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61)
105. 경계 (14)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힘에 반응해 화롯불이 불안하게 넘실거렸다.
불꽃의 움직임만큼이나 가든의 상태도 불안정했다.
균형을 유지하며 서 있기 힘들 정도였다.
‘그동안 도철이 운사가 있는 화로를 다루었지만, 이제는 아니야!’
운사는 힘을 뽑아 쓸 수 있는 매개인 데다 호족을 뒤흔들 수 있는 한 수다.
그냥 도철에게 맡기진 않았을 거다.
언제든 직접 손에 쥐고 사용하기 위한 수단을 준비해 둔 듯했다.
사용한다기보다는 터뜨린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거친 수였다.
예상치 못한 침입자가 생겼을 때 바로 저 수를 두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위험한 수라는 뜻일 거다.
“운사를 죽일 셈이냐!”
황지호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일갈했다.
운사의 힘을 뽑아 쓰는 수단이 있다고 해도 무한히 힘을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황지호의 말대로 가든을 이렇게 다루고, 화로의 출력을 폭주시키면 운사를 죽음으로 몰고 갈지도 모른다.
파각!
황지호의 결계술의 일부가 파괴되고, 바닥이 크게 기운 순간.
도철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구름 속으로 파고들었다.
“감히 어딜!”
황지호가 곧바로 결계술을 펼쳐 도철을 추적하려 했으나 그 전에 화로에서 뻗어 나온 불길이 이쪽을 덮쳤다.
도철이 황지호의 손에서 벗어나는 걸 알고 돕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화롯불에서 시작된 불길이 점점 거세져 결계를 태웠다.
평소 같았으면 황지호의 결계술이 모든 위험을 막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비슷한 일이 저쪽에서도 일어나고 있을 거야. 어쩌면 에너미들이 폭주 중일 수도 있어. 게다가 사흉은 가든 안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데, 황지호는 지켜야 할 사람들이 많아.’
가든에 배치한 황지호의 모든 분신들이 위험한 상황을 마주하고 있을 거다.
맹효돈과 함근형 선생님이 계신 곳에는 사흉이 둘이나 있으니 더욱 어려움이 클 거다.
황지호에게 모든 걸 떠넘길 수는 없으니 나도 싸워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능파를 끌어올리기 힘들었다.
이능파를 끌어올려 싸우기는커녕 흔들리는 가든 안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힘을 너무 썼어. 성국언의 모습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야.’
가든에 있는 이들 대부분이 교전을 해 온 상태라 이능파를 크게 소모한 상태인데, 약한 소리가 나와 마음이 무거웠다.
수를 두기 위해선 체스 피스를 옮기기 위한 힘이 필요한 걸 잘 알면서도 힘을 남기지 못한 내 잘못이다.
쿠구구구!
바닥이 떨리는 것에 이어서 목에 소름이 돋는 듯한 감각이 스쳤다.
구름과 안개로 된 가든의 벽과 바닥 어딘가에서 도철이 나를 노리고 있었다.
당연히 도철이 도망을 택할 줄 알았는데, 예상외였다.
‘도망가는 대신 혼란을 틈타서 나를 처리하겠다고?’
비록 상황이 혼란스러워 황지호가 제대로 대처하고 있지 못한다고 해도 전력 차는 압도적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황지호가 다른 이들을 보호하는 걸 포기하고 도철만은 죽이려고 작정한다면 언제든지 그럴 수 있다.
그런데도 도철은 나를 타깃으로 삼았다.
성국언을 그만큼 죽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지금 내가 약해졌다는 걸 알아서 그런 건지, 그것도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생각할 틈이 없어!’
이능파를 끌어올릴 수는 없어도 아직 움직일 수는 있다.
생각을 멈추고 다가올 공격에 대비했다.
구름 속으로 몸을 감추었던 도철의 송곳니가, 폭주하는 화롯불이 동시에 나를 덮쳤다.
‘피하진 못하더라도 피해를 줄여야 해!’
불안정한 바닥에서 어디로 뛰어야 할지 방향을 가늠하고 있을 때, 나보다 먼저 다른 이들이 움직였다.
카아앙!
황지호의 결계가 도철의 송곳니를 막았다.
급하게 결계를 작성한 탓에 송곳니가 그 일부를 씹어 먹고 파고들었다.
이빨의 날카로운 끝이 눈앞에 멈춰 있다가 뒤로 물러났다.
