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789화 (789/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89)

98. 송사 (6)

도원우의 비서는 디바이스로 통화하는 척하며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비웠다.

정작 도원우는 비서의 말이 들리지 않았던 것 같지만, 비서가 사라지고도 별 반응이 없었다.

나도 비서처럼 자리를 떠야 했다.

내가 지금 완벽하게 모습을 감췄다고 해도 자리를 비워 주는 게 예의다.

‘그림자 없는 시간’을 오래 유지하면 광림 가용 시간이 크게 줄기도 하니 얼른 움직이는 게 최선이다.

하지만 움직이지 못했다.

‘둘의 사이가 더 틀어지면 어떡하지?’

유상희가 잔인하게 굴 리는 없지만, 도원우의 상태를 고려하면 작은 일에도 무너질 가능성이 컸다.

아니, 그냥 내가 지나치게 걱정한 것일 수도 있지만, 마음에 품은 근심이 무거워져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자초지종을 들으면 내가 나중에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고민 끝에 이 자리에 남기로 했다.

“학생회 아이들과 사진 한 장만 찍고 바로 돌아갈 줄은 몰랐어. 선생님들이나 다른 아이들이랑 사진 찍고 있는 줄 알았는데, 명수 말로는 네가 귀가 준비 중이라고 하더라.”

“……학생회 일로 찾아왔어?”

“학생회 후배들이 섭섭해하긴 했어. 유리랑 다인이는 기환이 일로 바빴잖아. 인사 못 한 애들이 많아.”

도원우는 최소한의 일정을 마치고 바로 졸업식을 뒤로했나 보다.

이번 졸업생 중 가장 많은 상을 받고 주목을 받은 인물이 도원우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정작 그 주인공은 인사도 제대로 안 하고 자리를 뜨다니.

TC 그룹이 개판이긴 하지만 도원우의 아버지인 차기 총수는 그나마 제대로 된 사람 아닌가.

졸업식 당일에 도원우를 부려 먹을 리가 없으니 그리 바쁠 일도 없을 거다.

그런데도 저렇게 갔다면 도원우가 답사를 할 때 느꼈던 것처럼, 정말 그가 미련을 떨치고 앞으로 나가려는 게 느껴졌다.

“나도 너랑 인사하지 못 했고.”

유상희의 말에 도원우의 안색이 흐려졌다.

유상희는 도원우에게 송사를 읊기 위해 온 걸까?

도원우는 작별 인사를 듣기 싫었던 건지 주먹을 굳게 움켜쥐었다.

유상희는 고개를 조금 기울여 도원우의 손을 바라보다가 얼굴을 보았다.

유상희가 고개를 움직이는 동안 잘 정돈된 머리카락이 조금 흔들렸는데, 도원우는 그 움직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런 얼굴을 하면서도, 이제 나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구나.”

도원우는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도원우가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전 학생회장다운 냉철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안하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어.”

그럴 리가.

유상희를 앞에 두고 떠오르는 말은 많을 텐데, 어디까지 말해도 좋을지 몰라서 그냥 침묵을 택한 걸 거다.

유상희는 표정을 감춘 도원우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예전에 원우는 항상 추하고 단순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훤히 보였어. 하지만 그날 연구소에서 만난 날 이후로 계속, 지금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미안하다. 네가 사과를 원치 않는다고 생각해서 말하는 게 늦었다. 나는 예전에 네게…….”

“추하게 군 걸 사과하라는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어. 그냥 정말로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서 한 말이야.”

유상희가 거듭 사과하려는 도원우의 말을 끊었다.

그 와중에도 ‘추하다’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써서 말하는 게 유상희다웠다.

플레이어블 캐릭터에게 관대한 시선을 가진 나조차도 추하다고 느낄 만하니 어쩔 수 없긴 했다.

“원우 네가 나를 몰랐던 것처럼, 나도 너에 대해 몰랐나 봐.”

어떻게 서로에 관해 훤히 알겠는가.

5천 년 동안 친우로 지내던 용제건과 김신록도 서로 모르는 게 있었다.

고작 10년 조금 넘게 알고 지낸 도원우와 유상희가 서로를 모르는 건 당연했다.

