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768화 (768/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68)

96. 오룡쟁주 (11)

용궁의 무녀 중 막내가 궂은 일을 떠맡는 건 일상이었다.

그래서 막내 무녀는 한밤중에 혼자 적룡궁을 순찰할 것을 명받아도 그러려니 했다.

그냥 다른 무녀들이 또 지랄하는구나라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막내 무녀는 성의 없이 ‘네에’라고 답하고 적룡궁으로 향하기로 했다.

평소라면 말꼬리를 잡으며 그녀의 말투에 관해 뭐라 했을 무녀들은 묘하게 조용했다.

‘뭔가 이상한데.’

무녀들이 이상한 건 하루이틀이 아니었지만, 어딘가 예사롭지 않았다.

막내 무녀를 흘끗거리며 작게 소곤거리는 꼴이 싸한 느낌을 주었다.

막내 무녀는 시선을 느끼지 못한 척, 그들이 쑥덕거리는 걸 모르는 척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새로운 타입의 괴롭힘을 준비하고 있는 건가?’

막내 무녀는 오늘 자기 전에 문단속을 단단히 하고, 황룡 쪽으로 도망칠 준비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적룡궁 앞에 도달한 막내 무녀는 한숨을 삼키며 올려다보았다.

‘하필 적룡궁이라니. 그 말 많고 기운찬 후보생이 있는 곳이잖아. 괜히 마주쳐서 야간 탐험에 어울리게 되는 건 아니겠지?’

막내 무녀는 윤여랑에게 휘둘렸던 지난 며칠을 떠올렸다.

윤여랑을 따라다니는 건 아주 귀찮고 번거롭고 고단했지만, 용궁의 무녀들과 어울리는 것에 비하면 훨씬 마음이 편했다.

그놈의 탐험에 어울리느라 용궁 내에서 가 보지 못했던 곳을 둘러보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앞장선 주제에 심각한 길치라 길을 잃어버려 예기치 못한 장소에 도달하는 것도 조금 재밌긴 했다.

‘쟤가 용왕신의 무녀가 되든, 안 되든 이제 볼 일은 없겠구나.’

막내 무녀는 윤여랑이 용궁의 무녀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저런 아이는 자기처럼 의식주만 주면 만족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만약 윤여랑이 용궁의 무녀가 된다고 하면 온 힘을 다해 말릴 생각이었다.

윤여랑이 용궁에 남으면 몹시 귀찮을 것 같았고, 또 그녀가 자신이나 여기에 있는 무녀처럼 되는 건 좀 싫었기 때문이다.

‘깨어 있나 보네. 마주치지 않게 멀리 돌아가야지.’

밖에서 적룡궁을 올려다보니 윤여랑의 방 조명이 켜져 있는 게 보였다.

순찰 루트를 조정한 후, 막내 무녀는 순찰을 가장한 산책을 하며 이미지 트레이닝에 몰두했다.

막내 무녀는 용궁에 온 이후로 가끔 황룡과 대화하는 걸 제외하면 혼자 있을 때가 많아 늘 이미지 트레이닝이라 포장한 망상에 빠지곤 했다.

무녀들을 실컷 약 올리고 도망치는 망상을 하던 막내 무녀는 기척을 감지하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감시가 붙어 있어.’

이 시간에 무녀들이 적룡궁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 막내 무녀의 감시가 목적일 것이다.

그들이 막내 무녀의 흠을 잡고자 뒤를 캐는 건 여러 번 있던 일이다.

막내 무녀는 일부러 감시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척 뻔뻔하게 굴다가 허탕을 친 무녀들을 속으로 비웃곤 했다.

막내 무녀는 이번에도 한밤중에 시간과 기력을 날릴 무녀들을 몰래 비웃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자정, 이변이 일어났다.

‘기분 나빠. 이게 뭐야!’

여러 가지 감상이 치밀어 올랐지만, 뭉뚱그려 설명하면 기분이 나빴다.

용궁에 용왕신이 아닌, 기분 나쁜 무언가가 들어앉은 감각이었다.

용궁의 색깔도 기묘하게 변해 갔다.

막내 무녀는 무녀들이 용궁에 이무기를 불렀다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고, 딱히 용궁을 위해 자신이 뭔가를 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없었다.

그래도 의식주를 제공해 주고 다정하게 대해 준 황룡과 용왕신을 저버릴 마음은 없었다.

‘황룡 님께 알려야 해.’

막내 무녀가 적룡궁 순찰을 중단하고 황룡궁으로 향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지켜보고만 있던 감시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적룡궁 순찰이 끝나지 않았을 터인데, 어디를 가느냐.”