움직인 건 황지호뿐만이 아니었다.
전무영이 내 앞에 서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전무영은 한 손에 막 벗어 든 재킷을 들고 있었다.
성국언의 경호원이기도 한 전무영은 늘 방어 아이템을 가공한 재킷을 입고 다녔다.
재킷은 화롯불의 불길을 밀어내느라 반쯤 타 재로 뒤덮여 있었다.
저 방어 아이템으로 폭주 중인 화로가 만든 불을 여러 번 막는 건 힘들 것 같다.
‘위험한 상황이 또 올 수도 있는데……!’
전무영은 이제 거의 맨몸이었다.
전무영의 신체 능력과 현재 상황의 위험성을 떠올리자니 근심이 솟았다.
표정에 그런 내 심정이 묻어나기라도 한 건지, 전무영이 나를 보며 말했다.
“의원님을 보좌하고 지키는 게 제 역할입니다.”
전무영이 저렇게 말하긴 했으나 나는 진짜 성국언이 아니다.
본인의 안전을 잘 챙겨 무사히 진짜 성국언과 합류해야 하지 않나?
그러나 도철 앞에서 틈을 보일 수 없었다.
성국언 흉내를 내어 전무영을 만류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그 전에 전무영이 말했다.
“의원님의 뜻 또한 지킬 겁니다.”
성국언이라면 방어 아이템이 없어도 내 앞을 가로막았을 거다.
전무영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여는 대신 행동으로 자신의 의지를 보였다.
화로에서 뻗어 나온 불길을 보고도 전무영은 내 앞에서 비키지 않았다.
황지호는 계속 도철을 막고 있었다.
“좀 더 버텨라. 이것을 잡고 가겠다.”
황지호의 결계술이 보이는 출력은 처음 보인 것에 비해 떨어져 있었다.
힘이 고갈되어서 저러는 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교전 중이라 그런 듯했다.
가든의 힘이 폭주 중인데도 여기에선 에너미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다른 곳에 전부 몰려갔을지도 모른다.
‘균형은 깨질 거야. 이 정도의 폭주가 오래갈 리도 없고, 황지호의 분신이 상대하는 에너미는 토벌될 테니까.’
황지호의 말대로 버티면 되는 싸움이다.
하지만 버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흑막도 그걸 알고 있겠지. 다른 수가 더 올 거다.’
나는 주변을 살폈다.
도철과 화롯불이 아닌 다른 것을 찾기 위해서였다.
‘한 번 더 천동하의 광림을 써야 하나? 지금 그걸 쓰면 못 움직이게 될 것 같은데…….’
화롯불이 누그러진 틈을 타 전무영이 물었다.
“무엇을 찾으십니까?”
전무영의 목소리를 들은 건지, 곧바로 황지호가 안광 스킬을 발동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눈이 구름을 꿰뚫어 보았다.
황지호가 눈을 부릅뜨고 어느 지점을 응시했다.
“더는 숨을 필요가 없겠군요.”
바람이 불어 구름이 갈라지고 그 사이로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렸다.
구름 사이에 떠 있어 그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날개의 윤곽이 보여 바로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사흉 중 가장 강하다고 칭해지는 궁기였다.
궁기가 등장한 건 단순히 넷 중 가장 센 놈이 나타났다고 치부할 문제가 아니었다.
‘사흉이 전원 이 가든에 모였어.’
이 세계에선 상징성, 지명도가 진족의 힘에 큰 영향을 미친다.
백호, 청룡, 주작, 현무로 묶이는 사신.
황룡, 청룡, 적룡, 백룡, 흑룡이 있는 오룡.
한반도에서 불가침 동맹을 맺고 있는 12지.
이처럼 여럿으로 묶여 큰 상징성을 갖는 진족은 함께 행동할 경우 그 힘이 커진다.
현재 사신은 제각각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있고, 오룡 중 셋이 승천했고, 12지 동맹이 콩가루 상태인 등등 진족이 그 상징성을 생각해 함께 행동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말이다.
‘전원 버프 효과를 받을 거야. 상대하기 까다로워지겠지.’
여기서 사흉이 전면전을 시도한다면 반드시 피해가 발생할 거다.
황지호가 호족의 지원을 부를 수 있으니 질 리는 없겠지만, 누군가는 목숨이 위태로워질 만큼 다칠지도 모른다.
머릿속에서 사흉이 가진 약점과 그들을 공략할 방법을 어지럽게 생각할 때, 궁기가 말했다.
