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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830화 (830/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30화 : 헌화 (4)

103. 헌화 (4)

은광고 거주 구역, 2학년 건물.

지이잉……!

한이가 착용한 밴드 타입의 디바이스가 진동하며 아침을 알렸다.

눈을 뜨자마자 한이는 디바이스의 메모장을 켰다.

메모장에는 단어 몇 개가 적혀 있었다.

정체불명의 꿈에서 등장한 누군가가 한이에게 말하는 단어들이었다.

한이는 신중하게 단어를 확인했다.

‘알아볼 수 있는 단어가 늘었어.’

처음에는 무언가를 말하려 하는 것만을 알아볼 뿐, 형체가 잘 보이지 않아 입술의 움직임을 읽기 어려웠다.

점차 시간이 흐르자 한 단어를 알아들었지만, 그 이후로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눈을 가린 누군가가 꿈에 나오지 않을 때도 있는 데다가 아무리 노력해도 상이 잘 잡히지 않아 좀처럼 성과를 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한이는 독고미로와 한 대련에서 패배했다.

이를 계기로 한이는 강해지기로 마음먹었고 꿈에 정신을 팔 틈이 없어졌다.

그러나 꿈은 계속되었다.

‘단어가 늘었다는 건, 내가 또 성장했다는 뜻이겠지.’

고된 단련과 꿈이 반복되는 사이 한이는 어떤 것을 깨달았다.

바로 한이가 성장하고, 강해질수록 꿈 속의 존재가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똑똑하게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한이가 읽어 낸 단어는 다음과 같았다.

‘정체’, ‘소원’, ‘하늘’.

‘그리고 오늘 읽어 낸 단어는 ‘신인’이야.’

한국어로 ‘신인’이 의미하는 바는 여러 개지만, 무엇을 가리키는지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여태까지 읽어 낸 단어에 ‘하늘’이 포함되어 있었고, 상위 존재로 추정되는 누군가가 입에 담은 단어라는 점을 고려하면 개천 신화 속 신인(神人)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한이는 개천 신화의 내용을 떠올리며 추리했다.

‘하늘이 열리고 천신이 내려와 신성한 범들의 소원을 이루어 주었어. 신인은 천신의 아들이고, 신성한 범이 모시는 자였지.’

한이는 학교 수업에서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냉정하게 사고를 이었다.

개천 신화에 전해지는 백호, 황호, 청호의 소원을 떠올렸을 때, 문득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소원을 빈 건 신성한 범들뿐일까?’

천신은 신성한 범들이 외적과의 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기에 소원을 들어주었다.

하나 그 전쟁에는 신인도 참전했다.

천신은 신인의 소원도 들어주려 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신인과 신성한 범들 외에도 소원을 이룬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서가 부족해 생각을 이을 수 없었다.

혼자 생각하는 것보다 그 꿈에서 단어를 더 읽어 내는 게 확실할 거다.

‘그러기 위해선 더 강해져야 해. 정묵이한테 대련을 한 번 더 해 달라고 할까? 아니, 이번 주에 싸우고 싶은 상대가 있다고 했지.’

한이는 생각을 정리하고 나갈 채비를 했다.

아직 이른 시각이었지만, 이번 주는 반 친구가 걱정되어 일찍 등교할 예정이었다.

아침 단련을 마치고 등교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저 꿈을 파악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긴 할까? 그냥 단련에나 신경 써야 하지 않을까?’

기숙사 방을 나서기 전, 한이는 마지막으로 단어들이 떠 있는 홀로그램 메모장을 닫았다.

메모장을 닫은 뒤에는 독고미로의 노래가 포함되어 있는 게임 트레일러 영상 링크를 열었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골전도 이어폰이 작게 떨리며 귀에 진동을 전했다.

한이는 들을 수는 없었지만, 친구였던 아이가 부르는 노래에 귀 기울이며 등굣길에 나섰다.

독고미로의 노랫소리가 만드는 진동을 느끼니 오늘도 혹독한 단련을 이겨 낼 의욕이 솟았다.

* * *

토요일에 있을 스승의 날을 앞두고 은광고 학생들은 이벤트 준비에 바빴다.

담임 교사와 학생들이 그리 친하지 않은 학급은 이벤트 없이 조용히 지나갈 예정이었으나 대부분의 반은 달랐다.

특히 0반의 경우, 학년 가릴 것 없이 스승의 날을 대비해 움직이는 중이었다.

“슬비랑 루이스한테 연락했어. 꼭 오겠대. 선물도 가지고 온댔어.”

조례가 시작하기 전, 교실.

김유리가 관종들을 섭외하는 데에 성공했는지 밝은 얼굴로 말했다.

김유리는 옹길동이 없는 자리에서도 루이스라고 불러 주는 것은 물론, 전자 칠판에도 본명 대신 ‘루이스 페레나’라고 써 주었다.

