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85)
98. 송사 (2)
‘큰일 났다.’
촬영을 마친 후에도 별다른 대책이 나오지 않았다.
분위기를 완화시키기 위해 대화를 이끌어 봤지만, 내가 말을 하면 할수록 상태가 악화되는 것 같았다.
주수혁과 안다인은 어색한 상태로 각자 선도부와 학생회로 향했다.
“수상한 부반장님아, 그냥 가만히 있을 거임?”
문새론이 인터뷰를 핑계로 내 쪽으로 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낮은 목소리를 냈다.
좋아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연애를 방해하는 게 아니지만, 내가 방해가 되는 건 사실이라 변명할 길이 없었다.
문새론은 자리를 비우기 전까지 계속 내게 눈치를 줬다.
독고미로가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고선 혀를 찼다.
“야, 평소엔 머리 잘 돌아가면서 왜 그래?”
독고미로는 아이돌, 급우 버전 대신 패왕스러움이 묻어나는 말투로 말을 걸었다.
은광구의 패왕께서도 주수혁과 안다인 커플을 응원하고 있었나 보다.
홍보 대사 중에 둘의 지지자가 늘어나다니 기쁘기 그지없는 일이다.
독고미로가 두 사람이 찍힌 사진을 보다가 부드럽게 말했다.
“잘 어울린다.”
“어, 아주 잘 어울려.”
“그렇지? 다들 카메라가 익숙한가 봐. 표정이 자연스러워.”
오늘 촬영 결과물에 남은 둘의 완벽한 모습을 보니 우울한 기분이 그나마 나아졌다.
여러 사진을 확인했는데, 독고미로가 확인 중인 사진에는 내 것도 있었다.
체스 기사 시절에 모델을 한 적이 잦아 카메라 앞에 서는 건 익숙했다.
그리 하고 싶지는 않지만, 못 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저렇게 말하는 독고미로 역시 아주 잘 찍혀 있다.
“너도 그래.”
“응, 엄청 노력했지.”
독고미로가 카메라에 느끼는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지 짐작도 안 갔다.
독고미로는 내가 체스를 다시 시작했을 때 맛본 감각을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방송 중에 느껴야 했을 거다.
비록 데뷔에는 실패했으나 독고미로의 약점은 강점으로 바뀌었다.
이제 독고미로는 무대의 위에서 모든 카메라를 인지하고 눈을 마주할 수 있다.
“자세한 건 말할 수는 없는데, 지금 어떤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있거든.”
독고미로가 노래 연습에 열중하는 걸 보면 짐작이 갔다.
독고미로가 꽤 큰 프로젝트에 참가했고, 현재 자세한 사항은 밝힐 수 없다는 것도.
나 외에도 반 아이들 대다수가 눈치챘지만, 굳이 캐묻지 않고 속으로 응원하는 중이다.
독고미로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꼭 내 노래를 들어 줬으면 좋겠어. 네가 제안한 버스킹 덕에 정말 많은 게 변했고, 지금의 내가 있는 거니까.”
독고미로가 반 아이들을 위해 단신으로 부린 깽판을 생각하면 내가 한 제안이나 수고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 점을 상기시켰지만, 독고미로는 ‘그래서?’라고 한 번 받아치고 별 감흥 없는 표정을 지었다.
독고미로는 나중에 노래나 들어 달라고 다시 한번 말하고 가 버렸다.
* * *
호랑이 저택으로 가니 역시나 촬영 얘기를 꺼냈다.
내가 사진을 넘긴 건 아니니까 이사장 권한을 남용해 확인한 듯하다.
“사진을 봤다. 잘 나왔군.”
황지호 주변에 홀로그램이 수십 장 떠 있었는데, 전부 내가 찍힌 사진들이었다.
은호도 내 사진 파일을 받은 건지 홀로그램을 드래그하며 정리 중이었다.
“하복을 입은 사진도 있네요. 춥진 않으셨나요?”
“조명 덕에 춥지 않았어. 이능파를 두르기도 했고.”
“의신이 형, 손이 식으셨네요. 차 드세요.”
괜찮다고 했는데도 은호가 찻잔을 내밀었다.
딱히 추위를 타는 건 아니다.
체스를 그만둘 때부터 손이 쉽게 차가워지곤 했지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장갑을 끼고 나서는 많이 나아졌다.
그런데 아직도 티가 많이 나나?
앞으로는 더 조심해야겠다.
