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31화 : 헌화 (5)
103. 헌화 (5)
심판을 맡은 함근형 선생님이 나타났을 때에는 운동장 주변 관중석이 꽉 찬 후였다.
관중석에 앉아 있는 이들 중에 흐트러진 교복 차림을 하거나 머리카락이 젖은 학생들이 보였는데, 소식을 듣고 급하게 준비해 온 것 같았다.
그만큼 주수혁이 싸우는 걸 보고 싶었나 보다.
“정묵아, 잘해! 수혁이도 파이팅!”
“선생님! 심판 잘 보세요!”
반 아이들의 인사를 듣고선 함근형 선생님이 복잡한 얼굴로 우리 쪽을 봤다.
아침 일찍 모여 싸움을 하러 온 반 아이, 또 그걸 구경하러 온 아이들을 보니 착잡한 심정이 드나 보다.
그래도 안 오는 애들보다는 나을 거다.
“다인아, 여기야! 자리 맡아 놨어.”
안다인을 발견한 김유리가 우리가 확보한 자리 중 제일 좋은 곳을 가리켰다.
대련 장면이 잘 보이고, 주수혁이 안다인을 발견하기 좋은 앞자리였다.
“고마워.”
안다인은 사양하지 않았다.
자리에 앉는 안다인을 본 주수혁의 목울대가 작게 움직였다.
혹시 주수혁이 안다인을 보고 긴장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눈에 총기가 넘치는 걸 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오히려 안다인이 보러 와 줘서 기쁜 것 같았다.
둘의 짧은 교감을 모르는 척 지켜보고 있으니 훈훈한 기분이 들었다.
진정묵이 이 장면을 연출하고자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몹시 고마웠다.
“각자 제자리에.”
함근형 선생님이 선언하자 두 사람이 자리에 섰다.
진정묵은 허리에 찬 연검을 뽑을 준비를, 주수혁은 손에 든 무기 카드를 실체화시킬 준비를 마쳤다.
“시작!”
카아앙!
시작 신호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주수혁의 두빛나래와 진정묵의 연검이 매섭게 충돌한 것에 이어 서로 맹공을 퍼부었다.
주수혁이 언제 두빛나래를 실체화했는지, 진정묵이 어떻게 주수혁의 앞까지 파고들었는지 보지도 못한 이들이 많아 여기저기에서 경악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난 횟수가 두 자리를 넘어간 후에야 둘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발검이 빠르네. 흑림의 검성께서 가르친 수제자다워.”
“주 소협이야말로. 곽 대협의 검을 이은 자답소.”
“소협이라고 불리는 건 처음이라 신선해.”
진정묵의 말투에 곤혹스러워하는 대신 주수혁이 부드럽게 말을 받아 줬다.
진정묵과 싸우는 자는 저 무림인 특유의 분위기, 의미 모를 어조와 행동, 변칙적인 연검의 움직임, 검은 연기를 뿌리며 이능파 숨기기에 집착하는 짓 등에 혼란스러워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주수혁은 이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독특한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넘쳐 나는 플마고에서 주수혁이 주인공으로서 중심에 섰던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주수혁은 남을 존중하고, 받아들이고, 배우는 솜씨가 남달라. 진정묵의 저 모습에서도 무언가를 배우겠지.’
다시 금속음이 수십 차례 운동장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관중의 웅성거림이 퍼졌다.
주수혁의 움직임 때문이었다.
짧은 시간에 진정묵의 검을 읽어 낸 주수혁이 그대로 받아치고 있었다.
‘다루는 검이나 보법이 달라서 완전히 같진 않지만, 주수혁이 그새 진정묵의 검법을 몸에 익혔어.’
주수혁은 진정묵의 검술을 응용하고, 움직임을 예측하고, 재현해 보였다.
쌍검은 연검만큼 유연하지 않았으나 이를 커버할 속도가 있었다.
그 결과, 마치 거울 위에 검날을 댄 것처럼 여러 차례 같은 위치에서 날과 날이 맞부딪쳤다.
주수혁이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챈 진정묵이 탄식했다.
“그 짧은 시간에 어찌……! 이게 그 불세지재(不世之才)란 말인가.”
“너도 내 검을 읽고 있잖아. 과찬이야.”
“그렇게 빠르게 자기류로 소화할 수는 없소.”
카앙!
검을 크게 휘두른 진정묵이 멀리 뒤로 물러났다.
진정묵의 검이 파우더블루색으로 시리게 빛났다.
연검에 해 둔 장치로는 본래의 색을 감출 수 없을 만큼 이능파의 출력을 올린 듯했다.
“그러니 따라올 수 없는 절기로 승부하는 수밖에!”