“도철, 그분께서 귀환을 명하셨습니다. 그만 놀고 오십시오.”
궁기도, 흑막도 여기에서 더 싸울 생각은 없는 듯했다.
흑막이 순순히 물러나려 한다는 게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뭔가 이상했다.
사흉 중 누가 죽거나 붙잡히면 상징성이 흔들려서 그런 걸까?
나중에 둘 수를 고려해 그리 행동하는 거라면 이해가 갔다.
황지호가 궁기의 말을 받아쳤다.
“쉽게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으냐?”
“글쎄요.”
황지호가 그사이에 에너미들을 정리한 건지, 이쪽의 이능파 출력을 높였다.
황금빛의 결계가 하늘에 떠 있는 궁기와 구름 뒤에 숨은 도철을 묶기 위해 부풀었다.
궁기는 그 힘을 목도하고도 여유가 있어 보였다.
궁기의 손바닥 위에서 무언가가 빛났다.
그 무언가는 운사의 화로에 새겨진 것과 같은 형태의 진(陣)이었다.
“당신이 운사와 가든 안의 인간들을 버린다면 좀 어려워지겠죠.”
궁기가 폭풍을 불러 손에 움켜쥐었다.
그러자 진이 박살 나고, 화로가 폭풍에 휩싸였다.
‘궁기는 폭풍우를 부린다고 했어. 진정한 힘을 사용한 것도 아닌데 이 정도라니!’
궁기가 한 말의 뜻을 이해했다.
이대로 가면 운사는 폭주하여 죽고, 가든의 주인이 저런 식으로 죽으면 가든 또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운사가 폭주하는 동안 사흉은 탈출할 계획인 듯했다.
흑막은 운사를 회수하는 대신 사흉의 무사 귀환을 택했다.
덤으로 운사와 함께 가든에 있는 자들을 처리할 생각인 듯했다.
황지호가 화로를 방치하고 사흉을 추적한다면 운사와 가든 안에 있는 이들이 위험했다.
콰아아아아!
궁기가 도철을 찾아내 함께 가든 밖으로 떠나려 하고 있었다.
도철이 날렵하게 달리고 있었는데, 사흉의 버프를 받은 덕에 처음 봤던 것보다 힘이 넘쳐 보였다.
화로의 폭풍을 억누르며 저들을 제압하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유유히 사라지는 이들을 보고 황지호가 이를 갈았지만, 이내 불의 폭풍 속에 있는 화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운사! 포기하지 마라!”
사흉의 생각대로 황지호는 운사를 택했다.
사흉을 붙잡으려고 불러낸 결계들이 운사를 구하기 위해 재조립되었다.
붉은 화염과 재로 뒤덮인 폭풍은 곧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황금의 결계가 폭풍을 삼키고, 화로를 결계 안에 고정시키자 가든도 점차 안정되어 갔다.
폭풍과 화로를 격리시키는 데에 성공했지만, 문제는 화로 속에 있었다.
“불이 이렇게 운사를 삼키다니……!”
결계 너머로 보이는 화로 속 상황은 심각했다.
운사가 안에 있다는 건 알 수 있었지만, 불길과 운사의 경계가 모호했다.
화로의 불과 운사는 마치 하나가 된 것처럼 보일 정도라 함부로 불을 끌 수도 없었다.
저 불이 꺼지면 운사의 남은 생명도 꺼지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전무영이 물었다.
“밖으로 옮길 수 있겠습니까?”
“이 화로는 가든과 연결되어 있다. 억지로 끊어 내는 건 가능은 하지만…….”
황지호가 말끝을 흐렸다.
운사에게 위해가 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던 탓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사흉도 놓쳤는데 운사도 잃고 마는 상황이 닥칠지도 모른다.
그때, 어떤 수가 번뜩 떠올랐다.
‘아니야, 수가 있어.’
화로의 불을 끄면서도, 운사의 생명을 지킬 만한 수가 있었다.
더 지체할 수 없었다.
“저 불을 끕시다.”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황지호가 고개를 휙 돌렸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이쪽을 보고 안심한 것도 같았다.
“수가 있나 보군.”
나는 대답하는 대신 아이템창을 열어 내가 생각했던 카드를 꺼냈다.
카드에는 투박한 물병이 그려져 있었다.
명계에서 에레쉬키갈이 건넨 선물인 생명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