김유리의 배려심 깊은 모습에 아침부터 감동했다.

“……걔들이 선물? 불안한데.”

송대석이 그리 달갑지 않은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민그린은 송대석의 저 말을 두고 친구끼리 해도 괜찮을지 고민하는 듯했다.

솔직히 나도 관종들의 선물을 불안하게 생각하니 송대석에게 뭐라 안 했으면 좋겠다.

“저기, 작년과는 다른 무언가를 준비하고 싶어!”

“레나, 작년에는 무엇을 했습니까?”

“그때 없는 애들이 많았지. 사진 보여 줄게.”

권레나가 작년 스승의 날에 찍은 사진을 보여 주었다.

막 민그린이 등교한 시점이라 등교생은 총 8명으로 지금에 비하면 사람 수는 적었을 때였다.

민그린이 그린 야생 카네이션을 감상하고, 다과회를 하는 모습이 매우 화목해 보였다.

그때 등교하지 못했던 몇 명이 조금 부러워하는 눈길도 보냈다.

“올해도 다과회는 하자. 학급 예산 많이 남아 있어서 웬만한 건 다 먹을 수 있어.”

김유리가 그때 없었던 아이들의 마음을 배려하여 말했다.

부러워하던 아이들의 얼굴이 좀 밝아졌다.

거기에 더해 사월세음이 의견을 제시했다.

“다과회도 하고 찬솔 선배님들처럼 화려한 이벤트도 하고 싶어요!”

“흠, 화려한 이벤트라. 학급 예산은 충분한가? 모자라면 증액하겠다.”

“……예산을 자기가 주는 것처럼 말하네.”

황지호의 헛소리에 독고미로가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사실 황지호가 헛소리를 한 건 아니고 독고미로의 추측대로긴 했다.

독고미로의 혼잣말 같은 발언이 들린 후에는 송대석과 김유리가 열심히 화제를 바꾸려 했다.

그 뒤로 반 아이들은 화려한 이벤트를 두고 여러 의견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하필 사월세음이 금찬왕찬에 관해 이야기하는 바람에 선배놈들이 스승의 날에 벌인 이벤트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왜 자꾸 금찬왕찬 선배놈들은 착한 사월세음에게 나쁜 물을 들이려 하는 건지 모르겠네.’

사월세음은 즉석에서 금찬왕찬에게 메시지를 보내 조언을 듣기도 했다.

그 조언에는 ‘선생님을 납치하는 방법’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납치 계획에는 내가 제안한 내용이 있어 말문이 막혔다.

나도 사월세음에게 나쁜 물을 들이고 있는 건가!

“이렇게 하면 함근형 선생님도 시간을 내 주실까?”

“조례나 종례 때 해프닝을 일으켜 선생님을 방심하게 하고 그 틈을 노린다라…… 기습에는 자신 없지만 시도는 해 볼 만합니다.”

“담임 선생님을 습격하는 건 미친 짓 같지만, 그 창천명궁을 기습하고 납치하는 건 도전해 보고 싶을지도.”

목우람은 그렇다 쳐도 독고미로까지 저런 말을 할 줄이야.

독고미로는 기본 상식인이지만, 싸움과 전투에 관련된 일에선 패왕스러운 면모가 강한 것 같았다.

한편 혼자 열심히 무언가를 고민하던 맹효돈이 ‘기습’이라는 말에 번쩍 고개를 들며 말했다.

“……도인한테도 저런 거 해 주면 되나?”

“도인 선생님은 효돈이가 기습하면 엄청 좋아하실 거 같아요!”

우리 반 아이들이 하기에는 과격한 내용들이 많은데, 좋아하는 애들이 많고 맹효돈도 기운을 차린 것 같으니 뭐, 됐나.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착한 우리 반 아이들을 믿고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계획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을 때였다.

“그런데 함근형 선생님 바쁘시지 않을까? 송 할아버지랑 홍천에 몇 번 가시던데…… 야구장에도 엄청 급하게 오셨잖아.”

“함근형 선생님은 5월 15일에 출장이 잡혔다고 들었어. 이벤트를 한다면 14일에 해야 할 거야.”

민그린의 말에 김유리가 답했다.

함근형 선생님의 일정도 미리 파악해 두다니, 역시 유능한 반장은 달랐다.

김유리는 이참에 반 아이들의 일정도 전부 확인해 둘 생각인 건지 한 명씩 질문을 던졌다.

한이 차례가 되었을 때다.

멍하니 있던 바람에 한이가 늦게 대답하고 말았다.

“한이야, 어디 아파? 아침 훈련 엄청 빡세게 하던데…… 아까부터 말이 없네.”