절기라면 파생 스킬을 말하는 건가?
진정묵의 모습이 심상치 않자 주수혁 역시 이능파를 끌어올렸다.
자연스럽게 든 쌍검에서 햇살 같이 밝은 이능파가 뿜어져 나왔다.
그때였다.
콰콰쾅!
천지가 뒤흔들리는 소리가 나며 강렬한 이능파가 공중에 퍼졌다.
주수혁과 진정묵이 움직이기 직전에 났으므로 범인은 저들이 아니었다.
“어? 왜 저기서 터졌지? 좀 화력도 센 것 같은데…….”
“왕찬 미친놈아! 폭약 조절 똑바로 안 해? 그리고 패널 똑바로 봐. 여긴 2학년 구역이잖아!”
“아, 맞다!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2학년 쪽을 지정했네.”
금찬왕찬이 멀리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게 들렸다.
하늘을 보니 에어보드를 타고 날아다니는 선배놈들이 보였다.
스승의 날을 앞두고 이벤트를 준비하다가 뭘 폭발시켰나 본데, 선배놈들은 자신들이 3학년이 된 걸 잊고 2학년 구역에서 패악을 부린 듯했다.
일부 관객들이 폭발음에 정신을 빼앗겨 대련장에서 눈을 뗀 사이, 형세가 완전히 기울어졌다.
‘승부가 났다.’
진정묵이 파생 스킬을 발동시키기 직전, 폭발음을 들은 그는 주수혁에게서 신경을 떼고 말았다.
진정묵은 주수혁 대신 우리 반 아이들을 돌아봤다.
여차하면 폭발하는 무언가와 우리 반 사이에 끼어들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에 반해 망설임 없이 주수혁은 앞으로 돌진했기에, 무방비해진 진정묵의 급소를 찌르기 직전까지 갔었다.
하지만.
‘주수혁이 검을 거뒀잖아.’
주수혁은 검을 거두고 처음 서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진정묵이 다시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인 듯했다.
“준비가 되면 다시 시작하자.”
“……어째서.”
“0반 애들 쪽을 봤지. 저 정도 폭발은 선생님과 친구들이 막을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진정묵은 큰 소리에 집중력이 흔들린 게 아니라 우리 반 아이들을 걱정했을 뿐이었다.
중간고사를 함께한 전우인 데다 매번 비무를 할 때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와서 응원을 하니 정이 들었던 게 아닐까?
주수혁은 은광고인들의 실력을 믿었기에 대련에 집중했지만, 진정묵은 그러지 못했다.
그 믿음의 대상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면 정말 영광일 것 같다.
“끝을 낼 수도 있었는데, 어째서 물러났소?”
주수혁은 기다리겠다고 했지만, 진정묵은 납득하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주수혁이 답했다.
“운으로 이기고 싶지 않아. 검으로 승부를 내자.”
“운이 아니오. 소생의 집중력이 부족했소.”
“내가 저 폭발을 일으킨 거라면 운이 아니겠지. 하지만 내 상황에 맞춰 발생한 우연한 폭발은 운이야.”
여전히 진정묵이 검을 들 생각이 없어 보이자 주수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운만으로는 안 돼. 내가 어느 정도 강하다는 걸 보여 주지 않으면, 믿음을 주지 못할 것 같거든.”
그렇게 말하는 주수혁의 눈빛이 흐려졌다.
그 얼굴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명계에 뛰어들기 전, 천익산에서 주수혁은 저런 눈을 하고 나를 보고 있었다.
저 말을 듣자 진정묵이 다시 연검을 들어 올렸다.
“……알았소. 다시 승부를 내겠소!”
“그래.”
그 대답에 만족한 듯 한 번 웃고는 주수혁이 준비 자세를 취했다.
주수혁이 양팔을 팔자(八字) 형태로 내린 채로 쌍검에 이능파를 흘리자,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저 모습을 보고 주수혁의 이명을 입에 담는 학생들도 있었다.
‘‘역광의 나래’를 상징하는 자세니까, 당연한 거겠지.’
주수혁의 이명은 ‘역광의 나래’.
이 이명에는 두 개의 뜻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첫 번째는 지금 이 모습이다.
주수혁이 양팔을 가만히 내린 채로 검을 쥔 준비 자세에서 쌍검에 이능파를 흘리면, 마치 빛을 등진 날개처럼 보였다.
나래는 날개를 의미하므로 이명다운 모습이었다.
두 번째는 주수혁의 천재적인 검 실력을 가리키기도 했다.
‘역광(逆光)을 한자로 풀어서 의미를 따지면 빛을 거스른다는 뜻으로도 읽혀. 그리고 주수혁의 검 이름은 두빛나래지.’
