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816화 (816/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16)

101. 흔적 (7)

겉으로 보기에 성국언은 눈을 뜨기 전까지 계속 처음과 다름없었다.

이능파가 흐트러지지 않았다면 깨어날 때가 되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다.

‘잠들어 있을 때에도 약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구나.’

성국언은 자신을 믿고 뽑아 준 이들을 위해 약한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

김신록의 말에 의하면 학생 시절부터 계속 그랬던 것 같다.

저런 정신력이 있었기에 완전히 고립되어 죽음만이 남았을 때에도 흔적을 남기려 했을 것이다.

성국언은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은 채로 눈을 떴다.

“…….”

성국언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황지호가 별말 없는 걸 보니 이능파의 흐름이나 활력 징후는 정상 범위일 거다.

성국언은 눈을 뜨고도 평온해 보였다.

상황을 모르는 이가 봤으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도 못 할 정도로 성국언은 완벽하게 동요를 숨기고 있었다.

“의원님, 괜찮으십니까?”

성국언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전무영의 존재를 이제 깨달은 듯했다.

전무영의 목소리를 따라 움직였던 성국언의 시선이 김신록 앞에서 멈췄다.

성국언은 잠시 말이 없었다.

김신록을 보고 긴 악몽에서 깨어났다는 것을 깨달은 건지 성국언이 크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다녀왔습니다, 선생님.”

김신록에게 인사한 성국언은 리클라이너에 깊숙이 묻고 있던 몸을 일으켜 반듯한 자세로 앉았다.

성국언은 곧바로 전무영의 상태를 확인했는데, 역으로 걱정당한 전무영이 불만스러워했다.

긴 정신 공격과 죽음을 경험하고 온 사람이라곤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정돈된 모습이었다.

제자가 끝까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자 김신록이 더 괴로워했다.

성국언은 스승이 살아 있는 것을 보고 빨리 안정을 되찾은 걸 텐데 김신록은 그런 발상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 듯하다.

“많은 것을 보고 왔습니다. 이야기해야 할 게 많습니다.”

성국언이 그렇게 말하며 전무영에게 눈짓했다.

자신이 말할 테니 뒤로 물러나 있으라는 뜻 같았다.

훨씬 빨리 일어난 전무영이 더 흐트러져 있었는데, 상태를 염려해 배려한 거다.

전무영은 뒤늦게 자세를 바로 하고 표정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저도 괜찮습니다.”

전무영이 그리 말하자 성국언은 말리지 않았다.

둘의 의지가 확고해 보이자 황지호가 말을 걸었다.

“빠를수록 좋지만 서두를 생각은 없었다. 하나 본인이 원하니 이야기를 듣도록 하지.”

성국언이 시선을 돌려 황지호를 응시했다.

여전히 입가에는 보기 좋은 미소가 걸려 있는데, 위압감이 느껴졌다.

성국언이 입을 열었다.

“리플레이 도중 당신을 봤습니다. 2학년 0반에 전입한 학생이었죠.”

“이 몸과 마주친 적이 있나?”

“서류상으로 확인했을 뿐, 마주친 적은 없습니다. 시기나 배경으로 호족이라 추측했습니다. 하지만 호족의 수장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성국언의 얼굴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환몽 게이트를 두고 국정조사 중에 보였던 표정과 비슷했다.

성국언은 불신감을 대놓고 드러내진 않았지만,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 중요하고 절박한 때에 호족의 수장이 학생에 섞여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플마고를 하던 시절, 나도 성국언과 같은 심정이었다.

그런 와중에 이 세계에 와서 1학년 0반에 들어갔더니 황지호가 있어 말실수를 할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호족의 협력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리플레이 속의 내가 2학년 0반에 전입했다라.”

“마치 자신과 상관없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상관없다기보다는 모른다고 답해야겠군. 이 몸은 리플레이를 해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성국언은 내 쪽을 보았다.

황지호 때와 달리 온기가 흐르는 시선이었다.

황지호가 성국언을 대신해 질문했다.

“조의신, 리플레이로 이 몸을 선택할 수 있나?”

“아니.”

“아쉽게도 조건을 만족하지 못한 것 같군.”