“의신이 형, 숨기려고 할수록 더 걱정할 뿐이에요. 따뜻하게 하고 다니세요. 그게 어려우면 외출을 삼가는 것도 좋겠지요.”
나도 모르게 입으로 소리 내서 말했나?
호랑이들 표정을 보니 그냥 은호가 내 생각을 읽은 것 같다.
이능을 쓴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다 알아요.”
표정 하나 감추지 못하다니, 나는 체스 기사 실격이 아닐까?
오래전에 체스 기사가 아니게 되었지만 말이다.
결국 은호가 됐다고 할 때까지 계속 따뜻한 차를 마셔야 했다.
* * *
졸업식 당일.
상인관 주변에 인파가 넘쳐 났다.
사람들이 이 정도로 몰린 걸 보는 건 입학식 이후로 처음이다.
자치 기구 소속 학생들의 유도로 사람들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화려한 빛깔의 졸업 축하 현수막 아래에서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
“의신아! 만나서 다행이다. 사람이 많아서 졸업식 끝날 때까지 못 볼 줄 알았어. 연락이 안 되는 동안 잘 지냈지? 또 무슨 위험한 일에 휘말린 건 아닌가 걱정했어. 설에 자리를 비우고 연락이 안 될 정도면 큰일일 거라고 생각해서…….”
“길어.”
장남욱의 인사 겸 긴 잔소리가 유상훈에 의해 중단되었다.
장남욱은 그래도 나와 유상훈을 만난 게 반가운 건지 서운해하긴커녕 더 긴 말로 유상훈의 입을 다물게 했다.
유상훈은 말을 자르는 것도 귀찮아졌는지 장남욱의 말을 대충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후는? 같이 온다고 하지 않았어?”
“원우 형 만나고 온대.”
당연한 소리지만, 오늘 이 자리엔 도원우의 친척인 도시후도 왔다.
장남욱은 유상희의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지만, 도시후는 피가 이어진 도원우 쪽이 메인일 거다.
도시후가 유상희의 지인이긴 해도 친척 쪽이 우선이겠지.
“…….”
한편, 도원우의 이름이 나오자 유상훈이 갑자기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꽃다발을 꽉 움켜쥐었다.
유상희가 꽃다발을 너무 많이 받으면 처치가 곤란할까 봐 셋이서 하나를 주기로 한 건데, 저러다가 우리가 산 꽃이 망가지겠다.
‘요새 기분이 나쁜 이유가 도원우 때문인가?’
도원우는 TC 연구소 사건 즈음부터 단 한 번도 불쾌한 짓을 하거나 추하게 굴지 않았다.
그 이후론 유상훈과는 아예 엮이지 않았을 거다.
그 사건의 뒤처리 때문에 몇 번 대화할 기회는 있었겠지만, 사건이 어느 정도 수습이 된 지금은 그럴 일도 없다.
‘도원우가 마음에 안 드는 거라면, 졸업해서 속이 시원해져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졸업한다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섭섭하다.
하지만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다.
빨리 졸업했으면 하는 선배놈들도 있기 때문이다.
“나 졸업 안 할래, 으아아아아아!”
“나도 안 해! 아아아아아!”
“유급하자!”
어디선가 괴성이 들렸다.
굳이 확인 안 해도 곧 졸업한 선배놈이 될 현 3학년 0반 선배놈이 내는 소리일 거다.
돌아보니 독고미로의 팬들이 있었다.
“우리는 졸업 요건을 충족시켰어. 이제 와서 유급은 어려워.”
제대로 된 소리를 하는 선배놈도 있었다.
“그러니까 재입학하자! 미로가 있는 반에 편입하면 돼!”
이어서 미친 소리가 들렸다.
제대로 된 놈이 있다는 건 내 착각이었다.
독고미로는 2학년이 된 후에도 0반에 남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 반에 온다는 뜻인가?
상상만으로도 섬뜩해졌다.
순찰하던 자치 기구 학생들은 이 사태를 짐작하고 있었는지 침착하게 디바이스로 연락을 넣었다.
“임연화 선생님 불렀어. 오실 때까지 우리가 맡자.”
“준열이 불러야 되나?”
“준열이는 송사할 준비하느라 바빠. 내가 처리할게.”
자치 기구 학생 사이로 천동하가 나타났다.
천동하는 선배놈들과 직접 마주치지 않게 방문객들을 유도하도록 선도부원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이동했다.
