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36)
104. 곁 (1)
어둠 속, 긴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새기는 자가 있었다.
거대하고 정교한 진(陣)을 내려다보는 눈이 흐렸다.
채워져야 할 부분이 비어 있었고, 짙게 새겨져 있어야 할 곳이 희미했다.
죽여야 할 자가 아직 살아 있고, 살생부에 이름이 떠오르는 것이 멈춘 탓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가 구현한 힘의 결정체는 악의와 사기(邪氣), 증오로 흉흉한 기운을 뿜고 있었다.
팔랑.
어둠 저편에서 아주 작은 바람 소리가 들렸다.
나비령이 보낸 나비가 날갯짓하는 소리였다.
나비령은 늘 목소리를 내기 전, 이렇게 조심스럽게 기척을 전해 그의 심기를 헤치지 않도록 주의했다.
곧이어 나비령의 달콤하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명을 받들기 위해 왔습니다.”
나비령이 말하자 그가 움직였다.
그가 손바닥으로 허공을 쓸자 세찬 기운이 감돌던 진이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그가 나른한 음성으로 나비령에게 입실을 허락했다.
끼이이…….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나비령의 나비가 편린을 뿌리며 앞을 밝혔다.
나비령은 나비가 뿌린 비늘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나비령의 뒤로 넷이 따라오고 있었다.
편린이 남긴 빛이 넷의 모습을 비추었다.
날개가 달린 자.
긴 꼬리와 머리카락을 가진 자.
머리에 눈, 귀, 입, 코가 없는 자.
굽어 있는 뿔을 가진 자.
저 넷은 하나같이 인간의 형상에서 크게 벗어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파스스…….
이윽고 길 안내를 마친 나비령의 권속이 산산조각 나서 흩어졌다.
그가 허락하지 않은 곳에 들어가면 권속이 조각나고, 나비령은 그것을 가늠해 멈춰 서곤 했다.
나비령이 가루가 된 나비의 잔해를 밟고 고했다.
“사흉(四凶)을 모셔 왔나이다.”
나비령이 안내한 네 존재는 선한 자를 짓밟고, 악한 자에게는 머리를 조아리는 사흉이었다.
그들이 상대를 섬기는 기준은 악의의 존재 여부와 그 크기였다.
어둠 속에 있는 자는 사흉이 전심전력을 다해 섬길 만한 거대하고 순수한 악(惡) 그 자체였다.
사흉은 악의를 달콤하게 빚어 만든 듯한 나비령을 호의적으로 대했는데, 그의 앞에 서니 방금 보인 호의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절절한 환희와 충의를 표했다.
‘나의 악의는 그분 앞에서는 하잘것없구나.’
악의를 민감하게 느끼는 사흉의 앞에 서니 더욱 절절하게 느껴졌다.
그자의 거대하고 섬뜩한 계획 앞에서 나비령이 벌인 수작은 고작해야 미물의 날갯짓에 불과했다.
나비령 앞에서 태연하게 굴던 사흉이 당장이라도 그에게 말을 붙이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었다.
나비령은 고개를 깊게 숙인 채로 아쉬움을 삼켰다.
사흉을 상대로는 우마왕에게 썼던 방법은 통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보고하라.”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날개가 달린 자, 궁기(窮奇)가 고했다.
“명을 받들어 마계에서 귀환하였습니다. 다음 명을 기다립니다.”
사흉 중 가장 강하다고 칭해지는 자답게 궁기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고, 말할 때마다 톱날 같은 송곳니가 날카롭게 빛났다.
말하는 것만으로도 위협적이었으나 궁기가 그를 보는 시선은 상냥하기 그지없었다.
그만큼 그가 품은 거대한 악의에 심취한 탓이었다.
“나는 보고를 듣겠다고 했다.”
궁기가 제대로 된 보고를 하지 못하자 그가 눈을 뗐다.
대신 긴 손가락을 들어 올려 궁기의 옆을 가리켰다.
길게 뻗은 손가락 끝이 긴 머리카락과 꼬리를 가진 자를 향하자, 지목된 도올(檮杌)이 입꼬리를 길게 휘며 거만하게 웃었다.
그자가 궁기를 제치고 자신을 택했다는 것이 도올을 만족스럽게 했다.
“우리가 확보한 마계의 길에 관해 보고하겠다. 이능 사용 허락을.”
“허락한다.”
도올이 머리카락을 하나 뽑아 이능을 흘리자 더욱 길게 자라났다.