질책하는 것 같은 말에 막내 무녀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누가 봐도 용궁에 무슨 사달이 벌어진 게 분명한데, 시비를 걸고 있는 꼴이 좀 그랬다.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저 꼰대들이라면 충분히 할 법한 짓이라고 생각하며 막내 무녀가 답했다.

“황룡 님께요.”

“여전히 말투가 천박하구나.”

“같은 무녀라는 게 부끄러울 지경이지요.”

막내 무녀가 유독 ‘요’를 작게 발음할 때마다 발작하는 무녀들이 몇 명 있었는데, 감시자들이 그 일당이었나 보다.

감시자들은 총 세 명이었다.

세 명의 무녀는 이상 사태가 발생했는데도 매우 태연해 보였다.

오히려 자신만만하기까지 했다.

‘설마 쟤들이 원인인가?’

막내 무녀는 차분하게 결론을 내렸다.

아직 제대로 된 근거가 없지만, 무녀는 이 근거 없는 싸한 느낌을 믿기로 했다.

막내 무녀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고 있었으나, 감시자들은 막내 무녀가 평소처럼 멍하게 있는 중이라 생각하고 거세게 쏘아붙였다.

“볼 때마다 참 마음에 차지 않았다. 어쩌다 용왕신께서는 이런 교양 없는 것을 무녀로 들이려 한 건지.”

“상관없지 않습니까? 이제는.”

“그래, 더 이상 무녀가 아니게 될 테니.”

‘더 이상 무녀가 아니다’라는 말에 막내 무녀의 생각이 더 깊어졌다.

어쩌면 사태는 막내 무녀가 상정한 것보다 심각할지도 모른다.

막내 무녀는 속으로 황룡의 안위를 걱정했다.

감시자들은 반응이 없는 막내 무녀를 두고 그저 너무 놀라고 겁에 질려 아무것도 못 하는 중이라 업신여겼다.

“유황 님께서 저것을 처분하기 전에 버릇을 고칠 시간을 준다 하셨으니, 마음껏 즐기자꾸나.”

“알겠습니다.”

“제가 먼저 하지요. 저 면사를 벗겨 내고 입을 찢어 버리겠습니다.”

감시자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서 칼을 꺼냈다.

부엌일을 하는 무녀였는지, 잘 벼려진 식칼을 들고 있었다.

감시자는 식칼의 끝을 막내 무녀를 향해 들고 천천히 걸어갔다.

막내 무녀의 면사를 식칼로 잘라 낼 생각인 듯 면사 위로 높게 들어 올렸다.

칼날이 허공을 가르고 막내 무녀의 목전에 다가온 순간.

카랑, 카랑…….

“아악!”

칼날이 떨어지는 소리와 비명이 울려 퍼졌다.

비명을 지른 건 막내 무녀가 아닌 감시자였다.

벼락같은 기세로 움직인 막내 무녀가 이능파를 손에 감아 식칼을 쳐 내고 감시자의 머리채를 움켜쥔 것이다.

막내 무녀는 머리카락을 뜯어 낼 기세로 거세게 머리채를 쥐고선 감시자들을 노려봤다.

늘 한마디도 받아치지 못하고 당하기만 하던 막내 무녀가 이렇게 나올 줄은 예상치 못한 듯했다.

‘용왕신이시여, 선빵은 쟤네가 먼저 쳤어요. 피하긴 했지만요.’

막내 무녀는 속으로 용왕신에게 용서를 구한 후, 식칼을 들고 달려든 무녀를 인질로 삼고 남은 감시자들을 노려봤다.

막내 무녀는 의식주를 위해 참아 왔지만, 참는다고 해서 짜증이 완전히 가시는 건 아니었다.

막내 무녀는 늘 무녀들을 쥐어패는 망상을 했었다.

무녀들의 머리채를 쥐고 흔드는 것도 그 망상 중 하나였다.

오랜 기간 용궁에서 우아하게 지내며 면사 뒤에서 음습한 싸움을 한 이들은 현대 사회인의 거친 충동에 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뭘 벗기고 뭘 찢는다고? 다시 말해 보지 그래!”

휘익!

“꺄아악!”

무녀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잡아 크게 흔들자 아픔에 눈물을 짜내며 비명을 질렀다.

막내 무녀의 손힘과 이능파 탓에 머리채가 흔들릴 때마다 머리카락이 잔뜩 뽑혀 나갔다.

감시자 둘은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막내 무녀에게 분노를 쏟아 냈다.

“저, 저런 야만적인!”

“그 아이를 놓거라!”

“그런다고 놓겠냐? 오래 살고도 멍청하다니까.”

딱히 심한 욕을 한 것도 아닌데 무녀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질 기세로 벌벌 떨었다.

막내 무녀는 오랜만에 하고 싶은 말을 해서 속이 다 후련했다.

