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774화 (774/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74)

97. 용행호보 (5)

‘용왕신이 현세에 강림한 게 100년 정도 전의 일이던가.’

이계 충돌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용왕신이 현세에 강림했다.

용왕신은 혼란에 빠진 용족을 이끌어 용궁을 안정시켰다.

용왕신의 강림으로 용족은 빠르게 새로운 시대를 받아들이고 현세에 적응했다.

당시 강림을 주도한 건 용왕신의 무녀들이었다.

‘그때보다 상황이 안 좋아. 이중엔 정식 용왕신의 무녀가 한 명도 없어서 채운을 부릴 수 없고, 의식을 도와주는 용족이 없어.’

용왕신의 무녀로 뽑힌 자는 오간색의 이름을 부여받고 채운을 부릴 수 있는 권능을 얻는다.

현재 그 권능은 이무기의 무녀들이 쥐고 있는 상태다.

또, 강림 의식을 실행하는 위치도 별로 좋지 않았다.

흑룡궁도 일단 신계에 가까운 용궁의 일부이긴 하지만, 더 좋은 곳은 따로 있었다.

이무기의 무녀들이 선점한 용궁의 중앙, 황룡궁이 그러했다.

게다가 그들은 용왕신이 아닌 다른 것을 부르려 하고 있지 않은가.

채운을 부릴 권능, 가장 좋은 위치를 빼앗긴 데다 이무기의 비늘로 사전 작업을 하는 바람에 그 기운이 용궁에 가득했다.

‘그걸 알고 있으니까 적룡, 흑룡, 백룡도 큰 각오를 하고 개입한 거겠지.’

운명력이 발동한 동안 그들은 힘을 비늘에 응축해 나에게 건넸다.

간접적이라고는 하나 강림 의식에 개입한 셈이니, 강림에 성공하면 저들은 현세에 개입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불안 요소는 더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돌발 상황이 발생해도 강림 의식을 멈추지 마세요.”

내가 말을 마치자 윤여랑은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입을 뻐끔거렸으나 그 전에 내가 막내 무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막내 무녀는 내가 말한 불안 요소와 돌발 상황의 존재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안 것 같았다.

피로가 느껴지는 얼굴에 희미한 걱정이 묻어났다.

그래도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건지, 신호를 받은 막내 무녀가 이능파를 끌어올려 의식을 시작했다.

“용왕신이시여.”

막내 무녀가 용왕신에게 올리는 기도문을 선창했다.

강림 의식은 용왕신을 향한 기도로 신계를 향한 길을 열며 시작했다.

본래는 용왕신을 상징하는 유황, 벽, 홍, 자, 녹색의 오간색을 사용해 길이 잘 보이도록 해야 할 텐데, 그럴 수 없었다.

다섯 명이 발산한 이능파의 색은 제각각이었고, 오간색과 일치하는 게 없었다.

정식 용왕신의 무녀들이 본래의 이능파 색과 관계없이 권능에 따라 채운을 부릴 수 있는 것과 비교되었다.

두 후보생들은 자신감이 사라진 건지 목소리가 작아졌다.

‘이대로 가다간 길을 못 열어.’

막내 무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두 후보생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둘을 향해 적룡의 비늘을 쥔 주먹을 들어 보이곤 힘을 실었다.

곧 적룡의 비늘이 반응해 붉은 기운이 높이 타올랐다.

화르륵!

불꽃의 형태를 한 힘이 막내 무녀를 중심으로 뻗어 나갔다.

이를 본 후보생들이 주저하다가 각각 흑룡과 백룡의 비늘을 꽉 움켜쥐었다.

‘휘이이’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두 비늘에서 힘이 방출되었다.

적룡, 흑룡, 백룡 또한 여기에 있는 다섯이 용왕신을 부르고자 한다는 걸 멀리 전하기 위해 힘을 실었다.

세 용의 힘이 추가되자 거대한 마법진으로부터 하늘을 향해 곧게 빛이 솟았다.

고오오오…….

기도문을 외우는 낭랑한 목소리가 멀리 이어진 길 사이로 널리 퍼졌다.

용왕신을 맞이하기 위해 열린 길은 이곳에서는 관찰할 수 없는 신계로 이어져 있었다.

길의 끝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득한 감각이 밀려들어 왔다.

‘용왕신 강림을 위한 길은 이어졌지만, 장애물이 있어.’

