왔다.
무녀들은 복잡한 복도를 몇 번 통과하고, 갈림길에서 흩어지는 등 복잡한 움직임을 보여 용제건은 타깃을 줄여 따라다니기로 했다.
용제건은 자의 무녀와 그녀를 따르는 용궁의 무녀들을 추적해 백룡궁 중앙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어느덧 홀로 서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의 무녀를 비롯한 모든 무녀들이 용제건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를 따돌리다니 제법이네. 무녀의 기척은 느껴지는데, 보이지 않아.’
기척을 따라 무녀를 찾으려 했지만, 좀처럼 되지 않았다.
백룡궁은 다른 궁에 비해 공기가 무거운 기분이 들었고, 기척을 쫓으려 해도 금방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용과 유사한 기운의 무언가가 용제건의 감각을 어지럽혔다.
‘황룡에게 먹인 이무기 비늘을 쓴 건가? 어제까지는 이 정도로 심하진 않았는데.’
누군가가 용제건 쪽으로 다가왔다.
무녀들이 아니라 용궁에 동행한 용족들이었다.
용왕신의 무녀들을 은밀히 감시하기로 한 용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무녀들은 어디 갔어?”
“놓쳤다. 미안하다.”
“청룡은?”
“청룡궁으로 향했다. 청룡과 헤어진 후 얼마 안 되어 무녀들을 놓쳤다.”
용제건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명령을 내릴 청룡은 서쪽에 있는 백룡궁의 반대편에 위치한 동쪽의 청룡궁에 있었고, 용족들은 무녀들의 행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무녀들이 이 타이밍에 이렇게 나오리라고는, 그것도 그들의 감시를 떨쳐 내는 데에 성공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용족들은 당황한 듯했다.
보통 용제건은 위기 상황을 즐겼지만, 지금은 달랐다.
무슨 일이 벌어지면 친우인 김신록이 노려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용제건이 냉정하게 지시를 내렸다.
“흩어져서 무녀들을 찾되, 최소 둘 이상으로 움직여. 그들이 일을 벌일 거야.”
“알았다. 용제건, 너도 우리와 움직이겠는가?”
“나는 가 봐야 할 곳이 있어.”
현재 김신록은 황룡, 조의신과 함께 황룡궁에 있다.
그 둘이 옆에 있다면 김신록의 안전을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느낌이 좋지 않았다.
무녀들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김신록을 노리려 들지는 않았을 테니까.
용제건은 다른 용족들과 헤어져 곧바로 황룡궁으로 향했다.
그러나 백룡궁을 벗어나기도 전에 일이 터졌다.
쿠구구구구……!
백룡궁이 자색으로 물드는 괴현상이 일어난 지 얼마 안 있어 용궁의 구조가 뒤바뀌었다.
용궁의 재구축은 아군에게 보내는 경고이기도 했다.
예상치 못한 시점에 적습이 발생하면 용궁을 완전히 재구축할 것.
조의신이 그런 제안을 했던 걸 떠올리곤 용제건은 적습에 대비해 더욱 주변을 경계했다.
‘용왕신의 힘이 멀게 느껴져. 가호에 의존해서 싸우거나 색의 상징성이 큰 용들은 위험하겠지.’
청룡도 그렇지만 황룡이 더욱 걱정되었다.
황룡은 그 이무기의 비늘을 먹지 않았던가.
조의신이 용왕신에게 받았다는 통행증에 들어 있는 비늘을 건네 황룡에게 먹였다곤 하지만, 다른 용들에 비해 상태가 안 좋을 게 뻔했다.
‘이 비늘도 황룡에게 넘겼어야 했나? 의신이가 반대해도 그냥 줄 걸 그랬어.’
용제건이 용왕신을 떠나 인간계로 향할 때, 용왕신은 역린에 가까운 위치에서 비늘을 하나 떼어 줬다.
용제건은 보통 몸을 가볍게 하고 다니나 그 비늘만큼은 품에 지녔다.
이계 충돌 이후, 카드화가 가능해지자 더 편하게 비늘을 지니고 다녔다.
그래서 조의신이 용왕신에게 용궁 통행증으로 받은 비늘을 황룡에게 건넬 때, 대신 자신의 것을 쓰라며 내밀었다.
하지만 조의신은 이를 거절했다.
