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790)
99. 새로운 1학년 0반 (1)
아마 천성헌은 나를 인식하지 못했겠지만, 나는 그가 입학식 때 선서하던 모습을 봤었다.
나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수석 입학하여 신입생 대표로 단상 위에 섰던 천성헌을 기억할 것이다.
지금은 입학 전형이 예전에 비해 다양해지고 복잡해져 수석을 가리기 어려워졌으나 나 때는 정시에서 가장 많은 인원을 뽑았다.
그래서 비교적 간단하게 그중에서 1등을 가려 신입생 대표로 삼고 장학금을 줬다.
‘나중에 입학 비리, 성적 관련 부정 청탁 의혹이 불거졌을 때에는 어이가 없었지.’
보통 그런 류의 비리나 부정은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법이다.
저렇게 눈에 띄게 1등 자리에 꽂아 넣지 않는다.
그 의혹의 불씨를 던진 건 천성헌 본인이지만, 교내에서 이를 믿고 그를 멀리하거나 부정 입학자 취급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천성헌과 한 번이라도 같이 수업을 들어 봤으면 의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천성헌이 무혐의라는 걸 알아도 집안에 문제가 생긴 걸 알고 피한 사람도 있을 거다.
‘그렇다 해도 학우인 천성헌을 그리 대해야 했나.’
천성헌이 집안을 무너뜨리기 위해 움직이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건 예전처럼 지내는 것뿐이었다.
내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아 천성헌을 많이 챙겨 주지 못했는데도 그쪽에서 늘 고마움을 표해 도리어 미안할 정도였다.
천성헌이 할 일을 마치고 속 편히 살겠다며 고시원 총무를 시작했을 때에는 놀랐지만, 예전에 비해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어 안심했다.
‘하지만 일하는 중에도 틈틈이 공부했었어.’
천성헌은 집안을 무너뜨릴 때에도, 고시원 총무로 일할 때에도 늘 무언가를 공부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공부하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가까이 지내다 보니 알아차렸다.
압도적인 학력은 무기가 된다.
천성헌은 그 힘에 관해 잘 이해하고 있었고, 은호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은광고 후배들은 1등 하기 힘들겠네.’
수석을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없는 한, 수석을 노리는 게 당연하긴 했다.
아무리 상대가 어리고 힘이 없어도 동년배 중 1등이라는 명함을 지니고 있으면 함부로 무시할 수 없다.
은호가 TC 내에서 입지를 굳히는 데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공동 수석을 노리던 은서호와 은이호가 안됐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은호더러 일부러 져 주라는 말을 하기도 어려웠다.
황지호처럼 작정하고 전 과목 40점을 받는 진족도 있지만, 은호처럼 최선을 다하는 진족도 있는 게 당연했다.
“의신이 형, 저희 1등 못 했어요…….”
“이번 1등은 실기를 포함해 만점이래요…….”
수석을 놓쳤다는 소식은 은서호와 은이호에게도 전해졌다.
둘은 기가 죽은 얼굴로 아쉬움을 표했다.
‘은호는 정말 봐줄 생각이 없구나. 필기, 실기 전부 만점이라니.’
은호는 실기에 약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다.
하긴 신화시대에 황지호를 상대로 승리한 적이 있으니 조건이 갖추어지면 무력도 잘 다루는 듯하다.
은서호와 은이호는 풀 죽은 얼굴로 황지호에게 물었다.
“황호 님, 저희는 그럼 몇 등이에요?”
“공동 차석인가요? 그렇죠?”
황지호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머뭇거리는 걸 보니 저 둘은 차석도 아닌가 보다.
황지호는 망설인 끝에 입을 열었다.
“차석은 다른 학생이다. 둘은 각각 3등, 4등이다.”
대답을 들은 은서호와 은이호가 힘없이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마침 산책하고 돌아온 천사가 둘 사이를 오가며 달랬지만, 충격이 큰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산책에 동행했던 산령은 맨발로 발을 동동 구르며 황지호를 노려봤다.
황지호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황지호는 산령이 노려봐도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은이호가 3등, 은서호가 4등임을 알려 줬다.
그 말을 듣고 첫째인 은서호는 더욱 좌절했고 은이호는 조금 기운을 차렸다.
