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24화 : 대책 (7)
102. 대책 (7)
독고미로를 제외한 셋이 이 자리에 있었기에 자연스레 시선이 모였다.
학교 홍보 대사의 역할을 생각하면 당연한 소리긴 했다.
하지만 우리 학교에 우수한 플레이어가 많은데 굳이 나까지 나가야 할까 싶은 생각도 조금 들었다.
‘괜히 내가 교류전에 나가서 한 자리를 빼앗는 것보다 다른 애들에게 기회를 주는 게 낫지 않을까? 그리고 여름방학 때에는 시나리오를 대비해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염준열은 내 생각을 전혀 읽지 못한 건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홍보 대사분들은 학생회 측에서 예선 참가 신청을 해 두겠습니다. 그러면 다음 안건입니다.”
내가 의사 표현을 할 틈도 없이 주제가 바뀌었다.
훌륭한 선배이자 착한 제자인 염준열은 내 수고를 덜어 준답시고 저런 발언을 한 것 같아서 나쁘게 볼 수도 없었다.
착잡한 심정으로 다음 안건을 확인했다.
오늘 다룰 안건 수가 꽤 많았다.
‘작년보다 학생회 일이 늘었어. 사관학교와의 교류전도 예정되어 있고, 청소년 수련회 준비를 위한 업체 선정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해.’
일이 많을 텐데도 학생회 멤버들은 힘든 티 하나 내지 않고 깔끔하게 보고를 마쳤다.
선도부와 총동아리회의 보고도 훌륭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자치 기구의 장으로 있으니 과연 다른 것 같다.
영양가 있는 내용도 없고, 그리 정돈이 되지 않은 허술한 보고를 하는 자도 있었으나 좋은 학생들이 가득한 좋은 자리이므로 관심도 주지 않기로 했다.
한편, 허채아가 발표한 총동아리회 측 보고 내용 중에서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체스 소모임 스테일메이트에서 작년보다 체스 대회 일정을 늦췄구나.’
스테일메이트 측에선 사관학교 스포츠 교류전 즈음에 체스 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한다.
스포츠 종목에 체스가 추가되었으니 예선전으로 삼을 수 있도록 일정을 조정할 계획인 듯하다.
스테일메이트에는 옹길동이 소속되어 있는데 그 관종도 출전을 할지 모르겠다.
‘등교 거부자가 학교에 와야 출전할 것 같은데.’
이러다가 학사 일정이 전부 끝나면 관심을 받을 시간이 없어질 텐데 그건 생각해 두고 있는 건가?
관심에 눈이 멀어 중요한 것을 잊지 않을까 걱정이다.
* * *
늦게까지 피어 있던 벚꽃이 졌을 때, 1차 성적이 발표되었다.
‘우리 반에 재시험을 치르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다.’
맹효돈은 가채점 결과가 아슬아슬했기에 혹시 답안지에 실수하지 않았을까 걱정이 많았다.
걱정은 기우로 끝나 맹효돈은 한시름 놓았다.
다음 기말고사 때까지는 말이다.
‘1학년 수석은 은호라고 했지. 이번에도 열심히 했구나.’
1학년의 최상위권 등수는 입학 때와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은서호와 은이호는 은호는 물론이고 차석원의 벽을 넘지 못했다.
속상해할까 봐 달래 줄 겸 선물을 사 들고 호랑이 저택에 방문했는데, 의외로 괜찮아 보였다.
오히려 은호가 차석원을 이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은하는 0반이잖아요. 은하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예요.”
“맞아요! 너무 마음에 두지 않고 선의의 경쟁을 하기로 했어요.”
저렇게 말하는 후예들이 굉장히 의젓해 보였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심적으로도 성장한 걸까?
아니면 그저 천은하가 마음에 든 걸까?
은호는 여전히 선을 긋고 있던데 어떻게 후예들이 이리 따르게 된 건지 모르겠다.
피가 이어진 본능인 걸까?
황지호는 이 모습을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호족의 후예다운 마음가짐이로다. 급우와 잘 지내거라.”
“저도 선배 황호 님처럼 반 친구들이랑 많이 친해질게요!”
“저도요!”
황지호 버전은 ‘선배 황호 님’이라고 부르나 보다.
‘어린 황호 님’, ‘덜 어린 황호 님’, ‘늙으신 황호 님’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저쪽이 그나마 나은 것 같다.
“후예들에게 선배 소리를 듣는 것도 괜찮군.”
나이 차를 생각하면 선배 소리로 부족하지만, 황지호는 그 칭호를 마음에 들어 했다.