길게 뻗은 머리카락이 어둠 속에서 빛나며 지도를 그렸다.
도올은 지도를 가리키며 마계에 있던 사흉의 여정에 관해 보고했다.
그자와의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마계의 길잡이 역할을 한다는 마족이 도착하기 전까지, 사흉은 몇 번이나 소멸의 위기를 겪으며 그자의 명령을 수행했다.
목숨이 걸린 여행기를 들으면서도 그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가끔 추가 보고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나른했으며, 긴 손가락을 들어 지적하는 모습은 냉정하기에 짝이 없었다.
그럼에도 사흉은 조금의 불만도 표현하지 않았다.
“보고는 여기까지다.”
도올이 보고를 마치자 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를 치하하는 말도 없이 고작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도올이 기쁘게 웃었다.
이번에 그자는 목소리에 이능파를 실어 말했다.
[가까이 오라.]
그자가 부른 것은 동상처럼 굳어 자리를 지키던 혼돈(渾沌)이었다.
눈도, 귀도, 입도, 코도 없었으나 혼돈은 피부로 그자의 음성을 듣고 네발로 기어 그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자는 이목구비가 존재하지 않는 혼돈의 매끈한 얼굴 위에 손을 올렸다.
혼돈은 온순하게 그 손길에 몸을 맡기곤 피부를 통해 제가 본 것들을 전했다.
‘혼돈은 다른 사흉보다 앞서서 귀환해 한반도를 살폈지. 무슨 명령을 내린 걸까…….’
정보 수집에 능한 나비령이라 해도 저 둘의 의사소통 과정은 엿볼 수 없었다.
혼돈은 이목구비는 없으나 독심술에 능했고, 가장 탐욕스럽게 정보를 삼켜 피부를 통해 그자에게 보고했다.
혼돈과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다른 사흉조차 혼돈과는 제대로 된 소통을 한 적이 없으니, 나비령이 끼어들 틈은 거의 없어 보였다.
‘혼돈으로부터 정보를 얻는 게 힘든 만큼, 그 가치는 크겠지.’
그렇다고 해서 나비령은 손을 놓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사흉이 돌아온 후, 나비령은 혼돈의 움직임을 가장 주의 깊게 살폈다.
혼돈은 은광구의 주변을 지켜보고 있었다.
‘혼돈은 시선이 들키지 않도록 거리를 크게 두고 있었어. 은광구를 드나든 자에 관해 보고하는 걸까?’
혼돈이 지켜본 시기에 은광구를 드나든 거물은 한둘이 아니었지만, 유독 나비령의 눈에 띄는 집단이 둘 있었다.
포모르 마족과 절흑풍림.
최근에는 잠잠한 듯했지만, 저 둘이 묘한 움직임을 보였다는 건 나비령도 기억하고 있었다.
또, 웅족 또한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진웅팔선의 권속이 은광구 주변을 감시하듯 지켜보며 움직였었다.
그러나 혼돈이 이에 주목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아아, 목소리는 듣지 못하더라도 눈빛을 읽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정말 어려워.’
나비령은 혼돈의 움직임, 그자와 주고받는 이능파의 흐름을 빠짐없이 머릿속에 새겼다.
그자와 혼돈이 피부를 맞대고 있던 건 고작 1분 정도였다.
그러나 온 힘을 다해 집중한 바람에 나비령은 체감상 몇 시간은 흐른 기분이 들었다.
나비령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애쓰며 계속 고개를 숙였다.
혼돈이 그자의 곁에서 물러나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을 때였다.
“새로운 명을 내리겠다.”
그자가 다시 긴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번에 가리킨 것은 굽어 있는 뿔을 가진 자, 도철(饕餮)이었다.
자세를 낮추고 있던 도철은 자신이 지목당하자 히죽거리며 웃었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도철은 이곳에서 가장 강한 힘을 지닌 그를 몹시 따랐다.
“네, 네. 하명하십시오!”
도철이 굽신거리며 그자의 명을 기다렸다.
그자는 진이 새겨진 종이를 도철에게 건넸다.
“방도는 그곳에 적혀 있다. 확인하라.”
“저 혼자 말입니까?”
“힘이 닿지 않는다면 다른 사흉의 힘을 빌려도 좋다.”
비굴해 보일 정도로 굽신거리던 도철이 멈칫했다.
궁기와 도올이 도철을 보고 있었다.
혼돈은 듣지 못했지만, 그와 도철이 말을 주고받는 중이라는 건 감지하고 있었다.
