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784화 (784/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84)

98. 송사 (1)

전이 후 붉은 사자 팀 빌딩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황지호도 결계를 쳐서 그런지 멀미가 덜했다.

도착하자마자 ‘이 몸의 결계가 어떠냐.’라며 힘자랑을 할 줄 알았는데, 예상외의 말이 나왔다.

“이만 돌아가겠다.”

명절 인사도 하고 그사이 있었던 일을 확인할 겸 잠시 머무는 게 낫지 않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호랑이들의 태도는 완강했다.

“여기 더 있다간 후안무치한 용들이 또 이상한 걸 떠맡길 겁니다. 열받는 일 생기기 전에 뜹시다.”

“거 참, 호족들 성질머리하고는. 선물 좀 줬다고 그리 아니꼬워하는가. 밥이라도 먹고 가게.”

“청룡, 너는 적호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았다.”

호랑이들은 내가 용궁을 받은 게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그런데 용궁을 그렇게 떠넘겨 놓고는 ‘선물 좀 줬다’로 표현하는 건 좀 잘못되지 않았나?

옥신각신한 끝에 황지호가 대기시킨 에어 리무진을 타고 호랑이 저택으로 향하게 되었다.

김신록은 내내 말이 없었는데 승차한 후에 적호를 보며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전이 중에 환청을 들은 듯합니다. 적호 님의 목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아들아, 많이 피곤했구나. 용족 놈들은 남의 집 아들을 지치게 하는 재주가 있다. 집에 가서 푹 쉬거라.”

아마 그건 환청이 아닐 거다.

그런데 아직도 적호를 적호 님이라고 부르나?

적호는 꼬박꼬박 내 아들이라고 부르는데, 김신록은 아직이다.

뇌호를 다루고, 이능파 링크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도 아직 적호를 아버지라고 부를 자신이 없는 듯하다.

“다들 고생 많으셨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현대식 별채에 도착하자 은호와 백호군이 마중 나왔다.

거실로 향하니 여러 종류의 한과가 담긴 그릇과 홀로그램들이 눈에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는 서류 더미가 쌓여 있었는데, 그 사이에 황지호의 어린 모습인 황유호가 있었다.

황유호는 한 손에는 조청으로 굳힌 빙사과를 들고, 다른 손으로 페이지를 넘기는 중이었다.

‘왜 좋은 명절에 황유호한테도 일을 시키지?’

아동 학대 아닌가?

아니, 황유호도 5천 살이 넘긴 했는데,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

대체 무슨 서류를 확인하는 걸까.

“이 몸이 보유 중인 부동산 목록을 보는 중이다.”

묻지도 않았는데 옆에 서 있던 황지호가 술술 말했다.

왜 재산 확인을 황유호한테 시키는 건가.

“부동산은 왜?”

“잘 물어봤다. 네게 줄 선물을 고르기 위해서다.”

순간 어이없음과 함께 죄책감이 밀려 왔다.

저 말도 안 되는 생각 때문에 황유호가 고생하고 있었단 말인가!

“용궁이라고 해 봤자 입지가 최악이 아닌가. 용궁에서 발생하는 부산물들이 제법 괜찮다고 해도 회수와 현금화 과정이 번거롭지. 호족의 은인에게 어울리고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걸 선물해 주마. 물론 소유권을 이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세금은 전부 이 몸이 내 주겠다.”

“됐어.”

용족이랑 기껏 동맹을 맺었으면 친하게 지낼 것이지 왜 자꾸 이상한 걸로 경쟁하려 드는 건지 모르겠다.

할 거면 날 빼고 했으면 좋겠다.

황지호의 말을 무시하려 했지만,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조의신, 일단 보고 말하는 게 어떠냐.”

말투는 똑같은데 황유호의 어린 목소리로 저러니 매몰차게 굴 수 없었다.

황유호가 착하게 고른 걸 어떻게 막 거절하나.

엄청난 고민 끝에 말했다.

“……보기만 할게.”

“네, 일단 보는 것부터 시작해야죠.”

은호가 말릴 줄 알았는데 말리기는커녕 부동산 목록이 정리된 홀로그램을 확인하며 말했다.

은호는 목록을 황지호한테 전송한 후, 차를 권했다.

피로 회복, 멀미 완화 효과가 있는 홍삼차였다.

“황호 님께 들었어요. 용족은 또 의신이 형한테 빚을 지게 생겼더군요.”

“용족만을 위해서 그런 건 아니야.”

“네, 알고 있어요. 의신이 형은 오씨 성을 가진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생각해 주셨겠죠. 그래도 의신이 형의 수 덕에 용족이 또 은혜를 입게 될 거예요.”

은호가 말한 대로 내가 둘 수는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오혜지를 위한 수이기도 했다.