특히 자신을 칼로 찌르려던 무녀가 엉엉 울면서 버둥거리는 걸 보니 없던 체증이 가시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스트레스를 푸니 평소보다 더 맑고 상쾌하게 사고할 수 있었다.

‘셋 다 쓰러뜨리고 황룡궁으로 간다. 좀 봐서 위험한 거 같으면 손님이 있는 청룡궁으로 도망쳐야지.’

계획을 세웠지만, 아직 감시자들이 수적으로 우세하다.

이능은 별 볼 일 없는 듯하지만 방심할 마음은 없었다.

막내 무녀는 감시자들의 속을 더 긁어서 틈을 보이게 하고 일망타진하기로 했다.

속을 긁어 놓으며 그동안 묵힌 감정을 푸는 건 덤이었다.

“내 면사를 벗긴다고 했지? 먼저 네 잘난 낯짝 구경이나 해 보자.”

면사를 쓰고, 이름을 감추는 것은 자신의 개성을 잠시 버리고 용왕신에게 시간을 바치겠다는 뜻에서 비롯된 전통이라고 한다.

무녀들이 면사를 벗고 이름을 쓰는 건 무녀로서의 직위를 내려 두고 다시 자신의 시간을 움직였을 때다.

무녀들은 임기 중에 민낯을 드러내는 걸 몹시 꺼려 하니 쉽고 간단하게 도발할 재료가 될 것이다.

스륵, 휙!

막내 무녀의 손아귀를 피하려는 몸부림을 무시하고 면사를 벗겨 냈다.

면사 밑에는 고통과 분노, 욕심 등의 감정 탓에 일그러진 얼굴로 막내 무녀를 쏘아보는 얼굴이 있었다.

이목구비에 트집을 잡고 싶진 않지만 표정 탓이었는지 눈에 담기 꺼려질 만큼 추악해 보였다.

막내 무녀는 음식물 쓰레기를 보듯 그 얼굴을 감상하다가 아주 거슬리는 걸 발견했다.

‘뭐야, 저건. 비늘? 용의 비늘은 아닌 것 같은데.’

무녀의 얼굴에는 비늘 하나가 돋아 있었다.

새끼손가락 손톱의 반만 한, 아주 작은 비늘이었다.

막내 무녀는 그 비늘을 발견한 순간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의 불쾌감을 느꼈다.

그러나 감시자들은 무녀의 얼굴을 보고 환희했다.

“아, 아아…… 우리에게도 조금이나마 은혜가 온 거야!”

“저도 비늘이 돋아 있는 게 아닐까요? 곧 용이 될 수 있는 걸까요?”

“내, 내 얼굴에 비늘이?”

그들은 막내 무녀를 향한 경계심과 분노도 잊고 히죽거렸다.

막내 무녀는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괜히 잡고 있는 머리채에서 기분 나쁜 무언가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아, 미친. 저 더러운 게 옮는 건 아니겠지?’

막내 무녀는 찝찝한 기분을 견디지 못하고 즉각 잡고 있던 머리채를 내동댕이쳤다.

일부러 장식품이 많은 곳을 향해 던져 버렸다.

콰앙! 쨍그랑!

무녀의 몸과 장식장이 부딪치고, 화병이 넘어지는 등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제법 힘을 주어 던졌고 큰 소리가 났으니 보통 아픈 게 아닐 거다.

하지만 머리채를 흔들 때마다 비명을 지르던 무녀는 흉한 얼굴로 실실거리며 웃고 있었다.

비늘이 생긴 게 그 무엇보다 중요하고 기쁜 일인 것처럼 웃느라 아픔도 못 느끼는 듯했다.

그때였다.

쿠구구구구…….

용궁 전체가 뒤흔들렸다.

황룡의 힘이 용궁 전체를 재구성하고 있었다.

황룡이 용궁을 구성하는 건 몇 번 보았기에 막내 무녀는 바로 알아보았다.

‘쓰러뜨리고 싶었지만, 도망가는 게 좋겠어. 쟤들이 걸린 병 같은 게 옮는 건 질색이야.’

육신에 걸리는 병인지, 정신에 문제가 생기는 병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모르겠지만.

막내 무녀는 아직도 웃느라 정신을 못 차리는 감시자들과 거리를 크게 뒀다.

구름에 휩싸여 곧 시야가 막혔지만, 막내 무녀는 황룡을 믿었기에 얌전히 자세를 낮추고 기다렸다.

구름이 가라앉았을 때에는 감시자들이 사라져 있었다.

용궁은 처음 보는 구조로 변해 있었기에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도 없었다.

하지만 아는 얼굴이 앞에 있었다.

“언니! 안녕하세요!”

용궁의 구조가 변한 후, 막내 무녀 앞에 윤여랑과 두 명의 후보생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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