독고미로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마 한이에게 이상이 있었다면 이미 자칭 죽마고우 황지호가 생난리를 치며 양호실로 보냈을 거다.

한이는 그저 딴생각을 하고 있던 것 같았다.

‘요새 단련에 열을 쏟고 있었지. 마인드 트레이닝이라도 한 걸까?’

대충 가설을 세워 보긴 했지만, 어쩐지 답이 아닐 것 같았다.

속으로 훈련을 하고 있었다면 저런 멍한 태도가 아니라 날 선 기운을 품고 있었을 테니까.

한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마치 변명을 하는 것처럼 말했다.

“정묵이가 늦는다 싶어서.”

그러고 보니 진정묵이 보이지 않았다.

월요일에는 맹효돈 소식을 듣고 걱정한 건지 꽤 일찍 와서 교실 한구석을 지키고 있었는데,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등교 시간이 넉넉히 남아 있긴 하나 좀 알아보기로 했다.

반 아이들은 마치 짠 것처럼 디바이스를 켜 은광고 종합 게시판을 확인했다.

“아, 정묵이 목격담이 있어요! 또 싸우려나 봐요.”

“그 새끼가 또? 이번엔 누구랑 하냐?”

반 아이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도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맞으면 진정묵의 비무를 보러 가 응원하는 게 우리 반의 문화로 정착된 상태다.

진정묵이 누구와 싸우는 건 흔한 일상이 되었는데, 이번 상대를 확인하자 반 아이들이 놀라워했다.

진정묵의 상대는 나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수혁이랑 한다!”

“진짜? 다인이 불러야겠다!”

“얼른 가요! 자리 잡기 어려울 거예요!”

파죽지세로 은광고의 고수들을 꺾어 가고 있는 2학년 0반 소속 어둠의 다크니스 검객, 진정묵.

천재, 수재, 영재가 넘쳐 나는 은광고에서도 불세출의 재능을 타고났다고 칭해지는 완전무결한 히어로, 주수혁.

둘 다 검을 주 무기로 쓰는 플레이어들이니 언젠가 싸울 날이 올 거라 생각했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다.

목격 장소로 언급된 2학년 구역 앞 운동장은 사람이 꽤 몰려와 있었다.

하늘에서 에어보드가 이쪽으로 날아오는 게, 다들 소식을 듣고 오는 중인 것 같았다.

‘이른 시각인데도 이 정도로 사람이 오다니.’

지금 학교에 있는 은광고인들은 다 몰려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경구 형한테서 올 거라고는 들었는데, 이제 왔구나. 언제 나를 찾아올지 기다리고 있었어.”

“기다려 주고 있었다니 영광이오. 비무에 응해 주시겠소?”

주수혁이라면 절대 비무를 피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상대가 크게 다칠 가능성이 있거나 더 중요한 싸움이 있는 상황 등이 아닌 이상, 주수혁은 응할 게 분명했다.

“좋아. 대신 조건이 있어.”

“말씀하시오.”

흔쾌히 허락할 줄 알았는데 주수혁이 조건을 제시했다.

선도부원으로서 진정묵에게 요청할 게 있는 걸까?

“내가 이기면…….”

촤아악!

주수혁은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단숨에 애검 ‘두빛나래’를 실체화하여 휘둘렀다.

검이 만든 풍압과 이능파의 궤적 탓에 주수혁의 말이 들리지 않았고, 입 모양이 보이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그 조건이라는 걸 관중으로부터 감추고자 한 것이다.

왜 그랬는지 의문이었지만, 저 몸놀림을 보니 주수혁의 실력이 한층 더 상승한 것 같아 감탄이 나왔다.

“어째서 그런 조건을 건 것이오?”

“내 친구가 다른 친구들을 위해 위험한 일을 할 것 같아서.”

그다음 말은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건지, 주수혁은 다시 두빛나래를 카드화하였다.

진정묵이 주수혁의 뜻을 헤아려 그 조건에 관해선 입에 담지 않았다.

몇 초 후에 진정묵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의(人義)에 어긋나지 않는 조건 같군. 알았소.”

진정묵의 답변에 주수혁이 웃었다.

주수혁이 웃는 것과 동시에 선풍이 분 게 아닌가 싶을 만큼 환한 미소였다.

“고마워. 대신 내가 지면 곽 사범님과의 대련을 주선할게.”

“철혈쌍검 곽 대협과……! 정말이오?”

주수혁의 스승, 곽경구의 아버지 곽 사범은 쉽게 만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진정묵이 절흑풍림의 연줄을 이용한다면 모를까, 일개 학생 신분으로는 대련 약속을 잡기 힘들 거다.

“응. 내 수련 시간을 줄여서라도 자리를 만들게.”

그렇게 말한 후, 주수혁이 관중석을 둘러보았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주수혁이 내 쪽을 본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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