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15)
101. 흔적 (6)
야심한 시각, 황명 타워 최상층.
김신록은 시간이 흐를수록 제자들에게 더욱 주의를 기울였다.
적호는 그 옆에서 뭐라도 먹이고 마시게 하려고 안달이 났지만, 김신록은 해가 진 후부터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그렇긴 해도 고작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상태라 다른 호랑이들은 걱정은 해도 적호처럼 유난을 떨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 이 상황을 알고 있는 듯한 진족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용제건] 의신아, 뭐 해?
[용제건] 호족들이랑 신록이랑 국언이랑 무영이랑 네가 한자리에 모이는 건 드문 일이잖아. 궁금하다.
읽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이름이 보이자마자 읽고 말았다.
읽음 처리가 되자마자 다시 메시지가 쏟아졌다.
내가 메시지를 읽는지 안 읽는지 계속 지켜보고 있던 걸까?
용궁 사건 이후로 새로운 무녀를 맞이해 용족들이 바쁘다고 들었는데, 용제건 혼자 한가한가 보다.
‘윤여랑이 용족과 협력해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고 했지.’
자세한 사항은 듣지 못했지만, 새 무녀를 맞이하는 것 외에도 중요한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그걸 준비하느라 윤여랑은 만우절 때 금찬왕찬과 벌인 대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못했다고 한다.
윤여랑이 바빠 보여 도와줄 방도가 없는지 알아보려 했지만, 깜짝 놀래 주고 싶다면서 내 도움을 사양했다.
하여튼 그 용족과 무녀들이 한다는 일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용족들이 용제건은 그냥 은광구에서 놀도록 방치했을지도 모르겠다.
[용제건] 국언이랑 무영이가 밖으로 나오지 않은 걸 보니 아직 해산하지는 않았어. 하지만 디바이스를 확인할 여유가 있는 걸 보니 그거를 하는 중인가 봐.
[용제건] 둘은 나보다 오래 걸리나 보네. 간만에 만나서 인사하고 싶은데 얼마 정도 더 기다려야 해?
리플레이를 쓰기 위해 부른 걸 눈치챈 것 같다.
용제건은 경험자이기도 하니 저렇게 빨리 추론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여기서 대답을 안 하면 메시지를 읽고도 답변이 없어서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된다며 쳐들어올지도 모른다.
여지를 주지 않고 혼란을 막기 위해 순순히 답변하기로 했다.
[나] 오래 걸릴 수도 있어요. 두 분과는 다음에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용제건] 정말로 리플레이 중인가 보구나. 그것도 둘 다. ^^
내 대답을 확인하고 알아차린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이미 확신하고 있었을 거다.
그냥 속을 긁으려고 덧붙이는 불필요한 추임새라는 걸 아는데도 괜히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용제건] 나 여기에 있으니까 심심하면 불러.
[용제건] (사진)
[용제건] ^^
용제건이 첨부한 사진에는 황명 타워 내에 입점한 24시간 카페의 일부가 찍혀 있었다.
사진에는 거의 손도 안 댄 듯한 민트카페모카와 유리창으로 언뜻 비치는 용제건의 얼굴이 나와 있는데, 용제건은 메시지의 이모티콘처럼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단 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대체 왜 저런 음료를 시켜 놓고 혼자 웃고 있는 건가.
성국언과 전무영이 호족, 정확히는 김신록과 친해진 게 그리도 좋은 걸까?
“조의신, 그 사진을 보낸 건 용제건인가?”
“어.”
“이 주변에 있는 건 알았다만 황명 타워의 카페에 처박혀 있었다니.”
“왜 그 용이…….”
홀로그램으로 띄워 둔 사진을 보고 황지호가 한숨을 쉬고 김신록은 의아해했다.
적호는 ‘용제건이 오면 아들이 뭐라도 먹지 않을까’라고 생각한 건지 용제건을 부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때였다.
전무영의 안색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전무영 학생의 이능파가 불안정합니다.”
통찰 스킬을 사용하지 않아도 주변의 이능파가 흐트러지는 게 느껴졌다.
김신록은 제자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어 안절부절못했다.
안광을 발동해 전무영을 살피던 황지호가 침착하게 답했다.
“진정해라. 눈을 뜨기 직전의 징조다.”
황지호의 말대로 전무영은 곧 안정을 되찾았다.
리플레이에서 깨어나기 직전에는 다들 늘 상태가 악화되었다가 나아지곤 한다.
용제건 때보다 상태 악화 기간이 짧았던 걸 보니 전무영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 짧았던 것 같다.
게임을 통해서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지켜볼 때에는 치명상을 입으면 바로 조작이 불가능해지므로 얼마나 오래 버티고, 고통받다 눈을 감았는지 알 수 없었다.