‘힘이 닿지 않는다면’이라는 말은 수천 년을 산 도철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러나 도철은 이 넷 중 무력으로 따지면 가장 약했다.
여기에 있는 것은 강자뿐이니 자존심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배려에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요!”
도철은 속없이 넙죽 엎드려 종이를 움켜쥐었다.
숙인 머리 아래로 예기를 품은 눈이 잠시 번뜩였다.
명령 하달을 마친 그가 말했다.
“이상이다. 물러가라, 사흉.”
궁기, 도올, 도철이 제각각 물러가겠노라 대답하고, 이능파를 감지한 혼돈이 뒤늦게 꾸물거리며 움직일 준비를 했다.
나비령은 자연스레 일어나 저들을 인도하려 했다.
그러나 그 전에 그자가 말했다.
“나비령은 남도록.”
“알겠습니다.”
나비령은 곧장 사근사근 답했다.
대답을 들은 그자가 손짓했다.
그자가 가리킨 곳은 그동안 풍백과 우사가 지키고 있던 곁이었다.
나비령은 그 손짓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는 기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녹을 것처럼 웃던 나비령이 사뿐히 곁에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나비령은 그자의 곁에 가까이 다가간 게 황송하고 기뻐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눈에 담은 도철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문밖으로 나간 도철이 곧장 불만을 터뜨렸다.
“그분의 곁은 원래 풍백과 우사가 지키던 자리가 아니었습니까? 그분은 어찌 그런 미물을!”
도철에게 있어 나비령은 약자였다.
도철은 다른 사흉과 그자는 몰라도 나비령에게는 얼마든지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다.
그러자 도올이 비웃듯 말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그동안 그분이 왜 풍백과 우사를 가까이 두었는지 모르는가?”
“그 둘의 공이 크고, 큰 신임을 얻어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 둘은 개천 신화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게다가 천신을 등지고 그분을 택했습니다요. 미물과 비할 바가 못 됩니다!”
도철이 성을 내며 목소리를 높이자 궁기와 도올은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을 지었다.
도철이 품은 하찮은 분노와 질투는 악의를 즐기는 그들에게는 감미롭게 느껴진 덕이다.
궁기가 다정하게 답했다.
“풍백과 우사는 호족의 옛 친우이기도 했어요. 언제 또 운사처럼 굴지 알 수 없었죠. 그래서 곁에 두고 면밀히 지켜봐야 했습니다.”
“……그분께서 나비령을 경계하고 있단 말입니까? 나비령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고 들었습니다만.”
도철은 그간 들은 나비령의 활약에 관해 떠올렸다.
나비령은 수많은 진족들과 협력자들이 실망스러운 성과를 거둔 크리스마스이브, 용궁 사건에서 홀로 성공을 거두었다.
나비령은 협회에 잠입해 간부 하나를 재기 불능 상태로 만들고, 정보를 빼 왔으며 협회를 혼란 상태로 빠뜨렸다.
또, 용왕신이 강림했음에도 불구하고 용궁에서 삼엄한 경계 속에 지켜지던 용새(龍璽)를 복사하는 데에 성공했다.
도철이 나비령을 시기한 이유도 이러한 활약 탓이었다.
“나비령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 나비가 포함된 계획은 늘 부족한 결과로 끝났습니다. 홀로 공적을 세운 나비령만은 무사한 채로요.”
계획에 실패한 자는 붙잡히거나, 그분이 내린 벌을 받았다.
모든 계획이 무너져도 나비령만이 남았다.
나비령이 혼자 지독하게 우수해서 그런 것인지, 다른 원인이 있는지 불명확했다.
“그분께서는 그게 우연인지 확인하실 거다. 나비를 곁에 붙잡아 두고 지켜보면 답이 나오겠지.”
도올의 말에 그제야 도철이 얼굴을 폈다.
“역시 현명하십니다! 제 생각이 짧았군요.”
“보기 좋았으니 문제없어요. 그분께서 무슨 명을 내렸는지 확인이나 해 보죠.”
그분이 품은 의심을 알고 좋아하는 도철의 모습에 궁기의 목소리가 더욱 부드러워졌다.
궁기에게 재촉받아 도철이 그자에게서 받은 종이를 펼쳤다.
그러자 종이에 서린 그자의 이능파가 산산이 흩어져 흔적도 남지 않았다.
종이에 적힌 것을 읽은 도철이 기쁘게 말했다.
“그분께서 제게 운사의 힘을 내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