오혜지는 곧 졸업한다.

고등학생 신분에서 벗어나니 더 자유로워져야 하는데, 오혜지는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오혜지가 수능을 못 보게 하려고 감금시켰던 그 미친 집안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렇다.

은광고의 학생이었기에 그 집안에서 손을 못 댄 경우도 있었을 텐데, 졸업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오혜정처럼 모든 걸 버리고 달아나지 않는 한, 오혜지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는 노릇이다.

그래서 사해 용왕과 오씨 집안과의 계약 건을 이용해 오혜지를 자유롭게 할 수를 두고자 했다.

“네가 둘 수는 이 몸이 개입할 여지가 적다만,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하도록.”

“선물이랍시고 쓸데없는 걸 넘겨도 말씀하십시오.”

그 안건 외에도 용궁에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 황지호가 분신을 통해 이야기를 해 뒀기에 간단한 확인 외에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크게 다치지 않아 안심했어요. 오래 붙잡아 뒀군요. 이만 본채로 가 보세요. 신수와 산령, 후예들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은호, 당신도 가는 게…….”

“좋은 날에 혼란을 일으킬 수는 없어요.”

“그 아이들은 당신의 등장을 혼란이라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억지로 저를 데리고 가시려면 적호 님이 백호 형님과 싸우셔야 할 텐데, 그러면 혼란이 일어나겠지요.”

은호가 말한 혼란은 그쪽을 말하는 건가.

은호는 갈 생각이 없는 게 확실했다.

백호군은 은호의 의지를 존중할 생각인지 서늘한 눈으로 적호를 바라봤다.

“백호, 은호를 생각한다면 같이 본채로 끌고 갑시다.”

“나는 동생의 의지를 존중할 것이다.”

김신록이 적호와 백호군을 불안하게 돌아보자 적호가 먼저 꺾였다.

이번 설에도 조손이 상봉하는 건 어려울 것 같다.

*    *    *

호랑이 저택 본채에서 명절다운 시간을 보낸 후, 손님 방으로 가 밀린 디바이스 메시지를 확인했다.

명절에 맞춰서 메시지를 예약해 뒀는데, 그에 대한 답변이 대부분이었다.

[홍규빈] 자리를 비운 사이에도 인사 준비를 했나 보구나. 의신아, 너도 새해 복 많이 받아.

[홍규빈] 이번 명절은 평화로웠다. 연휴 기간 동안 이틀만 출근한다!

[홍규빈] 늘 설날 같았으면 좋겠구나^^!

원래 연휴는 출근을 안 하는 날 아닌가?

홍규빈 본인은 행복해 보이니 괜찮은 걸까.

올해 시나리오나 흑막의 전력이 추가된 점을 생각하면 협회가 바빠질 테니 지금 쉬는 게 좋을 것 같다.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유상훈 이놈은 아직도 기분이 나빠 보이네.’

졸업식 날이 가까워질수록 유상훈의 기분이 나빠지는 것 같다.

몇 글자 안 되는 메시지에서 짜증이 느껴졌다.

유상훈의 기분이 어떻건 졸업식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    *    *

지상에 돌아온 다음 날, 2월 14일.

독고미로의 생일을 맞이하여 반 아이들이 모였다.

설 연휴 마지막 날이기도 하고, 발렌타인데이이기도 해 만나기 어려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이 모였다.

“미로야, 생일 축하해. 케이크는 초콜릿이 안 들어간 걸로 골랐어!”

“고마워!”

독고미로는 체리 크림으로 장식된 케이크를 보며 기뻐했다.

발렌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에 태어난 자들은 생일 선물이 초콜릿이나 사탕이 되는 저주를 받는다.

독고미로는 생일이 저래서 매번 선물로 초콜릿을 잔뜩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김유리가 생일 파티에 관해 독고미로에게 상담하자, ‘초콜릿이 없는 생일’을 강력하게 부탁했다.

이 사실은 독고미로의 팬들에게도 퍼졌다.

그 덕에 독고미로 생일 서포트 목록에 고급 초콜릿을 넣었던 금찬왕찬과 홈마 정해온이 개난리를 피우며 새 선물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 3학년 0반 부반장 선배놈은 눈치 없게도 결국 초콜릿을 가져왔지.’

독고미로는 일단 팬이 준 선물이라 기쁘게 받았지만, 2학년 0반 일당은 3학년 0반 부반장을 규탄했고, 선배놈은 눈에 띄게 슬퍼했다.

그리고 선배놈은 사죄의 마음을 해금으로 연주해 SNS 계정에 업로드했다.

연주자의 정신 상태와 연주하게 된 계기가 좀 그랬지만, 연주를 듣고 눈물을 쏟는 이가 나올 만큼 명연주라 화제가 되었다.