―저는 용제건 선생님이 계속 그 비늘을 가지고 있었으면 해요.
조의신은 단호하게 말했지만, 용제건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조의신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용제건에게 무른 편이었고, 용제건은 이를 잘 이용해 조의신을 구슬리곤 했다.
어떤 방법으로 조의신을 농락할까 고민하던 차에 황룡이 말렸다.
―네가 지닌 건 용왕신의 역린에서 가장 가까운 비늘이다. 몸에서 제일 느리게 자라는 비늘이지. 그런 비늘이 하나쯤은 남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용의 비늘은 위치에 따라 가치가 다르다.
용왕신의 비늘은 어느 부위든 귀했지만, 용제건이 지닌 비늘은 특히 귀했다.
용제건이 비늘을 받은 건 수천 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그 부위의 비늘이 새로 돋았을지 의문이었다.
황룡은 용제건이 지닌 비늘을 사용할 마음이 전혀 없는 듯했다.
―이번 일이 무사히 끝나면 용왕신께서는 다시 은인에게 새 비늘을 건넬 것이니, 걱정 말거라.
―안 주셔도 돼요.
―용왕신께서 비늘을 안 주시면 내가 손수 용궁의 기둥이라도 뽑아 줘야겠구나.
용궁의 기둥이라는 말에 조의신이 입을 다물었다.
용제건도 농담 비슷하게 조의신이 바라면 용궁의 기둥을 뽑아 주겠노라고 한 적이 있는데, 역시 같은 용끼리는 통하는 게 있는 듯했다.
‘응?’
용제건이 황룡궁으로 이어지는 길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불쾌한 감각이 용제건의 신체를 덮쳤다.
휘이이이…….
이어서 넓게 열린 시야 속, 모서리가 오간색으로 빛나는 거대한 물 덩어리가 나타났다.
무녀들의 수경이었다.
[여의보주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수경 너머로 유황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또렷한 정도, 용제건의 위치를 포착해 수경을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불러내는 것을 보았을 때, 무녀들의 힘은 평소보다 더욱 강해진 게 분명했다.
용제건은 여유를 가장해 말했다.
“직접 만나서 얘기할까? 그리고 내 이름은 용제건이야.”
[네, 알고 있습니다. 저는 여의보주의 이름을 잊고, 또 직접 만나 헛된 싸움을 할 만큼 어리석지 않아요.]
[지금이라면 저희 쪽에 승산이 있지 않나요?]
[하지만 유황 님 말씀대로 굳이 헛된 싸움을 할 필요가 없지요. 편한 방법이 있으니까요.]
[우리끼리의 싸움이 되겠군요.]
유황에 이어 녹의 무녀, 벽의 무녀, 자의 무녀가 말했다.
용제건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하나하나 머리에 새겨 넣으며 생각했다.
‘힘에 취해서 헛소리를 늘어놓고는 있지만, 허세는 아니야.’
유황은 조금 힘들 것 같지만, 다른 무녀를 부추기면 아직 파고들 틈이 있을지도 모른다.
용제건이 어떤 식으로 약을 올려서 저들을 꾀어낼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유황이 말이 많아진 무녀들을 다독이다가 용제건에게 말했다.
[저희는 지금부터 여의보주를 두고 다툴 예정이랍니다.]
휘이이!
수경의 표면이 흔들리다가 황룡궁과 청룡궁의 사이를 비추었다.
황색, 청색과 유황색, 녹색이 섞여 어지러운 풍경 속, 황룡과 김신록이 있었다.
황룡은 척 봐도 힘을 크게 소모한 듯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고, 김신록은 이를 부축하고 있었다.
용제건은 자신의 예상과 상황이 다소 다르게 흘러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의신이가 없어.’
단순히 조의신이 없는 것뿐만 아니라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들의 주변에는 녹아 가는 얼음 속에서 꿈틀거리는 에너미들이 보였다.
또, 수경 너머 김신록 발치에 비도가 떨어져 있는 게 보였다.
상황 설명을 전부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저것들은 김신록이 대항할 수 없는 존재 중 하나, 웅족의 권속들이었고, 무녀들은 저들을 부려 김신록을 노릴 생각인 듯했다.
