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75)
97. 용행호보 (6)
눈을 가린 오색 비늘의 용이 가까이 다가오자 흑룡궁의 공기가 변했다.
그 존재감이 가까워지자 무녀 후보생들 둘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막내 무녀는 비틀거렸다.
용왕신을 자주 만나 익숙해진 건지 기쁨 때문에 위압감을 잊은 건지 윤여랑은 그 자리에 꼿꼿하게 서서 용왕신을 맞이했다.
“오랜만이에요! 뵙고 싶었어요!”
근엄하고 수심 어린 얼굴을 한 용왕신이 그 말을 듣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용왕신이 웃자 윤여랑이 더욱 기뻐했다.
용왕신은 윤여랑 외에도 강림 의식을 시행한 이들을 한 번씩 바라보고는 마지막으로 나를 응시했다.
눈이 마주친 내가 인사하자 용왕신이 입을 열었다.
[나도 안녕하다. 이렇게 착한 아이들을 기다리게 하다니, 마음이 무겁구나.]
쿠웅!
용왕신의 따스한 음성이 퍼지자 흑룡궁이 한층 더 밝아졌다.
그 기운을 견디지 못한 괴물이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괴물은 바닥에서 바들바들 떨며 증오 어린 시선으로 하늘에 떠 있는 용왕신을 올려다보았다.
괴물은 용왕신이 가까워진 이후로부터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강림해서 현세에 개입한 이후부터 용왕신이 계속 저 괴물을 견제하고 있구나.’
용왕신이 괴물을 향해 숨김없이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상위 존재가 위압감을 감추기 위해 자신을 억눌러도 무녀 후보생처럼 서 있지 못하는 사람이 나오기도 하는데, 저 괴물은 용왕신의 위압감을 그대로 뒤집어쓰고 있었다.
끄극, 끼기긱!
괴물이 해석할 수 없는 소리로 울부짖었다.
상위 존재에 가까운 자신이 어째서 용왕신의 존재감을 견딜 수 없는 건지 의문스럽게 여기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상황이 아주 당연하게 느껴졌다.
저 괴물이 상위 존재에 가까워진 건 어디까지나 무녀의 배신에 힘입어 용왕신의 자리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이제 용왕신이 제자리에 돌아왔으니 저것은 단순한 괴물일 뿐이다.
끼에에에엑!
괴물이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건지 큰 몸을 크게 버둥거렸다.
큰 위협이 안 되는 행동이었으나 괴물의 몸체가 워낙 크고 주저앉은 무녀가 있어 좌시할 수 없었다.
괴물이 몸을 뒤틀자 부서진 가구 파편이 어지러이 날아다녔다.
용왕신은 그 자리에 고고히 떠서 괴물이 발악하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헛된 짓을.]
내가 움직이기 전에 용왕신이 먼저 대응했다.
오색 채운이 순식간에 땅에 있는 이들 옆에 차오르고, 채운에 닿자 파편은 힘을 잃고 그 자리에 툭 떨어졌다.
거기에 더해 파편은 천천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용왕신의 힘을 받아 흑룡궁이 제 모습을 찾으려 하고 있었다.
흑룡궁을 덮친 벽의 힘이 용왕신의 위용을 견디지 못하고 사라져 갔다.
끄으으윽!
흑룡궁의 변화와 용왕신의 오색 채운을 본 괴물이 뒷걸음질 치다 마지막 힘을 짜내 도망치기 시작했다.
분노와 굴욕보다 공포가 더 커진 듯했다.
마지막 힘을 짜내 바닥을 기어 도망치는 괴물은 처음 등장할 때 못지않게 빨랐으나 비교도 안 될 만큼 볼썽사나웠다.
[이곳은 나와 내 아이들의 용궁이다. 어디로 도망치겠다는 게냐.]
용왕신은 천천히 떠서 그 뒤를 추적했다.
괴물은 바닥을 기는 덕에 천장이 낮은 곳도 통과할 수 있어 용왕신보다 빠르게 흑룡궁 밖으로 빠져나갔다.
용왕신을 따라 흑룡궁 정문으로 나오니 황룡궁에서 몰려온 오색 채운이 보였다.
이무기의 무녀들이 보낸 구름이었다.
‘괴물을 지원하기 위해 보낸 건가.’
용왕신과 저 무녀들이 부리는 오색 채운은 같은 오간색이지만, 같은 공간에 있으니 그 차이가 확연히 느껴졌다.