‘고통스러운 순간이 짧아서 다행이다.’
악몽으로 밀어 넣은 주제에 할 생각이 아니지만 말이다.
곧 전무영이 눈을 떴다.
전무영은 눈을 뜨자마자 몸을 급히 일으켰다.
“국언이 형!”
전무영은 호랑이들이나 나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먼저 성국언부터 찾았다.
전무영은 곧바로 여전히 잠들어 있는 성국언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성국언의 이능파 상태, 호흡, 맥박이 정상인 걸 확인한 후 몸에 힘이 빠진 듯 전무영이 비틀거렸다.
바닥에 무너지기 전, 김신록이 다리에 힘이 풀린 전무영을 지지했다.
“김신록 선생님……?”
김신록과 눈이 마주치자 전무영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믿을 수 없는 걸 보는 것처럼 김신록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주변 상황을 확인해 볼 여유가 생긴 듯하다.
전무영이 나를 본 후에야 모든 걸 떠올린 듯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그랬죠. 이건 리플레이를 사용한 꿈이었습니다.”
전무영의 눈시울이 붉어졌다가 점차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전무영은 혼자 설 수 있을 만큼 평정심을 되찾은 후에도 김신록의 손을 밀어내지 않았다.
리플레이의 시작과 동시에 목숨을 잃었던 선생님이 곁에 있는 게 기쁜 듯했다.
전무영이 진정할 때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는데, 그사이에도 성국언이 일어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생각보다 시간 차를 더 두고 죽었구나.’
리플레이가 끝나는 건 악몽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시점이다.
악몽 속에서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 흐름을 비교하자면 성국언은 적어도 며칠은 더 산 듯하다.
어쩌면 며칠이 아니라, 몇 주일지도 모른다.
* * *
성국언은 오랫동안 어둠 속을 헤맸다.
어둠이 아닌 곳은 지옥이었다.
성국언은 체내 시간 감각이 이상해진 것을 감지했다.
‘내가 느낀 만큼의 시간이 흘렀을 리가 없다. 흘렀다고 생각한 시간에 비해 신체 능력이 쇠하지 않았어.’
무언가가 성국언의 감각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성국언은 자신이 정신계 이능에 삼켜졌음을 깨달았다.
‘이계에 휘말린 게 아니었나? 누군가의 이능에 당한 건가? 어느 쪽이든 나와 무영이를 납치하고, 격리하기 위해 큰 힘을 소모했을 것이다. 사람 둘을 없애자고 이런 힘을 사용하다니, 수지가 맞지 않았을 텐데.’
그저 국회의원을 죽이고 싶었다면 더 쉽고 간단한 상대들이 많았다.
성국언과 뜻을 같이하는 의원도 많지 않지만 존재하므로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행동이라면 다른 의원부터 건드렸을 거다.
단순히 정치적인 목적은 아닐 듯했다.
상대에게는 큰 대가를 치러서라도 성국언을 노리는 이유가 따로 있는 듯했다.
끼이이익…….
어둠이 사라지고 다시 지옥이 눈에 들어왔다.
성국언이 지키지 못한 자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성국언이 아쉬워했던 순간들이 반복되고, 죄책감과 책임을 통감했던 때로 몇 번이고 돌아갔다.
성국언에게 정신을 공격하는 스킬에 대한 면역이 없었다면, 상위 존재의 가호가 닿은 눈이 없었다면, 그의 의지가 조금이라도 약해졌다면 지옥에 삼켜졌을 거다.
‘이건 정신을 공격하는 이능이다.’
정신을 공격하는 이능을 이능파의 총량이나 강한 스킬로 대처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한 번 삼켜지면 물리적인 힘으로 대항하는 건 불가능하므로, 일반적인 이능 전투와는 다른 대처법이 필요했다.
먼저 공격의 방식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파훼의 실마리를 찾아야 했다.
‘저번 공격과 같은 패턴이다. 파훼를 했는데 어째서 다시 같은 공격에 휘말린 거지?’
이 지옥을 파훼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모호하게 흐려진 기억 속에서 자아를 되찾고, 과거에 후회를 남겼던 선택을 바꾸지 않고 다시 택하는 것.
간단해 보이지만, 지옥 같은 후회 속에서 자신을 찾은 후에 마음을 바꾸지 않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 패턴이 반복되고 있었다.
‘정신 공격은 한 번 파훼하면 주도권이 이쪽으로 와야 한다. 하지만 다시 어둠 속에 갇힌 후, 기억이 흐려지고 지옥에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생각이었다.
모든 게 무의미하다면 절망뿐이었다.
하지만 성국언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끝없이 사고하고, 싸우고, 저항했다.