윤여랑과 막내 무녀가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가 용왕신의 강림을 방해하고 있었다.

용왕신이 용궁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은 것과 같은 힘일 것이다.

이무기가 용왕신을 방해하고 있었다.

“용왕신이시여……!”

윤여랑의 목소리가 여느 때보다 밝게 들렸다.

저 장애물만 없어지면 용왕신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 걸까, 윤여랑이 웃으며 용왕신을 불렀다.

윤여랑의 기대, 희망에 반응해 장애물에 ‘쩍’ 하고 금이 갔다.

막내 무녀는 질린 얼굴로 윤여랑을 보았다.

이무기의 방해를 웃으면서 부수는 무지막지함에 놀란 듯했다.

윤여랑의 활약에 용기를 얻은 이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용왕신과 용궁 사이를 막는 장애물이 기도에 깎여 나가고 있을 때였다.

콰드득, 콰득…….

기도하는 목소리 사이로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가 흑룡궁의 표면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것은 몸을 꿈틀대며 입구를 찾기 위해 움직이는 중이었다.

내가 생각한 불안 요소가 여기까지 온 듯했다.

‘아직 강림 의식을 마치지 못했는데.’

아직 그것은 황룡이 꼬아 버린 구조를 전부 파악하지 못했다.

조금만 더 그것이 길을 헤매기를 원했지만, 내 바람은 곧 무너졌다.

콰아아앙!

그것이 흑룡궁의 입구를 찾아내었다.

멀리서 흑룡궁의 문이 부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열심히 기도문을 외우던 후보생 둘이 동요했으나 내가 손을 들어 보이고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내가 말한 불안 요소에 관해 떠올렸는지 겁에 질렸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콰득, 콰직!

흑룡궁에는 무녀들의 오색 채운이 닿지 않았기에 그것은 직접 헤매며 우리를 찾고 있는 듯했다.

의식을 치르는 곳은 흑룡궁 입구에서 멀지 않아 금방 이곳에 도달했다.

쿠구구구구…… 콰앙!

문이 거칠게 열리고, 그 여파로 바닥이 잘게 떨렸다.

열린 문 사이로 등장한 것을 본 이들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것은 반투명한 형태의 괴물이었다.

그 괴물은 이쪽에서는 하반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하고, 일그러진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괴물의 몸을 뒤덮은 비늘의 형태를 기억해 두지 않았더라면, 이무기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걸 용왕신으로 삼으려 했다고?’

보통 뱀과 용의 중간 형태쯤으로 묘사되는 이무기라 부르기도 꺼려질 정도였다.

옛 한국 지부장이 홍경복 화백의 손을 빌려 표현한 이무기가 무녀들의 욕망을 양분으로 삼아 자라 저렇게 된 걸까.

아직 온전히 강림 의식이 끝나지 않아 괴물은 실체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지만, 여기에 있는 이들을 전멸시키기에 충분한 힘을 갖추고 있었다.

흑룡궁의 정문을 부술 정도다.

무녀 후보생들의 신체는 아주 손쉽게 박살 내 버릴 것이다.

‘용과 유사한 존재와의 싸움을 상정해 준비했는데.’

실제로 아주 강력한 용과 싸워 본 적도 있다.

용이자 용살자인 카드모스가 그러했다.

함근형 선생님의 광림, ‘명사수의 시선과 광궁(光弓)’을 발동시키면 용으로 분류되는 퓌톤을 잡은 아폴론의 화살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저것은 용이 아니었고, 용에 가까운 존재도 아니었다.

적어도 내 눈으로 봤을 때에는 그러했다.

끼이이익!

괴물이 길게 울부짖곤 이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내 스스로가 저것을 용이라 볼 수 없는데, 용살의 무기가 제힘을 발휘할 리가 없어.’

저것은 그저 삿된 괴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사용할 수 있는 수는 따로 있었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무명의 운명을 사용해 또 다른 광림을 쓰는 대신, 윤여랑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해당 캐릭터의 광림, ‘제의(祭儀) 기구 소환’을 사용합니다.〉

나는 두 개의 무선(巫扇)을 불러냈다.

윤여랑이 직접 만난 용들을 보고 고안한 일월청룡선(日月靑龍扇)과 파랑황룡선(波浪黃龍扇)이었다.

내 손에 들린 무선을 보고 윤여랑이 눈을 아주 빠르게 깜빡였다.