타락한 마음이 반영되어 무녀들의 구름은 탁했고, 그에 반해 용왕신이 다루는 구름은 선명하고 정순한 기운이 넘쳐 흘렀다.
그 탁한 채운을 본 이무기가 환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뱉었다.
끼이이익!
이무기는 무녀들의 채운을 발견하고 눈을 희번덕 뜨며 빠르게 기어갔다.
용왕신처럼 채운을 부리면 싸울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도 모른다.
채운을 몸에 감기 위해 뛰어드는 괴물을 보며 용왕신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무녀들은 나를 잊었구나.]
용왕신의 목소리에 짙은 슬픔이 묻어났다.
채운이 닿는 곳이라면 무녀들도 이 광경을 보고 있을 텐데, 용왕신의 이런 음성을 듣고 뭐라고 생각할까.
무녀들의 채운이 괴물을 환영하며 일렁이는 꼴을 보니 별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용왕신을 도발하는 것 같았다.
저 말을 듣고도 무녀들에게 속고 배신당해 여기까지 내몰릴 만큼 어리석고, 이렇게 해도 그들이 원하는 영생을 주지 않으니 매정하다며 속으로 매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용왕신은 그저 슬퍼할 뿐이었다.
[그 권능을 준 게 나라는 것조차 망각하다니.]
무녀들에게 부여한 권능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용왕신은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용왕신이 손가락을 하나 들어 채운을 가리켰다.
고작 그 정도의 움직임에 피부가 저릿해질 만큼의 힘이 발산되었다.
괴물은 다급하게 채운을 향해 달려갔지만, 소용없었다.
용왕신이 그대로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이자 무녀들의 채운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파스스…….
채운이 흩어지자 황룡궁 저 밑에서 무언가가 부글거리는 기운이 느껴졌다.
오색 채운을 다루는 권능이 회수되자 무녀들이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용왕신이 권능을 회수할 가능성은 생각하지 못한 건가. 정말 오만하구나.’
채운을 다루는 권능은 본래 계승식을 통해 다음 무녀에게로 전달된다고 들었다.
어쩌면 저들은 권능의 이동은 계승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용왕신의 힘과 권위를 얕잡아 제멋대로 짐작한 결과일 거다.
끄그그극, 그극……!
흩어지는 오색 채운을 잡기 위해 부질없이 몸을 비틀던 괴물이 황룡궁의 바닥을 향해 고함쳤다.
무녀들에게 힘을 내놓으라고 명령하는 듯했다.
그러나 무녀들은 괴물과 용왕신에게서 받은 힘을 부리던 존재다.
괴물이 상위 존재스러운 존재감을 잃고, 용왕신이 무녀들에게서 권능을 회수하니 이제 그들은 플레이어로서의 힘밖에 남지 않았다.
괴물의 성에 찰 정도로 큰 힘을 내놓는 건 불가능했다.
지금 그들이 힘을 합쳐 봤자 현세에 강림한 상위 존재에 대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끄으으으으!
그러나 괴물은 포기하지 않은 듯했다.
괴물은 무녀들로부터 억지로 힘을 끌어 오기 시작했다.
이무기의 비늘을 먹은 바람에 괴물과 이어진 무녀은 괴물의 행동에 저항하지 못했다.
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악!
괴물의 쩍 벌린 입에서 무녀들의 비명이 들렸다.
이능파와 생기를 빨린 무녀들이 고통에 차 울부짖었다.
괴물의 입과 황룡궁의 지하에서 귀가 아플 정도로 날카로운 소리가 쉬지 않고 들렸다.
비명이 멎었을 때 즈음, 괴물이 몸을 일으켰다.
무녀들에게서 꽤 힘을 빨아들인 건지, 괴물은 처음 나에게 달려들 때만큼의 기백을 회복했다.
‘그래 봤자 용왕신에게 대항할 수 있을 리가 없어.’
용왕신이 현세에 개입한 정도가 커져서 부담이 늘어나는 건 좀 걱정되긴 했다.
괴물 역시 그 사실을 인지하고 용왕신을 조금이라도 더 고통스럽게 만들기 위해 마지막 발악을 한 걸지도 모른다.
용왕신의 부담을 덜기 위해서 나도 싸우는 게 좋을까?
이능파의 잔량이 바닥에 가까웠지만, 일단 싸우고 생각하기로 했다.
콰콰콰콰!
괴물이 바닥을 박차고 용왕신을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곧바로 상보심금파 카드를 꺼내 실체화하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누군가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이 이상 용궁을 어지럽히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
눈앞에 황룡의 등이 보였다.