물론, 도원우가 유상희의 사정과 마음을 알고, 유상희는 사정을 안 도원우가 어떻게 대응했을 지 알았다면 많은 게 변했을 거다.

하지만 유상희의 잘못은 조금도 없었다.

도원우의 잘못은 있는 것 같긴 하다.

유상희의 괴로움을 알아채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을 우선시했으니까.

‘이건 나보다 도원우가 더 통감하고 있겠지.’

도원우는 겨우 표정을 감추고 있었지만,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눌러 담은 애정, 죄책감, 후회가 피부 밑에서 날뛰는 것 같았다.

유상희는 도원우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가 알던 추하고 단순한 동급생이 아닌, 눈앞의 도원우가 어떤 인물인지 알기 위해 관찰하는 것 같았다.

“원우야, 졸업식이 끝났으니까 나와 데…….”

저 말을 들은 순간 안다인에게 ‘대련해 줄래?’ 라고 청하던 주수혁이 떠올랐다.

설마 유상희도 도원우와 대련을 할 생각인가?

말이 대련이지 도원우는 유상희를 상대로 아무 짓도 못 할 거다.

공격은커녕 피하지도 않을 거다.

도원우는 추한 시절 유상희가 수도를 날릴 때마다 피하고 반격할 능력을 갖추고 있어도 온몸으로 맞지 않았던가.

졸업하기 전에 유상희가 도원우를 흠씬 두들겨 패고 싶다고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우연을 가장해 등장하여 말려야 하는 게 아닐까?

머리에서 여러 수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는 사이, 유상희가 말을 이었다.

“데이트 하자.”

저 짧은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건가?

정신이 혼미한 나머지 환청이 들리는 게 아닐까?

도원우도 비슷한 심정인 건지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추하지도, 전 학생회장답지도 않은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원우가 나를 몰랐던 것처럼, 나도 원우를 몰라. 하지만 나는 알고 싶어. 원우는 어떻게 생각하니?”

“그야 당연히……!”

“당연히?”

유상희가 되물었지만, 도원우는 솔직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동안 도원우의 지나치게 솔직한 표현은 추하지 않았던가.

누구나 추한 감정을 품을 수 있지만 이를 숨기고 자제할 줄 알아야 하는데, 사랑에 취한 도원우는 그동안 그걸 할 줄 몰랐다.

도원우는 고민 끝에 유상희의 의도를 나름대로 해석해 말했다.

도원우는 유상희가 복수 때문에 만날 기회를 원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상희야, 감정이 쌓여 있으면 네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다른 방법을 선택해. 그런 식으로 하지 않아도 나는…….”

“그 감정이 알고 싶으니까 알아가자는 거잖아. 알아가는 시간이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아.”

유상희의 말에 도원우가 입을 다물고 현실을 받아들였다.

정말로, 유상희는 도원우를 알아가기 위해 데이트를 청한 것이다.

유상희는 도원우에게 딱히 좋아한다고 고하거나 사귀자고 한 건 아니지만, 둘도 없는 기회였다.

끝이라고 생각한 관계가 다시 다른 방향으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도원우는 여전히 답변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가 말이 아니라 붉게 변한 낯빛으로 답변했다고 판단한 유상희가 청순하게 웃으며 말했다.

“교복 입고 데이트하고 싶으니까 오늘 해. 아, 그전에 선생님과 후배들이랑 인사도 하고 사진도 찍자.”

성인이 된 후에도 교복을 입을 수 있긴 하지만, 학생 신분일 때 입는 교복과는 느낌이 다르다.

사실상 은광고 학생으로서 교복을 입고 데이트 할 수 있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다.

유상희가 말을 마치자 도원우는 바로 비서를 불러 일정을 조정했다.

비서가 물러난 후, 그 옆에서 듣던 유상희가 물었다.

“예정이 있었구나. 중요한 스케줄이야?”

“아니.”

도원우가 단언했다.

“너보다 중요하지 않아.”

도원우가 오랜만에 밝게 웃었다.

추한 시절보다 몇 배는 온화하고 행복해 보였다.

그 일련의 과정을 본 나도 덩달아 행복해졌다.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구나.’

둘의 대화를 전부 엿들어 미안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이런 장면을 보게 되다니!