늙은 호랑이와 나이가 비슷한 은호가 나에게 형 소리를 하는 걸 생각하면 호랑이들의 나이 관념은 나와 많이 다른가 보다.
“이번에 1등을 한 덕에 TC 그룹 내에서 돌던 소문이 하나 잠잠해졌어요.”
“소문?”
“제가 부정 입학 했다는 소문이요.”
기숙사 식당에서 은호와 만나 식사를 하던 중, 저 이야기를 듣는 바람에 체할 뻔했다.
예전에 있던 세계에서도 그렇고, 왜 은호를 두고 자꾸 학력 논란을 물고 늘어지는지 모르겠다.
“감금 증후군에 시달리던 제가 수석을 차지하니 이상하게 보이나 봐요. 앞으로 계속 1등을 하면 헛소문은 완전히 불식되겠죠.”
“출제 동향을 확인하거나 질문할 게 생기면 연락해.”
“그럴게요. 고마워요, 의신이 형.”
충동적으로 돕겠다고 말하고 조금 후회했다.
질문할 게 있으면 나보다는 은광고의 수석인 천동하에게 묻는 게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뒤늦게 제안하려고 했으나 말할 틈이 보이지 않아 결국 말하지 못했다.
어쨌든, 은호가 TC 그룹 내에서 점점 입지를 다져 가서 다행이었다.
이렇게 중간고사의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별생각 없는 학생도 있었다.
“아, 재시험 뜰 줄 알았는데 다행이네. 플젯 OBT나 달려야지.”
“재시험 뜰 줄 알았다고?”
“어. 그래도 너네 반 돌아이보다는 잘 봤다.”
시험이 끝난 기념으로 유상훈, 장남욱과 만나 와플 버거를 먹는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유상훈이 필기를 좀 망친 건 알았지만, 상태는 매우 심각했다.
유상훈은 CBT가 끝난 후에도 녹화해 둔 게임 영상을 복기하고, 커뮤니티에서 정보를 확인하느라 공부에 손을 놓았다.
그나마 낙제를 안 한 건 OBT 기간에 또 시험을 치르지 않겠다는 일념 덕이었다.
‘황지호와 비교할 정도면 심각하다.’
전 과목 40점인 황지호는 단독 꼴찌를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다.
간혹 특정 과목에서 40점 아래로 받는 낙제생이 나오긴 하지만, 모든 과목을 종합하면 평균 점수는 40점을 넘어 버린다.
그러니 완벽한 40점을 유지하는 황지호의 단독 꼴찌에는 견줄 수 없다.
중상위는 가던 놈이 황지호가 어쩌고 하는 꼴을 보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독고미로처럼 확고한 꿈이 있다면 괜찮지만, 아니라면 성적을 유지하는 게 좋을 텐데.’
입시를 치르고 과외를 하며 뒤늦게 꿈이 생긴 사람이 학력에 발목을 잡히는 경우를 수없이 봤다.
학생이 가질 수 있는 무기 중 하나가 학력이므로 이를 쉽게 놓지 않았으면 한다.
다소 어렵긴 해도 성적을 유지하며 게임을 즐기는 건 가능하므로 열심히 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마음을 담아 장남욱을 부추겨 유상훈에게 잔소리를 하도록 유도했다.
“상훈아, 그게 정말이야? 사관학교에 그 게임을 했던 생도가 있지만, 상훈이처럼 시험을 망치지는 않았어. 상희 누나가 뭐라고 안 하셨어? 누나는 네 성적을 신경 쓰시잖아.”
장남욱의 말을 듣고 유상훈이 오만상을 썼다.
성적 건으로 유상희한테 수도로 얻어맞았나 보다.
그런데 보아하니 유상훈은 얻어맞기만 한 게 아닌 듯했다.
“하필 유상희 씨가 그놈한테 상담을…….”
유상희는 도원우에게 상담을 했다고 한다.
도원우는 추했던 것과는 별개로 성적은 매우 뛰어났으므로 상담 상대로 정해도 이상하지 않긴 하다.
유상훈이 도원우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점을 생각하면 그리 좋은 상담 상대라 볼 수 없지만 말이다.
도원우는 유상희를 집으로 바래다주다가 유상훈과 마주쳤는데, 그 자리에서 성적 상담을 하려 했다고 한다.
“그놈이 내 주먹을 피하면서 개소리를 했어.”
유상훈은 꺼지라는 의미를 담아 대충 주먹을 날렸는데, 도원우가 유상훈의 주먹을 피했다고 한다.
추한 시절의 도원우는 유상훈이 가족이 될 사람이라며 주먹을 다 맞아 주곤 했었다.
어쩐지 저 날은 맞아 줄 마음이 없었던 듯했지만 말이다.