빛을 거스르는 검.
주수혁의 이명, 역광의 나래는 빛의 흐름을 바꿀 정도의 검을 의미했다.
햇살 같던 주수혁의 이능파가 한순간 태양처럼 눈부시게 빛났다.
파아아앗!
주수혁의 쌍검 중 하나가 검은 연기를 뿌리는 연검의 장치를 베고, 다른 하나는 진정묵의 명치 앞에 멈추었다.
장치가 멈춰 검은 연기가 사라지자, 허공을 벤 진정묵의 연검이 보였다.
“그만!”
승부가 났다고 판단한 함근형 선생님이 선언했다.
“주수혁 승!”
와아아아아아!
환호가 쏟아졌다.
진정묵과 악수한 주수혁이 환호하는 관객들을 향해 웃어 보였다.
두빛나래와 이능파를 거두었는데도 여전히 역광이 비추는 것처럼 빛났다.
주수혁이 우리 반 쪽에도 손을 흔들었기에 더욱 열렬히 박수갈채를 보냈다.
* * *
방과 후.
주수혁과 진정묵의 비무에 관한 화제로 점철된 하루를 마쳤다.
두 사람의 움직임을 온전히 읽어 낸 학생들이 그리 많지 않았기에 해설 요청이 폭주하여 신문부에서는 바로 특집 기사를 내기도 했다.
‘진정묵은 졌는데도 기뻐했지.’
인터뷰를 할 때, 진정묵은 어느 때보다 기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진정묵이 쉬지 않고 비무를 거듭하는 건 그저 이기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함께 절차탁마하고, 조언을 구할 상대를 찾고 있었던 듯했다.
―첫 번째 목표는 달성했으나 앞으로도 비무를 계속 이어 갈 생각이오.
진정묵은 오늘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수련을 할 예정이지만, 비무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함근형 선생님은 앞으로도 심판으로 활약하게 될 것 같다.
승자인 주수혁은 언론과 접촉이 잦은 플레이어답게 완벽한 태도로 인터뷰를 마쳤다.
인터뷰를 마친 주수혁이 내게 물었다.
―의신아, 대련을 보고 어떻게 생각했어?
그야 완벽한 타이틀 히어로, 노력하는 천재다운 명승부였다.
이러한 소감을 온전히 표현하기에는 시간과 나의 표현력이 부족하여 간단히 말하자 주수혁이 웃으며 말했다.
―다인이랑 대련하면서 깨달은 점이 많아. 그 점을 보완해 가며 성장할 거야. 지금보다도 훨씬 강해질게.
주수혁의 저런 말을 들으니 감동이 솟아올랐다.
이 세계의 주수혁이 플마고 속의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주수혁보다 강해지는 건 먼일이 아닐 것 같다.
게다가 그 과정이 혼자서가 아닌 안다인과 함께라는 점이 가슴을 벅차오르게 했다.
하루 내내 그 인터뷰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는데, 그걸 보고 황지호가 뭐라고 했으나 좋은 말은 아니라 기억과 마음에 두지는 않았다.
행복한 마음으로 기숙사에 돌아갈 때였다.
“우리 반 부반장이 수고가 많네요. 고마워요.”
“마땅히 제가 할 일이니까요.”
인적이 드문 산책로를 택해 돌아가던 중, 아는 이들을 마주쳤다.
공청훤과 은호였다.
둘은 1학년 0반이 준비하는 이벤트 건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은서호는 비밀리에 준비한다고 한 것 같던데, 공청훤은 진작에 알아차렸나 보네.’
은호는 자신이 안전하게 이벤트를 준비하게 도울 테니 공청훤에게 모르는 척해 달라 부탁했다.
공청훤은 이를 받아들여 이렇게 은호로부터 보고를 듣는 중이었다.
인사할 타이밍을 놓쳐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선생님, 휴일에는 은광구와 주변 구를 순찰하신다고 들었어요.”
보고를 마친 은호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공청훤은 선량하게 웃으며 답했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산책을 순찰이라고도 표현하나 보군요.”
“산책이라고 말씀하셨나요?”
은호의 말씨는 부드러운데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은호가 나한테 ‘그 단어’를 말할 때와 비슷한 분위기다.
“위법 아이템 밀거래 현장을 제압하거나, 밀입국한 진족의 흔적을 더듬어 아지트를 특정 짓거나, 이계 발생 후 지표면에 남은 유해 이능을 안전 장비 없이 제거하는 행위를 산책이라고 하기는 어렵지요.”
은호와 공청훤은 웃고 있는데, 나는 웃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