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25)
102. 대책 (8)
주오 드래곤즈와 TC 나이츠의 홈구장, 잠실 야구장.
‘날이 맑아서 다행이다.’
맑고 쾌청한 하늘 아래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운데, 어린이날을 맞아 아이를 포함한 가족 단위 야구 팬을 위한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아직 시합이 시작되지도 않았으나 곳곳이 사람으로 넘쳐났다.
“와, 진짜 사람 많다.”
“정말 많네요. TV에선 경기장 밖을 잘 안 잡아 주니까 몰랐어요!”
독고미로가 한국시리즈에서 애국가를 불렀을 때 야구장에 오지 못했던 김유리와 사월세음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 오는 게 아닌 아이들도 오랜만에 느끼는 야구장의 분위기에 기분이 고양되어 있었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떠들썩한 우리 반을 흘끗 보곤 했다.
우리는 단체로 맞춘 어센틱 아이싱 티셔츠를 입고 있고, 모든 티셔츠에는 반 아이들이 적어 준 문구가 쓰여 있는 덕에 더 눈에 띄는 듯하다.
앞서 걷는 김유리의 문구는 함근형 선생님이 적은 ‘믿음직한 반장’이었고, 사월세음의 문구는 한이가 적은 ‘예비 현상금 헌터’였다.
“오, 저번에 왔을 때 순대볶음집은 없었는데.”
“추러스를 팔던 곳이 핫도그 가게로 바뀌었습니다. 아쉽군요.”
“우람아, 저쪽에서 추러스 팔고 있어! 자리를 옮겼나 봐.”
사람에 시선을 빼앗겼던 아이들은 점차 먹거리 쪽으로 눈을 돌렸다.
황지호가 지은 문구, ‘도 안 믿는 도인의 제자’ 티셔츠를 입은 맹효돈은 컵에 담아 파는 백순대 곱창 볶음과 양념 깻잎 순대 볶음을 각각 양손에 쥐었다.
목우람과 권레나는 저번에 왔을 때 먹지 못한 맛의 추러스를 노렸다.
목우람은 작년처럼 온갖 맛의 추러스를 권레나에게 사다 바치고 싶어 했다.
‘맹효돈은 저걸 주라고 쓴 게 아닐 텐데.’
목우람의 티셔츠에는 맹효돈이 적은 ‘얼른 줘라’가 쓰여 있었다.
같이 기숙사 생활을 하다 보니 목우람의 이능 바이올린 건에 관해 알게 된 맹효돈이 고민 끝에 적은 문구였다.
참고로 권레나의 문구는 진정묵이 작성했는데, ‘음공의 고수를 목표로 정진하길 바라오’라는 의미 불명의 내용이었다.
무림인으로서 건네는 덕담인 듯했다.
“한이야, 우리도 추러스 먹으러 갈까?”
“무설탕 메뉴가 없어 신경 쓰는 것 같더군. 하나 하루 정도는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
수많은 먹거리를 두고 고민이 많은 그룹도 있었다.
한이와 자칭 친우 둘이 있는 집단이었다.
독고미로는 김유리가 정한 ‘신곡 공개 기대해! *^▽^*’를, 황지호는 목우람이 적은 ‘40’을 티셔츠에 새기고 있었다.
하필 이곳이 야구장이라서 황지호의 문구 ‘40’이 등번호처럼 보이는 게 아쉬웠다.
저게 황지호 평균 점수라는 걸 깨닫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그리고 한이는 운 나쁘게도 독고미로에게 걸리는 바람에, ‘문경지우(刎頸之友)’라는 살벌한 문구가 새겨지고 말았다.
‘관용적으로 친한 친구를 가리키는 고사성어지만, 유래와 뜻을 따지면 가볍지 않아. 상대를 위해 목이 잘린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친우라는 뜻이니까.’
독고미로는 툭하면 친우가 어쩌고, 죽마고우가 어쩌고 하는 늙은 호랑이를 견제하기 위해서 저런 문구를 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견제와 상관없이 진심이기도 할 거다.
친구를 위해 단신으로 경찰서에 쳐들어가 다 박살 내는 패왕이니 말이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도 주목을 받다니.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서 온 보람이 있군.”
“우리가 주목받는 게 당연하지! 우아하고 눈에 띄는 천재의 파트너, 위대한 드루이디스가 여기에 있잖아.”
관종들은 야구장의 떠들썩한 분위기와 가끔 쏠리는 시선을 만끽하고 있었다.
독고미로를 발견하고 이쪽을 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대로 관종들에게 꽂혔다.
저 둘은 단체로 맞춘 티셔츠에 오로라빛 장식을 더해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하게 리폼했다.