바쁘고 정신없을 텐데도 침착하게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명절에 제대로 쉬지 못했을 텐데.’
천동하는 명절 기간에 은호를 만나러 왔다.
황유호의 모습을 한 황지호가 한 말에 의하면, 천동하는 피곤할 텐데도 기쁘게 은호와 설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천동하는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동생과 곧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있어서 기쁘다. 새학기가 기다려지는 건 오랜만이야.
TC는 옛날 오혜정이 표현했듯, 콩가루가 따로 없었다.
그리 좋은 가정환경을 갖추지 못했으니 천동하에게는 가족다운 가족이 없었을 거다.
그러다가 동생이 생겨서 정을 붙이게 되고, 그 동생이 진족이라는 걸 안 후에도 여전히 정을 가지게 된 것이다.
바쁜 틈에도 시간을 내서 명절을 같이 지내고, 동생이 입학하는 학기를 손꼽아 기다릴 정도로.
“은광고에는 좋은 선배들이 많구나. 날뛰는 분들이 좀 강해 보여서 걱정했는데, 금방 정리되겠다. 의신아, 들고 있는 꽃이 많은데 오늘 꽃 줄 선배들 많은 거 아니야? 일단 졸업식장에 들어가자. 미리 건넬 수 있을지도 몰라.”
장남욱의 말대로 오늘 졸업을 축하할 선배들이 많았다.
오늘 졸업해서 속이 다 시원한 3학년 0반 선배놈들.
같은 동아리 소속인 신문부 선배들.
입학 첫날부터 신세를 진 성시완.
플마고에서는 졸업하지 못했던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오혜지, 도원우, 유상희, 지명수.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일로 엮인 3학년들이 많았다.
“응, 가자.”
졸업식장 안.
꽃을 건네려 했던 인물 중, 제일 먼저 지명수와 마주쳤다.
지명수는 전 학생부회장이라 할 일, 만나야 할 사람이 많을 텐데도 3학년 0반 선배놈들이 난동을 부린다는 소식을 듣고 밖으로 나오려 했다고 한다.
인사를 하자 지명수는 곧바로 바깥 상황을 물었다.
“졸업 축하드려요. 3학년 0반 선배님들 건은 천동하 선배님께 맡기고 들어가셔도 될 것 같아요.”
꽃을 건네며 그렇게 말하자 지명수가 안심과 섭섭함이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그렇지. 이제 내가 할 일이 아니지. 졸업한다는 게 실감이 나네.”
“졸업 후에 바로 프로 플레이어 팀에 들어가서 이계 공략을 하시나요?”
“그럴 예정이야. 팀 마스터가 공략 스케줄을 직접 짜 주셨어.”
지명수는 졸업 후에 유명 프로 플레이어 팀, 수국향기에 입단한다.
수국향기의 팀 마스터는 백화난만으로, 예전에 축제 때 지명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등장할 정도로 지명수와 가까웠다.
팀 마스터가 공략 스케줄을 직접 짜 줄 정도면 다들 지명수에게 거는 기대가 큰 듯하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미래가 창창해 보여 내가 괜히 뿌듯해졌다.
‘백화난만은 전 홍의 무녀와 아는 사이라고 들었어. 용궁 소식은 들었을까?’
예전에 염방열이 전 홍의 무녀에 관한 정보를 정리해 줬을 때, 백화난만과의 친분에 관해서 알려 줬다.
만약 그녀가 배신자라면 프로 플레이어 팀과도 연관이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 좌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전 홍의 무녀는 이용당하긴 했으나 본인의 의지로 배신에 가담한 게 아니라고 밝혀졌다.
전 홍의 무녀가 그렇다는 게 밝혀져 염방열이 매우 안심했을 거다.
‘자칫하면 국내 4대 프로 플레이어 팀끼리 대립할 뻔했어. 잘 풀려서 다행이야.’
개인적으로는 전 홍의 무녀와 백화난만의 관계에 관해서 좀 더 자세히 캐 보고 싶긴 했다.
“곧 졸업식 시작하겠다. 먼저 가 볼게. 2층에서 보는 게 잘 보이니까 올라가서 봐.”
지명수의 말대로 졸업식 시작 시간이 가까워졌다.
나는 지명수를 배웅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서는 상인관 전체가 눈에 잘 들어왔다.
졸업을 맞이한 3학년들이 잘 보였다.
졸업식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