황룡의 다정한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엄격하게 들렸다.
‘예상보다 빠르게 왔구나.’
황룡의 등 너머로 보이는 황룡궁에서 유황색이 지워지고 있었다.
용왕신의 강림으로 이무기가 미쳤던 영향력이 서서히 지워져 용들이 회복한 듯했다.
거기에 더해 밀접한 관계를 가진 상위 존재의 강림으로 용족들은 회복은 물론, 능력치가 크게 상승했을 것이다.
용왕신이 강림한 순간부터 저들에게 승산은 전혀 없었다.
쿠구구구구구!
황룡이 괴물을 향해 황색 구름을 움직였다.
그러자 구름에 덮인 괴물 주변의 바닥이 순식간에 재구축되었다.
황색의 구름이 눈앞을 가리다 사라졌을 때, 괴물은 우리와 격리된 건물에 갇혀 있었다.
황룡이 용궁을 움직여 괴물을 가두어 버린 것이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괴물은 꼼짝도 못 하게 되었지만, 곧 자신을 가둔 건물을 부수고 탈출하려 했다.
‘우드득’ 하고 황룡이 구축한 건물에 금이 가려 했다.
그러나 그 전에 푸른 불꽃이 건물에 퍼부어졌다.
화르르륵!
순식간에 나타난 청룡이 황룡 옆에 나란히 서서 불꽃을 뿜었다.
회복한 건 황룡뿐만이 아니었다.
청룡 또한 용족의 수장다운 힘을 되찾은 상태였다.
“이 이상 용왕신과 손님의 손을 번거롭게 할 수 없다.”
청룡은 분노를 숨기지 않고 괴물을 향해 화염을 뿌렸다.
거대한 괴물 따위는 단숨에 삼켜 버릴 만큼 거대한 불꽃이 황룡에 의해 급조된 건물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용의 형태를 한 푸른 불꽃은 오로지 괴물만을 태웠다.
용궁의 벽에 가로막혀 열기나 연기, 재 따위는 우리 쪽으로 날아오지 않았다.
괴물은 청룡의 화염에서 벗어나기 위해 건물 벽을 부수려 했지만, 녹고 타는 바람에 경도가 떨어진 피부로 견고한 용궁 벽을 부수는 것은 불가능했다.
청룡의 불꽃이 황룡이 만든 건물 안에 잔뜩 퍼부어지자 황룡은 구름을 부려 입구와 출구를 아예 없애 버렸다.
그러자 더는 괴물의 비명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쿠구구구구!
몇십 초 정도 뒤, 황룡은 구름을 부려 막 만들어 낸 건물을 없애 버렸다.
다시 나타난 바닥 위에는 거대한 잿더미가 남아 있었다.
괴물이 쓰러진 걸 확인하자 황룡과 청룡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두 용은 용왕신을 눈에 담고는 두 손을 맞잡아 얼굴 앞에 들어 올리고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용왕신께 인사드립니다.”
황룡과 청룡의 짧은 목소리에서 수많은 감정들이 느껴졌다.
그동안 두 용은 용왕신을 매우 걱정했으니 눈앞에서 직접 무사를 확인하고 크게 안심한 듯했다.
용왕신은 두 용을 자애에 찬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들어 다오.]
두 용의 인사를 받은 용왕신은 그들에게 고개를 들라 한 후, 그들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용들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기만 했는데도 수많은 대화를 주고받는 것처럼 보였다.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던 용들이 문득 시선을 돌렸다.
시선이 닿은 곳은 내가 서 있는 방향이었다.
용왕신이 부드럽게 말했다.
[지금은 나 말고 인사해야 할 이가 따로 있다.]
정황상 나를 가리키는 말 같았다.
내가 황룡과 청룡을 말릴 틈도 없이 두 용이 두 손을 맞잡았다.
“용궁을 구한 용족의 은인에게 경의를.”
두 용은 주저 없이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당장 저 용들을 어떻게 하려 했을 때였다.
스스스스…….
줄곧 허공에 떠 있던 용왕신이 땅으로 내려왔다.
주변에 오색 채운이 떠돌아 마치 내가 발을 디딘 땅이 하늘이 된 것 같은 광경이 연출되었다.
비록 하늘에 오른 것 같다고 표현하긴 했으나 용왕신은 지금 나와 같은 바닥에 서 있었다.
[용족의 은인에게 경의를.]
두 용에 이어 용왕신도 내게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