장식의 모티브는 다소 뜬금없지만, 종다리꽃이었다.
민그린이 옹길동에게 ‘관광지의 종다리꽃’이라는 기묘한 문구를 써 줬기 때문이다.
‘지금은 삼간다지만, 송대석이 관종 소리를 하던 때가 많았으니 좋은 뜻을 붙여 주고 싶었겠지.’
민그린의 필사적인 노력의 결과 탄생한 관종 2행시에 옹길동은 아주 신사적으로 반응했다.
옹길동은 정중하게 감사를 표한 후, 존경하는 화백이 붙여 준 문구를 따라 종다리꽃 장식을 만들겠다고 했다.
구슬비는 그 광경을 보고 세상이 무너진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은 지난 테마파크 소풍에서 옹길동과 민그린이 한 조가 되어 보물찾기를 할 때 구슬비가 보인 것과 일치했다.
‘옹길동이 구슬비의 문구를 지정하게 되어서 위기를 넘겼지.’
옹길동은 구슬비에게 ‘우아하고 눈에 띄는 천재의 파트너’라는 말을 써 주었다.
천재는 옹길동을 가리키는 게 분명했고, ‘우아하고 눈에 띄는’이 수식하는 단어는 천재와 파트너 양쪽 다인 듯했다.
저 문구가 몹시 마음에 든 구슬비는 마음을 풀었다.
오로라빛 장식을 덧붙이는 건 두 사람뿐이라는 사실도 구슬비를 기쁘게 했다.
‘두 관종도 눈에 띄지만 솔직히 사람들이 가장 신경 쓰는 건 진정묵일 것 같은데.’
진정묵은 얇은 무복 위에 반 티를 겹쳐 입었다.
그 결과 두 관종 못지않게 기괴한 옷차림이 완성되었다.
게다가 티셔츠에는 구슬비가 작성한 ‘검객의 어둠 다크니스’가 쓰여 있었다.
대체 저게 뭔 소리인지 알 수 없었지만, 늘 같은 순서로 단어를 써먹으면 식상하고 눈에 안 띄므로 신선한 시도가 필요하다고 구슬비가 말했다.
진정묵은 ‘어떤 순서와 형태이든 정도(正道)를 걷는다면 문제없소.’라는 말을 하고선 저 문구를 받아들였다.
유형은 다르지만 특이한 애들끼리는 통하는 구석이 있는 것 같다.
“늦어서 미안하다.”
만나기로 약속한 출구에서 함근형 선생님과 합류했다.
함근형 선생님은 홍천 출장을 갔다가 오는 길이었기에 아슬아슬하게 합류하게 되었다.
앞으로 있을 시나리오를 생각하면 잦은 홍천 출장이 마음에 걸렸다.
‘작년만 출장이 잦았던 거라면 모를까, 올해도 이어진다면 시나리오와 관련이 있다고 봐야 할 거야.’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인파에 섞여 이쪽으로 접근하다가 갑자기 존재감을 드러낸 듯했다.
“다들 왔구나. 나도 왔어.”
나타난 건 용제건이었다.
용제건은 우리 반 부담임이고, 작년 사건에서 활약했기에 이 자리에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용족과 붉은 사자에서 다는 못 와도 몇 명은 왔다고 했지. 그런데 계속 반 티를 입고 돌아다닌 건가.’
용제건의 반 티에는 사월세음이 써 준 ‘승천 안 해요’가 적혀 있었다.
반 아이들과 합류하기 전엔 굳이 반 티를 입을 필요가 없을 텐데 내내 입고 다닌 듯했다.
반 티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승천 안 하는 걸 자랑하려고 그런 것 같았다.
“의신아, 반 티 잘 입고 다니는구나. 용족으로서 기뻐.”
내 반 티 문구는 ‘ㅇㅈㅇㅇㅇ’이고, 작성자는 용제건이다.
용제건이 반 티 문구 작성에 참가했을 때 반 아이들이 매우 긴장했는데, 희생자는 내가 되었다.
처음에 용제건은 ‘용족의 은인’이라고 썼으나 황지호가 극렬히 반대했다.
―조의신을 용족과 적대하는 자들의 표적으로 만들 셈인가.
―의신이한테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용족이 보호하면 되잖아?
황지호와 용제건의 신경전 결과, 초성으로 교체하는 것으로 합의를 마쳤다.
초성으로 바꾸니 다른 아이들의 문구에 비하면 평범해 보여 나름 마음에 들었다.
먹을 것을 한가득 들고 우리 반 아이들은 중앙석으로 향했다.
포수 뒤 중앙석은 확보하기 까다로운 자리였지만, 용족과 붉은 사자 팀 멤버들이 대거 불참한 덕에 자리가 나서 반 아이들이 다 초대받을 수 있었다.