괴물은 강림 의식 중인 다섯 명을 한 번에 일소하기 위해 힘을 모았다가 이제 막 돌진하려던 참이었다.

〈해당 캐릭터의 스킬, ‘벽사(辟邪)’를 사용합니다.〉

파앙!

내가 괴물을 향해 두 개의 무선을 동시에 휘두르자 위험을 느낀 괴물은 타깃을 나로 한정했다.

휘두른 무선에서 맑은 기운을 품은 청룡과 황룡이 괴물을 막기 위해 날아갔다.

두 용이라고는 하지만 무선에서 나타난 저들은 이무기의 무녀들이 부른 괴물에 비해선 턱없이 작았다.

곧 두 용과 울부짖는 괴물이 충돌했다.

콰콰콰콰콰!

충격파가 전신을 덮쳤다.

물리적인 충격 외에도 이능파가 단숨에 빨려 들어가는 감각에 정신이 텅 비는 듯했다.

저 괴물은 상위 존재를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 혼자 벽사 스킬로 막을 수 있는 만한 게 아니었다.

괴물을 막고 있는 황룡과 청룡의 모습을 한 벽사 스킬의 결정체가 흐릿해지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번 정도라면!’

아무 대책 없이 비늘을 전부 다른 이들에게 건네지는 않았다.

아직 내게는 용에게 선물받은 귀한 물건이 하나 더 있었다.

〈‘용궁의 흑진주’를 사용합니다.〉

시스템 음이 들리자 몸에서 이능파가 빨려 나가는 감각이 멈췄다.

대신 손에 쥐고 있던 흑진주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용제건이 용족의 은인에게 선물을 준답시고 황룡에게 선물을 골라 달라 조르자 건넨 그 물건이었다.

용족의 귀물이 제힘을 발휘하자 괴물을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슈우우우…….

충격파가 완전히 멎었을 때, 괴물이 멈춰 있었다.

손을 내려다보니 두 무선이 검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괴물의 돌진을 고작 한 번 막은 것만으로 두 무선이 힘을 감당하지 못해 소환이 해제되려 했다.

실체를 갖추는 게 고작인 걸 보니 당분간 같은 무선을 소환하는 건 어려울 것 같다.

‘흑진주까지 사용했는데 한 번이라니.’

괴물은 아직 쓰러지지 않았다.

괴물은 증오와 분노를 숨기지 않고 나를 보고 있었다.

힘을 모으면 다시 나에게 돌진할 것이다.

‘한 번 더 막을 수 있을까?’

다행히 저 괴물은 나를 우선하여 노릴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이무기의 무녀들이 의식을 진행하고 있으니 저 괴물은 더 거세게 돌진해 올 텐데.

압도적인 힘 앞에 둘 수 있는 수는 얼마 없었지만,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명확했다.

바로 시간을 끌고 다른 이들을 지키는 것.

괴물을 내 손으로 쓰러뜨릴 수는 떠올리지 못했으나 시간을 끌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온 정신을 집중해 다음 수를 둘 준비를 할 때였다.

“의신이 오빠!”

윤여랑의 목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내 이름을 불렀다는 건 기도를 멈췄다는 뜻이다.

나 한 명 정도면 몰라도 윤여랑까지 기도를 멈추면 강림 의식이 중단될 거다.

의식이 중단되어 처음부터 다시 하게 된다면, 지금 내가 괴물을 상대하는 동안 다른 이들은 도망쳐야 한다.

윤여랑에게 ‘의식을 멈추지 마’라고 말해야 할지, ‘도망쳐’라고 말해야 할지 판단하려 할 때였다.

파아아아아…….

괴물에 모든 신경을 기울이느라 감지하지 못했던 주변의 변화가 느껴졌다.

흑룡궁에 머무는 동안 차게 식었던 몸이 급속도로 따뜻해졌다.

주변에는 오색의 구름이 차올라 있었다.

이무기의 무녀들이 부리는 오색 채운이 아니었다.

나는 이 채운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바로 용왕신을 만났을 때였다.

“용왕신님이 오셨어요!”

윤여랑이 활짝 웃으며 강림 의식으로 연 길을 올려다보았다.

오색 채운으로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길의 저편, 구름의 색만큼이나 오묘한 빛을 띤 용왕신의 비늘이 보였다.

의식이 성공해 용왕신이 현세에 강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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