분수에 넘친 행운에 감격이 밀려왔다.

둘은 나란히 서서 주차장을 벗어났다.

언뜻 들리는 둘의 대화 내용은 오늘의 계획이었다.

두 사람이 부디 많은 대화를 나눠 서로를 알아가길 바랄 따름이다.

둘과 마주치지 않도록 다른 쪽 입구를 택해 나섰는데,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

“…….”

유상훈이 초조하게 주차장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상훈의 뒤에 쓴웃음을 짓고 있는 장남욱과 실실거리는 도시후가 보였다.

나는 즉각 광림을 해제했다.

“왁, 깜짝이야!”

“의신아, 너도 여기에 있었구나! 어디에서 나왔어? 은신하고 있던 거야? 레벨 엄청 높나 보다. 전혀 못 느꼈어.”

도시후와 장남욱이 갑자기 나타난 나를 두고 수선을 부렸지만, 유상훈은 뚱한 얼굴로 나를 볼 뿐이었다.

너는 뭔가를 봤을 테니 빨리 불라는 뜻인 것 같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시는 것 같아서 인사하지는 못했는데, 유상희 선배님과 도원우 선배님을 만났어.”

“……둘이 같이 있었다고?”

“어, 두 분은 다른 쪽 출구로 나가셨어. 사진을 더 찍고 인사를 나누다 가실 예정인 것 같아.”

“……둘이 같이 움직인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유상훈의 기분이 바닥을 쳤다.

혹시 졸업식을 앞두고 계속 기분이 나빠 보였던 게 이거 때문이었나?

도원우를 알고 싶다는 유상희의 마음을 눈치채고 저랬던 거라면 이해한다.

유상훈은 대화 내용은 다 못 들었겠지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짐작한 것 같다.

“에이씨…… 하필 저딴 놈이랑…….”

아직 사귀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알아가는 관계에서 어긋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때, 도시후가 눈치 없이 떠들었다.

“와, 원우 형이랑 상희 누나가 결혼하면 우리 사돈되는 거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간의 결혼!

상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만약 결혼식을 하면 두 번 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한 번은 신랑 측, 다른 한 번은 신부 측 하객으로 참석할 수 있으니까.

아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두 사람이 결혼하면 도시후와 유상훈은 사돈지간이 되므로 맞는 말을 했다.

정확하게는 맞긴 한데 처맞는 말을 했다.

“장남욱.”

“응, 알았어.”

뻐억!

말은 없었지만, 장남욱이 유상훈의 뜻을 바로 알아듣고 도시후를 향해 펀치를 날렸다.

깨끗하게 날린 잽이 안면에 꽂혔다.

심란해하는 유상훈을 두고 사돈 어쩌고 하니 맞을 만했다.

도시후는 맞았는데도 기분이 몹시 좋아 보였다.

저놈은 도원우가 정말 좋은가 보다.

*    *    *

졸업식이 무사히 끝났다.

준비했던 꽃을 주고자 했던 선배들에게 무사히 나눠줬고, 사진을 남겼다.

우기환 일당이 떠난 건 속시원했고, 다른 선배들이 간 건 섭섭했다.

‘하지만 그 빈 자리도 곧 채워지겠지.’

은광고의 주요 화제는 어느덧 새로 입학할 1학년에 관한 내용으로 바뀌었다.

입학식 준비가 한창인 가운데, 황지호가 식순을 확인하다가 말했다.

“0반에서 수석이 나온 건 오랜만이군. 성국언 이래 처음 아닌가?”

0반에는 늘 우수한 학생이 넘쳐 났지만 1등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작년 1, 2, 3학년 1등은 전부 0반이 아니었다.

그러나 올해 신입생 1등은 0반에서 나왔다.

황지호의 그 말을 듣자 수석과 0반 입성을 동시에 노리는 은서호와 은이호가 떠올랐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짐작은 하고 있겠지만, 1학년의 수석은 천은하. 바로 은호다. 신입생을 대표해 선서할 예정이다.”

그 말을 듣자 먼 옛날 천성헌이 신입생 대표로 입학 선서를 했던 게 떠올랐다.

이번에도 은호가 선서를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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