‘그럼 그 차석은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인가?’
플마고에서 본 내용대로라면 원래 그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수석을 할 예정이었다.
자유로운 성격인 그 캐릭터는 성적이나 행사 등등에 연연하지 않는 타입으로, 입학 직전까지도 디바이스를 확인하지 않고 자유롭게 지내다가 입학 선서를 못 할 뻔했다.
가뜩이나 큰 사건이 터져 뒤숭숭한데, 수석 입학한 학생이 입학식 시작 직전까지 보이지 않아 은광고에서 도망갔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잠깐, 그러면 전교 1등부터 4등까지 다 0반인 건가?’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신입생은 0반이었다.
0반에서 최상위권 학생들이 나왔다고 해서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지만, 교사진들이 긴장할 것 같다.
우리 학년이야 다들 얌전해 문제가 없으나 선배놈들로 비유하자면 우기환, 금찬왕찬 일당 중에 도원우와 염준열이 들어가 있는 셈 아닌가.
같은 학년에 말릴 사람이 없이 다 0반 소속이면 교사 입장에서 아찔할 것 같다.
일단 물어보기로 했다.
“차석 한 신입생은 무슨 반이야?”
“1학년 1반에 배정될 예정이다.”
“0반이 아니라?”
“0반이라고 생각했나 보군. 면접관이 많이 고민한 듯하나 그 정도면 일반반에 배치해도 좋다고 판단했다.”
황지호는 내가 플마고와 지금 상황을 비교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 덧붙였다.
황지호는 생각만으로도 골치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눌렀다.
은호네 조손이 0반에 몰려 있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텐데, 또 다른 문제가 생긴 듯하다.
“올해에는 유독 특이한 학생들이 많아서 말이다. 0반은 수가 많으면 관리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가능한 한 스무 명 정도로 제한한다. 그래서 그나마 나은 학생인 차석은 일반반으로 보냈다.”
스무 명이 넘더라도 어지간하면 0반으로 보내지 않나?
그냥 특이한 학생이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수가 더 늘어나면 감당하기 어려워질 만한 수준의 문제아가 왔나 보다.
하긴, 은호네 조손들이 면접 때 한 걸 보면 저렇게 생각할 만했다.
그 말을 들은 은서호와 은이호는 갑자기 기운을 차렸다.
“와, 0반 경쟁이 치열했나 봐요!”
“차석은 빼앗겼지만 0반 자리는 지켰네요!”
왜 기뻐하는지 솔직히 이해는 안 갔지만, 기운을 차려서 다행이다.
은서호와 은이호는 차석도 못 한 0반 입성에 성공했다며 환히 웃고, 호랑이들도 덩달아 기뻐했다.
나도 얼떨떨해하며 축하 인사를 했다.
머릿속에선 플마고 속 상황을 계속 떠올리고 있었다.
‘플마고에서는 딱히 이번 신입생 0반을 두고 그런 일이 없었는데…….’
플마고 때와 달리 이번 1학년 0반에는 은호, 은서호, 은이호가 들어간다.
하지만 고작 셋이 늘어났다고 면접관이 골머리를 썩이며 차석을 일반반으로 보내는 건 이상하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게임 속에서는 은광고를 선택하지 않았던 괴짜들이 입학했나 보네.’
플마고 속 은광고는 여러 사건에 휘말리고 부패한 교사들로 엉망이 되었지만, 여전히 한국 최고의 명문고였다.
매년 입학 정원 이상의 지원자가 몰려들었고 양심 있고 뛰어난 교사들이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그럼에도 불길한 사건과 고문 탓에 은광고를 꺼림칙하게 여겨 택하지 않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모두 무사히 해결되었으니, 은광고에 더 많은 인재들이 모이겠구나.’
플마고 시절 때보다 괴짜가 늘어난다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은광고에 좋은 후배들이 늘어난다는 건 기쁜 일이었다.
* * *
입학식 준비는 졸업식 때보다 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졸업식보다 할 일이 줄었던 탓도 있었고, 개학을 앞두고 놀러 다니기에 바빠 사고를 치는 이들이 부쩍 줄었기 때문이다.
‘제갈재걸은 괜찮을까?’