“원우 형이 뭐라고 하셨어?”
“……맞고도 안 아플까 봐 피했대. 안 아프면 꿈이고, 꿈에서 깨야 하니까.”
유상훈은 질색을 하며 말했지만, 나는 도원우의 마음가짐에 감탄했다.
유상희랑 가까워진 게 꿈 같아서 저런 소리를 한 건가!
장남욱은 도원우의 의도를 짐작하지 못해 어리둥절해했고, 유상훈은 기분은 나빠 보였으나 후련한 표정을 했다.
우리 앞에서 토해 내고 싶을 정도로 도원우의 대사가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뜬금없는 도원우 이야기로 장남욱의 성적 관련 잔소리는 흐지부지되었다.
유상훈에게 책사 기질이 있는 듯하다.
* * *
1차 성적 발표 후에 이어진 이의 신청 심사와 성적 정정 기간이 끝났다.
최종 석차가 발표되자 염준열은 다시 사과의 말을 꺼냈다.
[염준열] (링크)
[염준열] 죄송합니다, 스승님. 이번에도 수석을 놓쳤어요.
링크에는 3학년 학생 중, 최상위권에 속하는 학생들의 등수가 기재되어 있었다.
[3학년 1학기 중간고사 최종 석차 발표]
[1등: 3-1 천동하]
[2등: 3-1 염준열]
[3등: 3-0 정해온]
…….
…….
…….
3학년이 되자 진로가 정해지거나 갑자기 열심히 하는 학생이 생기는 바람에 최종 석차에는 대격변이 일어났는데, 수석과 차석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염준열은 이번에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으나 천동하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그래도 염준열은 예전처럼 풀 죽지 않았다.
[염준열] 다음에야말로 스승님이 놀라실 만한 성적을 얻을게요!
[염준열] (스탬프)
스탬프에는 기운차 보이는 홍룡이 웃고 있었다.
이능파 링크에 관해 알게 된 후부터 염준열은 예전보다 더욱 기운차 보였다.
‘다음 수업은 이능파 링크와 엮어서 해 볼까.’
그러기 위해선 진족이 수업에 참가해야 할 텐데, 용제건을 부르면 쉽게 해결될 거다.
하지만 일정상 염준열과의 수업은 당분간 이루어지지 못할 듯하다.
[김유리] 의신아, 봄 소풍 일정 잡을 건데, 휴일에 언제 시간 되는지 알려 줘.
[김유리] 반 아이들이 다 괜찮은 날짜로 정할 예정이야! ^▽^!
5월에 가까워져 성국언의 암살 시나리오가 지척으로 다가와 주말에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렇긴 하나 소풍을 가기로 반 아이들과 약속했으니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소풍 외에도 일정이 생겨 버렸다.
[주수혁] 의신아, 효돈아!
[주수혁] 어린이날에 시간 내 줄 수 있어?
[주수혁] 구단 측에서 작년 사건에 활약한 플레이어들을 초대하고 싶다고 해.
[주수혁] 아, 시후랑 남욱이한테는 답변이 왔어. 괜찮대!
작년 어린이날 사건 덕분에 초대를 받았다.
올해 어린이날의 야구장 풍경은 어떨지 좀 신경 쓰였다.
게다가 이런 디바이스 메시지도 왔다.
[옥토연] 은인아, 은인아.
[옥토연] 어린이날에 야구장에 꼭 와야 해, 알았지?
[옥토연] 나도 갈 거거든? 시간 내기 엄청 힘들었거든? 갈 거지?
[옥토연] ㅡㅡ 빨리 간다고 해!
옥토연과 언젠가 야구장을 가기로 약속도 했었고, 다른 학생 플레이어는 다 왔는데 나만 빠지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
하지만 어린이날과 주말을 다 날리는 건 좀 곤란하다.
‘일정 조정이 어렵겠어.’
대책이 필요했다.
고민하고 있자니 황지호가 말했다.
“양해를 구해야겠지만, 간단한 방법이 있다.”
황지호는 어떤 제안을 했다.
황지호의 제안대로 하면 시간을 단축할 수 있으나 우리 반 아이들이 좋아할지 의문이었다.
취향을 많이 탈 것 같은 선택지였기 때문이다.
“하하하하! 우리 반 아이들은 찬성할 것 같다만. 일단 해 봐라. 이 몸이 제안하는 것보다 네가 제안하는 게 더 빠를 거다.”
대책이 없으니 황지호의 제안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반신반의했는데 우리 반 아이들은 정말로 흔쾌히 찬성해 주었다.
그 결과, 5월 5일 어린이날.
2학년 0반은 야구장으로 소풍을 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