몇 번의 지옥을 넘어섰을 때, 성국언은 깨달았다.
“그렇군. 내 공격이 의미 없던 게 아니야.”
지옥을 수차례 파훼하는 동안 성국언은 더 큰 어둠의 정체를 꿰뚫어 보았다.
반복되는 지옥은 거대한 어둠 속에 있었다.
정신 공격으로 인해 감각이 어그러져 알아채는 게 많이 늦어지고 말았다.
“내 감각을 속이기 위해 이중으로 이능을 사용하는 중인가 보군. 정신 공격을 이중으로 가하다니. 이능파 총량이 상당한가 본데, 이런 짓이야말로 무의미하다.”
끼익……!
성국언이 어둠의 정체를 꿰뚫어 보자 균열이 발생했다.
‘이상하군. 정신 공격을 받아쳤다는 감각이 들지 않아.’
정신 공격을 파훼해 역습을 노렸지만, 이상하게도 역습이 불가능했다.
성국언이 공격을 가하지 않았는데도 상대의 정신은 산산이 흩어져 있는 상태였다.
마치 실체가 없는 유령을 상대로 격투기를 한 기분이었다.
끼이이이…….
이윽고 균열이 점점 벌어져 어둠이 사라졌다.
드디어 어둠을 빠져나왔으나 성국언은 여전히 갇혀 있었다.
지금 성국언이 있는 곳은 현세가 아니었다.
‘지금 이곳은 이계인가? 아니, 일반적인 이계가 아니다. 여기는 ‘가든’이다.’
성국언은 육체적으로 한계가 가까워진 상태였다.
정신 공격을 받아쳐 상대가 약해진 틈을 타 구조를 요청할 생각이었으나 디바이스 통신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성국언의 눈앞에는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들이 있었다.
“폐인이 된 국회의원을 내보낼 생각이었는데, 그분 말씀대로 그냥 없애는 게 빨랐나 봐. 운사의 힘으로도 안 되네.”
“저 인간을 상대하다가 운사의 힘으로 유지되던 가든들이 여러 개 무너졌다고. 어쩔 거야!”
“바깥 상황은 뜻대로 됐으니까 괜찮아. 변명할 수 있어.”
아공간에 삼켜지기 전 보았던 쌍둥이가 있었다.
쌍둥이는 거대한 화로를 등지고 천진난만하게 대화하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화로 속의 무언가와 쌍둥이로부터 범상치 않은 힘이 느껴졌다.
성국언은 가호를 받은 눈으로 상대를 살폈다.
‘진족이다. 화로 속에서 불타고 있는 것 또한 진족이군.’
어째서 진족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불에 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저 쌍둥이가 힘과 힘으로 부딪치면 성국언이 결코 상대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성국언은 싸우는 대신 다른 길을 택하기로 했다.
‘……뒤를 맡겨야 한다.’
누군가가 자신의 실종을 알아차리고 추적할 것이다.
쌍둥이의 말에 의하면 무슨 수작을 부린 듯하나 수작질에 넘어가지 않은 플레이어들이 자신을 찾을 것이라 믿었다.
조금이라도 더 흔적을 남겨야 했다.
성국언은 기록과 단서를 남기기 위해 보이지 않게 디바이스를 조작하고, 메인 디바이스 외에 소지하고 있던 다른 기기도 조용히 가동시켰다.
“정신을 죽일 수 없다면, 몸을 죽일 수밖에.”
쌍둥이의 힘이 성국언을 덮쳤다.
성국언은 1초라도 더 길게 주변 상황과 쌍둥이의 대화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저항했다.
“시간 끌지 말고 얼른 죽여!”
“기다려 봐, 저 인간이 자꾸 피해서……!”
이능파와 체력이 바닥을 친 상태인 데다 혼자서는 제힘을 발휘할 수 없는 성국언의 광림 특성상 길게 버틸 수 없었다.
그러나 성국언은 최후의 격전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선전했다.
생각해 보면 어둠과 지옥을 파훼했을 때에도 그랬다.
성국언은 그때부터 줄곧 가장 효율적인 수를 두며 앞으로 나아가고 생존하는 시간을 늘리고 있었다.
성국언의 힘이 다해 쓰러질 때까지, 그는 최선의 수를 두었다.
‘혼자서 무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성국언이 눈을 감기 직전, 정치인으로서의 포부, 삶의 목표, 이루지 못한 것들이 아른거리다 사라졌다.
항상 머릿속에 품고 있던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 후에는 마음 한편에 밀어 두었던 생각이 떠올랐다.
성국언은 먼저 간 이들을 빠르게 차례대로 떠올리다가 마지막으로 제자보다 먼저 떠난 스승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