금찬왕찬 일당은 졸업식 때 졸업생들이 제갈재걸에게 들이대는 걸 묵인하는 대신, 개학 전에 놀러 가기로 했다고 한다.
이들은 날을 잡아 전국 축제 순회를 했다고 한다.
선배놈들은 송어 축제, 새조개 축제, 눈꽃 축제 등 1박 2일 동안 날이 겹치는 축제를 찾아 돌아다녔다.
축제를 진행하는 스태프의 SNS 어카운트에 금찬왕찬 일행의 모습이 여럿 찍혀 있는 바람에 그놈들이 축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섭외된 알바생이라는 소문이 도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단체 여행을 한 사제들은 또 있었다.
바로 김신록과 안다인네 반이 그러했다.
‘김신록이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알자마자 바로 그런 기획을 하다니, 역시 타이틀 히로인 안다인답다.’
이들은 곶감의 도시로 유명한 경상북도 상주시로 여행을 떠났다.
척 봐도 김신록을 위한 여행이었다.
이들은 주민 90%가 감 생산에 종사하고 있다는 곶감 마을로 찾아가 체험 활동과 봉사 활동을 하고 왔다고 한다.
여행 중 안다인이 내게 사진을 몇 장 보내 줬는데, 사진 속에서 김신록이 쑥스러워하면서도 곶감 요리를 잘 먹고 있는 게 찍혀 있었다.
안다인이 적호에게도 김신록 사진을 보내는 바람에, 적호가 아들이 제자랑 얼마나 친한지 자랑하는 소리를 내내 들어야 했다.
‘곶감 여행 사진도 좋지만, 주수혁과의 대련을 찍은 사진을 갖고 싶은데…….’
주수혁의 대련 요청 이후, 두 사람은 개학 전까지 몇 번 만나 대련했다고 한다.
대련 결과는 물론 안다인의 압승이었다.
주수혁은 대련을 거듭하며 그 차이를 조금씩 좁히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대련 중 주수혁이 크게 마음이 흐트러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딸에게 도시락을 챙겨 주기 위해 호족 부부가 대련장을 찾았을 때였다.
‘그야 좋아하는 사람의 부모님과 예고 없이 만나게 됐으니 긴장할 법하지.’
게다가 호족 부부와 안다인의 외모는 상당히 닮지 않았는가.
그 부부의 얼굴만 봐도 주수혁은 안다인 생각에 넋이 빠질 거다.
대련을 참관한 호족 부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이의 친구도 잘 싸우더라고요. 실수는 많았지만, 그 나이대의 아이치고는 잘한 거지요. 뛰어난 소질이 있는 것 같았어요.
―반듯하고, 착하고, 우리 아이와 나란히 어깨를 할 만큼 재능이 있어서…… 우리 아이가 호감을 품는 것도 이해가 가지요.
호족 부부는 주수혁을 칭찬하는 말을 했지만, 어딘가 아쉬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주수혁의 어디가 아쉬운 건가.
안다인보다 약한 모습을 보여서 그런 걸까?
하지만 그 원인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사실 우리 아이의 마음을 몰랐을 때에는, 은인께서 우리의 가족이 됐으면 했답니다.
그 말뜻을 알아듣자 기겁했다.
설마 안다인과 내가 이어졌으면 했던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안다인은 이미 완전무결한 타이틀 히어로를 마음에 두지 않았던가.
주수혁이 오해하는 것도 그렇고, 둘과 적절한 거리를 둬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이 들었다.
“우리 반은 전원 2학년 0반으로 진학할 예정이다.”
혼란스러운 일도 있었지만, 좋은 소식도 있었다.
우리 반은 이탈하는 사람 없이 전원 2학년 0반이 되었다.
담임도, 부담임도, 등교 거부자도, 다른 반에 갈 자격이 있는 아이도 모두 남았다.
아직 전원 등교가 아닌 게 아쉽지만 말이다.
황지호에게 그 소식을 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등교 거부자를 찾아 헤매는 여행을 떠난 옹길동과 구슬비로부터 연락이 왔다.
[옹길동] 좋은 정보 고마웠다! 네가 한 말을 전하니 바로 귀국을 택하더군.
[구슬비] 걔, 한국으로 왔어.
악몽을 찾던 등교 거부자가 한반도에 온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