[지금부터 저희는 다섯으로 나뉘어 웅족의 권속을 움직일 거예요. 가장 먼저 저 아이, 덤으로 황룡 님을 사로잡는 무녀가 소원을 두고 당신과 교섭할 예정이지요.]
유황은 교섭이라 표현하긴 했으나 결국 협박이었다.
사냥당하는 김신록과 황룡을 보여 주며 용제건의 의지를 꺾을 생각인 것이다.
용제건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저 권속이 신록이를 해치기 전에 내가 무녀를 잡으러 가면, 안 돼, 너무 멀어.’
황룡은 모두의 안전을 생각해 무녀와 용족들을 멀리 떨어뜨렸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용제건의 힘은 변화하는 용궁 속에서 제법 꺾여 있었다.
전력으로 무녀 쪽에 도달하는 데에 성공해도 무사히 그들을 제압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내가 무녀들의 소원을 이루어 주고, 뜻대로 행동한다 해도 신록이의 안전이 보장되진 않겠지.’
그들이 힘을 낭비하고, 이곳의 상황이 알려질 위험을 감수하며 김신록을 지상으로 보내 줄 리가 없었다.
뜻을 이루면 바로 김신록을 죽이거나 평생 용궁에 가둬 인질로 삼을 수도 있다.
용궁으로 왔을 때에는 분명 김신록이 위험해질 가능성도 상정했고, 그를 대비해 여러 수를 준비해 뒀다.
그러나 막상 눈앞에 이런 상황이 닥치니 용제건은 갑자기 자신의 사고 능력이 반 이하로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문득 조의신이 보여 준 리플레이, 악몽 속에서 본 무력감이 되살아난 탓이었다.
‘아니, 방법은 있어.’
용제건의 신격은 당장 승천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극에 달해 있다.
용제건이 힘을 개방해 본신으로 돌아가면 단숨에 승천할 수 있다.
승천한 즉시 김신록과 억지로라도 광림으로 이어지면 대항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침 김신록은 이곳에 오기 전에 광림을 다루는 연습을 하지 않았던가.
[처음인데, 잘할 수 있을까요? 아, 생각보다 쉽네요.]
[이곳으로 보내기 전에 그분께서 저들에게 이무기신 비늘을 먹였다고 합니다.]
용제건이 생각하는 도중에도 상황은 점점 흘러갔다.
무녀들이 힘을 싣자 웅족의 권속들은 각각의 색으로 빛났다.
좀처럼 힘을 다루지 못하는 홍의 무녀를 제외한 모든 무녀들이 권속을 움직일 준비를 마쳤다.
무녀들은 아직 용제건이 승천해서 김신록에게 힘을 준다는 상황 자체를 생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기회는 지금뿐, 망설이면 늦는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악몽 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본신이 흩어질 때까지 이룰 수 없는 소원을 빌게 될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용제건이 힘을 개방해 그의 손끝이 옥빛으로 물들려 했다.
―승천하기 전에 제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 것, 잊지 않으셨죠?
힘을 온전히 개방하기 전, 갑자기 조의신의 목소리가 들린 기분이 들었다.
김신록을 잃었던 리플레이, 악몽을 떠올렸던 탓에 자연스레 조의신이 생각났다.
조의신은 승천하기 전에 소원을 들어달라며 이렇게 말했다.
―제 소원은 하나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용궁에서 승천하지 말 것.
―승천하는 장소는 관계없긴 한데······ 그게 소원이야?
―네.
용제건의 손끝에서 옥빛이 사라졌다.
조의신을 향한 신뢰가 용제건을 멈추게 했다.
용제건은 친우를 살리지 못했던 자신을 믿을 수 없었지만, 친우를 구한 조의신은 믿을 수 있었다.
용제건은 조의신이 자신을 살리겠다며 수백 번 리플레이를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용제건은 비록 탈출하지는 않았지만, 조의신은 탈출 직전까지 그를 유도해 냈다.
그걸 알게 된 이후부터 용제건은 조의신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의신이가 이 상황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때, 수경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용제건!]
친우가 오랜만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
용제건의 이름을 붙여 준 건 김신록인데, 시간이 흐르자 늘 이 용, 저 용 하면서 도통 이름을 제대로 불러 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김신록은 용제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것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름을 불린 용제건은 그 순간 승천할 생각도 잊고 수경 너머로 보이는 친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