물론, 금찬왕찬은 독고미로 생일에 저딴 슬픈 노래를 연주했다면서 또 지랄했다.

그런 사소한 사건이 있긴 했지만, 간만에 반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기숙사에서 명절을 보낸 애들을 챙기지 못했는데, 독고미로 생일 때 봐서 다행이다.’

독고미로는 생일을 함께해 준 아이들에게 거듭 감사 인사를 했다.

최근 보컬 트레이닝이 뜻대로 되지 않아 고민이 많았던 것 같은데, 오늘 일을 계기로 잘 풀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훈훈한 연휴의 마무리를 끝으로, 다시 바쁜 주중이 시작되었다.

김신록의 훈련도 마무리되었고, 용궁 붕괴 시나리오도 끝났으니 다음 사건에 대비해야 할 때이지만, 지금은 다른 일로 경황이 없었다.

“의신아, 다인아, 어서 와.”

안다인과 함께 호랑이 저택을 출발해 도착한 상인관.

염준열이 우리를 발견하고 맞이했다.

상인관에서는 졸업식을 앞두고 사전 점검 및 리허설이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학생 자치 기구 소속은 아니었으나 이 자리에 올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은광고 차기 홍보 대사를 상대로 한 촬영일이었다.

“학생회로서 졸업식 준비를 돕지 못해 죄송해요. 촬영이 끝나는 대로 합류할게요.”

“아니야, 홍보 대사도 큰일이잖아. 작년에 해 봤으니까 잘 알아.”

안다인의 말대로 지금 우리는 차기 은광고 홍보 대사로서 이 자리에 왔다.

오늘 졸업식 준비 과정을 찍기 위해 전문 사진사가 은광고 교내에 있는 동안, 학교 홍보 자료 제작을 위한 촬영을 진행할 예정이다.

‘전문 사진사를 모시느라 보안 심사를 하기 번거롭고, 학기 중에는 더 바쁘고, 내일은 졸업식 당일이라 더 바쁠 테니 어쩔 수 없지.’

안다인과 염준열이 상인관 주변에 촬영지 배경으로 삼을 만한 곳을 체크하는 동안 생각에 잠겼다.

주수혁과 안다인의 존재를 직접 내 눈으로 본 건 입학식이 치러지던 이곳, 상인관이었다.

그리고 우연인지 몰라도 상인관(上寅館)과 안다인은 같은 한자 ‘범 인(寅)’을 쓴다.

‘안다인의 이름에 호랑이가 들어가 있었지. 조금 더 일찍 생각해 냈으면 안다인과 그 호족 부부가 더 빨리 만났을 텐데.’

사실 범 인(寅) 자는 성명학에서는 불용한자라고 하여 이름에 넣을 때는 피하는 한자다.

저 글자는 호랑이를 가리키는 한자인데, 12지가 들어가는 한자는 귀신이 붙는다는 속설이 있어 잘 쓰지 않는다.

사주상 선천명(先天命)에 필요하면 복이 된다고 하지만, 안다인의 부모였던 자들은 그걸 생각하고 이름을 붙였을 것 같진 않다.

‘하지만 그 덕에 호족다운 이름을 쓰게 되었으니 잘된 건가.’

안다인도 그런 연유로 제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하였고, 호족 부부의 양녀가 되는 과정에서 이름 한자를 바꾸지 않았다.

이름을 굳이 바꾸지 않은 건 주변에 눈에 띄는 걸 막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안, 녕. 의신아, 다인아…….”

“안녕, 얘들아. 아, 의신아, 어제 생일 축하해 줘서 고마워.”

주수혁의 패기 없는 목소리와 독고미로의 밝은 목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주수혁은 좀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독고미로의 등장으로 어쩔 수 없이 같이 나오게 된 것 같다.

안다인의 이름 건을 두고 잠시 생각하는 동안 그쪽을 보고 있었는데, 뭔가 단단히 오해한 게 분명하다.

아니, 왔으면 바로 안다인에게 말을 붙이고 인사를 해야지 뭘 그렇게 보다가 온 건가.

하지만 주수혁이 저렇게 생각하는 건 다 내 탓, 아니, 황지호 탓이었다.

‘무슨 수를 둬야 하는데!’

남의 연애사에 잘못 수를 두면 모든 게 망하므로 신중해져야 했다.

졸업식 준비와 홍보 대사 촬영 현장을 취재하러 온 문새론이 도끼눈을 뜨고 내게 가끔 살기를 날리는 게 느껴졌다.

동복, 하복, 체육복 등 은광고 공인 복장을 갈아입고 촬영에 임하는 사이, 계속 나는 다음 수를 생각하려 했다.

용궁 붕괴 시나리오를 막는 것보다 주수혁과 안다인 사이를 중재하는 수를 두는 게 더 어렵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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