“얘들아, 안녕. 다 왔구나.”
“와, 0반 애들 엄청 많아졌네.”
먼저 입장해 있던 주수혁과 도시후가 손을 흔들었다.
장남욱은 어디에 있나 해서 둘러봤더니 펜스 앞에 달라붙어서 주오 드래곤즈 선수들이 스트레칭하는 걸 구경하고 있었다.
‘장남욱이 입은 거랑 들고 있는 거 다 올해 발매된 새것 같은데.’
작년에도 굿즈가 이것저것 많더니만, 올해 또 새로 샀나 보다.
곧 인기척을 느낀 장남욱이 뒤를 돌아봤다.
“의신아? 아, 안녕! 이번에는 모자를 잘 썼구나. 반 아이들 몫도 네가 준비한 거야? 잘했어.”
장남욱은 나를 보자마자 잔소리를 하려다 만족한 얼굴로 멈췄다.
우리 반에는 사월세음처럼 미디어에 퍼지면 곤란한 아이도 있어 다 같이 모자를 썼다.
자리를 카메라의 사각에 배치하고 얼굴이 안 잡히도록 사전 교섭을 하는 등, 신경은 썼지만 대책은 많을수록 좋은 법이다.
“유상훈은?”
“처음엔 오려고 했는데, 원우 형이랑 상희 누나가 온다는 말을 듣고 그냥 게임이나 하러 가겠대.”
유상훈이 작년에 안 불렀다고 툴툴거렸기에 부르려고 했는데, 결국 안 왔다.
도원우는 작년에 유상희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다가 거절당해 여기에 오게 됐으나 올해는 유상희와 왔다.
사람 일은 참 모르는 것 같다.
“올해 시구자는 누구야?”
“작년처럼 발표가 안 됐어. 올해는 TC 나이츠가 홈이니까 용족은 아닐 거야.”
두 팀은 잠실 야구장을 같이 홈구장으로 쓰기에 이런 중요한 날의 홈 팀은 번갈아 가면서 한다.
작년에 주오 드래곤즈가 홈 팀이었으니 올해는 TC 나이츠가 홈 팀이다.
경기 시작 시간이 다가와 시구자가 마운드 위로 올라왔다.
시구자는 TC 나이츠의 마스코트가 착용하는 투구 모양 인형 머리를 쓰고 있었다.
“저건…….”
시구자를 시야에 담은 후, 황지호의 기분이 급격히 나빠졌다.
이윽고 시구자가 인형 머리를 벗고 얼굴을 드러냈다.
아는 자였다.
‘그래서 오라고 난리를 쳤구나.’
시구자는 옥토연이었다.
* * *
황명호 대저택, 본채.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호족들이 후예와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후예들은 처음엔 자신들은 어린이가 아니라며 불만을 표했지만, 호족들의 정성에 감화되었다.
“그럼 다음 선물을 열어 봐요!”
“어린 황호 님 바로 앞에 있는 거요!”
저택에 체재하지 않는 호족들도 선물을 보낸 덕에 확인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후예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선물 확인 작업에 착수했다.
다음 선물을 열어 본 은이호와 은서호가 탄성을 뱉었다.
“어, 의신이 오빠가 보낸 거다!”
“하나, 둘, 셋…… 우리 거만 있는 게 아니네요. 어린 황호 님 것도 있어요!”
황유호의 모습을 한 황호가 그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방금까진 기분이 가라앉은 것 같았는데 선물을 받고 유쾌해졌는지 소리 내어 웃었다.
“조의신이? 하하하하! 이 몸을 위해서 선물까지 마련하다니!”
조의신이 택한 건 정말 아이가 좋아할 법한 블록 장난감이었다.
황호가 알기로 조의신은 어린이날을 맞아 평소 후원하던 보육원에도 선물을 보냈다.
지금쯤이면 조의신이 신경을 쓰는 광일초의 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을 것이다.
또, 조의신이 선물을 보낸 대상은 더 있었다.
하나는 신수였고, 다른 하나는 산령이었다.
“자, 이건 산령 거!”
“……나?”
“응! 의신이 형이 산령 몫도 보냈어!”
산령이 선물 구경을 하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산령은 꽤 실체를 갖추게 되었는데, 얼핏 봤을 때에는 어린아이로 보였다.
겉보기엔 어려 보인다 해도 황유호의 모습을 한 황호가 그렇듯 어린아이라 할 수 없으므로 호족들은 산령 몫을 챙기지 않았는데, 조의신은 달랐다.
산령은 얼떨떨해하다가 기뻐하며 선물을 받아들였다.
산령의 감정이 선명해진 탓인지, 일순 그 실체가 더욱 분명해진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