여전히 황지호를 리플레이로 선택할 수 없는 상태다.

황지호가 퇴장하는 시기는 더 나중이니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단순히 시기 문제가 아니라 리플레이 단계 등 다른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질문은 더 없나? 그러면 이야기를 듣지.”

황지호는 자신을 향한 은은한 적의를 흘려 넘겼다.

전무영은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김신록의 얼굴을 봐 참는 것 같았다.

성국언은 조용히 황지호를 관찰하다 입을 열었다.

“먼저 리플레이의 시작, 현실과 꿈의 분기점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년 반 정도 되는 길이의 꿈에서 일어난 직후, 아무런 준비 없이 하는 프레젠테이션인데도 성국언은 막힘없이 말했다.

성국언은 리플레이와 현실의 차이, 중요한 정보를 명확하고 명료하게 짚어 내 전달했다.

원래 성국언이 연설을 잘하기로 유명한 국회의원이었지만, 실제로 들어 보니 감탄이 나왔다.

무제한 토론 방식의 필리버스터에서 혼자 대본 없이 수백 시간을 발언해도 성국언이라면 의미 있고 유익한 내용으로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지금 말하는 건 꿈도 희망도 없는 플마고 속의 정보지만 말이다.

‘그걸 직접 겪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동요하지 않고 말할 수 있다니.’

김신록, 적호, 용제건 셋이 보고서에는 감정을 절제하고 정보를 정리한 것처럼, 성국언도 자신이 본 사실만을 말했다.

적호는 보고서와 별도로 메모를 추가해 생각을 토해 냈는데, 성국언은 사람 눈에 닿는 곳에서 자신의 소감을 드러낼 마음이 아예 없나 보다.

사감을 억누르고 사실만 전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역시 성국언의 정신력은 남달랐다.

“벌써 해가 뜰 시각이 됐군요. 그러면 마지막 순간에 관해 이야기를 바로 하고 쉬는 게 좋겠습니다.”

아무리 간결하게 추려도 모든 이야기를 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게다가 성국언은 괜찮아 보였는데, 시간이 갈수록 전무영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전무영은 중간에 울컥한 기분이 든 건지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제자가 힘들어하자 김신록도 덩달아 힘들어해 성국언이 적당히 이야기를 줄이고, 가장 중요한 것을 전하기로 마음먹은 듯하다.

“스승의 날에 있었던 일입니다.”

성국언은 그날 자신이 목격한 것을 전했다.

성국언이 처음 납치된 정황을 정하자 황지호와 적호가 곧바로 반응했다.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쌍둥이라고?”

“홀로그램에 나온 자들과 비교해 주십시오. 이들입니까?”

적호가 풍백과 우사의 사진을 홀로그램으로 띄웠다.

크리스마스 사건 때 포획한 이후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풍백과 우사는 기절한 상태였기에 눈을 감고 있었지만, 이목구비를 알아보기에는 충분했다.

“네, 저들입니다.”

성국언과 전무영이 동의하자 적호가 낙담한 얼굴로 홀로그램을 꺼 버렸다.

풍백과 우사의 얼굴을 보기 괴로운 듯했다.

황지호가 말했다.

“그들에게는 저 정도의 플레이어를 단숨에 전이시키거나 포획할 능력이 없다. 아이템을 썼거나 다른 힘을 빌렸을 거다.”

“아이템을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직전에 손에서 빛을 뿜었는데, 직접 이능을 사용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둘이 직접 쓴 이능이라니…….”

“손에 무언가 새겨져 있더군요.”

성국언이 이능파를 사용해 허공에 무언가를 그렸다.

일종의 진(陣)처럼 보였다.

그 직후에 성국언이 경험했던 지옥을 생각하면 잊었거나 기억이 흐려졌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성국언은 풍백과 우사가 힘을 발동하는 순간을 아주 세밀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혹시 성국언은 지옥을 헤매면서도 그 순간을 되새기고 있었던 게 아닐까?

‘저 진(陣)은 크리스마스에 은광고에 침입하여 의식을 벌이던 진족들이 새기던 것과 같은 형태야.’

성국언이 그린 진(陣)을 알아본 호랑이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크리스마스에 어떤 진족들이 지력을 빼돌리기 위해 대규모의 작전을 수행했다. 은광고에 저 문양을 새기려 했지.”

“마족이 침입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진족이라 칭하는 것을 보니 마족만 온 게 아닌가 봅니다.”

“그렇다. 리플레이 속에선 의식이 성공했을 테니, 그 문양을 이용해 신역의 지력을 사용했나 보군.”

풍백과 우사는 은광구의 지력을 끌어다가 저 둘을 죽이는 데에 썼나 보다.

그리고 내 짐작대로라면 풍백과 우사는 지력만 쓴 게 아닐 것이다.

성국언의 말이 계속되었다.

‘게임을 할 때에도 느꼈지만, 성국언이 당한 정신 공격은 옛 한국 지부장의 광림과 비슷해.’

정신 공격 이능에는 일정한 파훼법이 있을 정도로 공통점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 둘은 대상의 과거를 헤집고 후회를 자극한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했다.

성국언의 말을 들을수록 그 생각이 더 강해졌다.

나중에 확인해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정신 공격 이능을 파훼한 후, 다시 그 쌍둥이를 만났습니다.”

그때, 가장 중요한 대목에 돌입했다.

성국언을 죽인 결정적인 수단이 등장했다.

성국언은 자신의 눈으로 봤던 것을 묘사했다.

특별한 가호를 받은 성국언은 그 자리에 진족이 셋 있음을 알아봤다고 한다.

둘은 쌍둥이고, 다른 하나는 화로 속에 있었다고 한다.

“쌍둥이는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배경 설명 후, 성국언이 그들의 했다는 대화를 한 글자도 빠짐없이 전했다.

성국언이 얼마 말하지 않았는데도 호랑이들의 기운이 삽시간에 흉흉해졌다.

쌍둥이가 했다는 대화 속에서 ‘운사’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운사의 힘이라니! 말도 안 됩니다. 운사는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망할 곰이 운사는 곧 죽게 될 것이라 지껄이지 않았습니까?”

적호가 주저 없이 부정했다.

적호의 태도를 본 성국언이 물었다.

“그들이 말하는 운사는 개천 신화 속에 등장하는 날씨를 관장하는 관리가 맞습니까? 한때 상위 존재였다던…….”

“그러겠지. 네가 본 쌍둥이는 풍백과 우사다. 그들은 상위 존재가 될 자격이 충분했지. 하나 신인을 따라 힘을 버리고 그들은 이 땅에 내려왔다. 분류하기 까다롭다만, 그들은 진족이다.”

풍백과 우사, 운사에 관해 언급되자 그 사정을 짐작도 하지 못한 전무영이 소리 없이 경악했다.

성국언은 리플레이 속에서 운사라는 단어를 들은 시점부터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는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들은 신화시대와 달리 호족과 대립하는 모양이군요.”

“그렇다. 그 사실을 깨달은 것조차 최근이지만 말이다. 그 셋은 먼 옛날에 전사했다고 생각했으니까.”

침묵이 흘렀다.

그 짧은 말을 통해 성국언과 전무영은 호족 내에서도 뭔가 복잡한 사정이 있음을 헤아린 것 같다.

이래서야 성국언이 운사에 관해 묻기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대신 묻기로 했다.

“운사가 다루는 힘에 관해 자세히 알려 줘. 대비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조의신, 리플레이 속에서 운사가 저 둘을 살해하는 데에 가담했다고 생각하나?”

“운사의 힘이 사용된 건 확실해.”

옛 친우들과 연관되니 황지호도 깨닫는 게 늦는 것 같다.

나는 운사를 의심해서 저런 말을 한 게 아니다.

“무지기와 구갈안나는 흑막에게 협력하진 않았지만, 그 힘을 이용당했잖아.”

“조의신, 설마 네가 생각하는 건…….”

두 진족의 이름이 나온 후에야 황지호도 그 생각에 미친 듯 말꼬리를 흐렸다.

적호와 김신록도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닫고 경악했다.

호랑이 중 백호만이 담담한 눈으로 내 말을 기다렸다.

“화로 속에 있던 건 운사일 거야. 운사는 무지기나 구갈안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겠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