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62)
105. 경계 (15)
전무영이 UR급 아이템 카드 테두리 특유의 색을 보곤 눈을 크게 떴다.
황지호는 바로 생명수를 알아봤다.
“그 아이템은 명계의 것인가.”
여기에서 이걸 꺼낼 줄 몰랐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복잡한 표정으로 아이템을 바라봤다.
상당한 가치가 있는 아이템이지만, 여기에서 운사를 잃는 것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다.
카드를 실체화하자 UR급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밋밋하고 낡은 외형의 물병이 나타났다.
물병은 생명수로 가득 차 있어 묵직했다.
‘우선 생명수로 불부터 끄자. 생명초는 상황을 봐서 쓰는 게 좋겠어.’
생명수는 생명초와 함께 상위 존재 이쉬타르를 부활시켰다는 전승이 있는 아이템이다.
불타 죽어 가고 있는 운사를 구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아이템 같았지만, 둘 다 사용하면 과할지도 모른다.
약이 지나치면 독이 되므로 신중하게 아이템을 다뤄야 했다.
“결계에 틈을 만들겠다. 그 틈을 이용해 다오.”
황지호가 마치 큐브를 조작하듯 결계를 움직였다.
워낙 견고한 결계였기에 생명수를 부을 만큼의 틈을 만들기 까다로운 듯했다.
이윽고 결계에 주먹만 한 틈이 만들어졌다.
콰르르!
틈 사이로 눈을 뜨기 어려울 정도의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황지호가 곧바로 작은 결계를 만들어 열기를 삼켰으나 여전히 공기가 뜨겁게 느껴졌다.
정교한 결계를 한 번에 늘린 탓에 두통을 느끼는 건지 황지호가 미간을 좁혔다.
그렇다고 해서 말릴 수는 없었다.
‘지금 황지호의 부담을 줄여 주기는 어려워.’
사흉을 놓쳤는데 운사마저 잃을 수는 없었다.
황지호도 그걸 잘 알고 있으니 힘을 쏟아붓는 중일 거다.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 천천히 하도록.”
최대한 빨리 끝내야겠다.
그렇다고 성급히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주의를 기울여 틈을 살폈다.
작은 결계들이 화로 속에서 길을 열어 주고 있었다.
여전히 불길이 거셌지만, 생명수를 떨어뜨리면 닿을 것이다.
또르륵.
병을 기울이자 생명수가 가는 물줄기를 타고 화로 안으로 떨어졌다.
평범한 물이었다면 금세 화롯불에 삼켜져 티도 안 날 만한 양이었다.
하지만 이건 평범한 물이 아니었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생명수가 화로를 적시자 불길의 기세가 힘을 잃었다.
‘효과가 있어.’
생명수를 반 정도 부었을 때, 화롯불이 꺼져 연기로 변했다.
계속 생명수를 부으니 연기마저 사라졌다.
생명수는 말 그대로 생명을 부여하고 구하는 물이다.
생명수가 운사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들을 지워 갔다.
화로의 불이 사라져 상대적으로 어두워졌는데, 역으로 황지호와 전무영의 안색이 밝아졌다.
화롯불이 사라지자 엷은 구름으로 덮인 실루엣이 보였다.
분명히 보이지는 않았으나 아주 마른 것만은 분명했다.
‘힘이 화로에 빨리고 있을 텐데도 몸을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구름을 몸에 두르고 있었구나.’
그렇긴 해도 가든에서 보았던 구름에 비하면 같은 진족의 힘인가 싶을 정도로 약해 보였다.
구름은 몸을 다 덮지도 못할 만큼 양이 적었다.
구름 사이로 드러난 피부가 숯덩이처럼 보였다.
화상을 입었다기보다는 타다 남은 흔적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숯덩이 같은 피부에 미세한 이능파가 흐르고 있었다.
운사는 자신의 힘으로 재생을 시도하고 있었다.
“운사…….”
그걸 알아본 황지호가 친우의 이름을 불렀다.
황지호가 이름을 부르자 운사의 이능파에 어렴풋하게 활기가 돌았다.
의식이 없는 것 같은데도 운사의 이능파가 황지호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그 이능파의 흐름에 맞춰 생명수가 담긴 병을 더 크게 기울였다.
파아아…….
운사의 목숨을 가장 크게 위협하고 있던 화롯불이 모두 꺼지자 이번엔 생명수가 그를 직접 치료하기 시작했다.
새카맣던 피부에 생명수가 닿자 검게 죽은 살 아래가 꿈틀거렸다.
곧 새로이 살이 돋아나고, 생명수에 반응해 운사가 움찔했다.
‘이 정도면 생명수만으로도 괜찮겠어. 이능파의 순환에는 영향을 주지 않고 몸만을 되살리는 것 같으니 바로 눈을 뜰지는 의문이긴 한데…….’
어느덧 생명수의 병 안이 텅텅 비었다.
마지막 한 방울이 운사의 몸을 적셨을 때, 화상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비쩍 마른 데다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으나 운사는 살아남았다.
파앗!
역할을 마친 생명수의 물병을 카드화시켰다.
낡은 물병이지만, 신을 살린 물을 담았던 병이었기에 그 자체만으로도 큰 가치가 있었다.
희귀도는 크게 떨어졌으나 생명수가 담겼던 병은 아이템 카드로 돌아왔다.
내가 생명수를 전부 쓴 것을 확인한 후, 황지호가 말했다.
“이다음은 내가 하겠다.”
황지호가 화로 안에 배치한 작은 결계들을 재조립했다.
결계는 날카로운 칼날 같은 형태로 바뀌어 운사와 화로의 연결 고리를 향해 움직였다.
동시에 모든 연결을 끊을 생각인지, 연결 고리의 개수만큼 황금의 칼날이 만들어져 있었다.
황지호가 칼날을 움직이기 전에 말했다.
“연결을 끊으면 곧바로 탈출할 준비를 합시다. 화로의 회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황지호가 우뚝 멈췄다.
내가 무슨 의도로 저 말을 했는지 이해한 것 같았다.
“……운사의 안위에 정신이 팔렸군. 알았다. 이 몸이 운사와 화로를 맡겠다. 각자 자신의 안전을 잘 살피도록.”
흑막이 운사 대신 사흉을 택했다고는 하나 고이 보내 줄 리가 없었다.
호족이 운사를 구하러 올 가능성도 고려했을 거다.
그러니 운사와 화로의 연결이 끊어졌을 경우도 대비했을 게 분명하다.
전무영도 대화의 뜻을 이해하고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선 내 뒤에 섰다.
내 등을 지키겠다는 뜻 같았다.
“간다.”
서걱!
황지호가 결계술을 발동해 운사와 화로 사이의 연결을 끊었다.
그와 동시에 결계를 다시 움직여 분리되어 있는 운사와 화로를 각각 감쌌다.
상대적으로 운사 쪽을 훨씬 조심스럽게 감싸고, 화로는 거칠게 다뤘다.
‘꼴도 보기 싫겠지만, 저걸 회수해서 분석해야 해. 그건 알고 있겠지.’
운사 정도 되는 진족을 붙잡아 두고, 흑막이 직접 손을 댄 화로이므로 두고 갈 수 없었다.
황지호가 아주 짧은 시간 내로 일련의 과정을 마친 직후, 가든 안의 구름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수작을 부리다니.”
파아앗!
황지호가 결계술로 된 황금의 길을 만들었다.
결계술로 감싼 운사와 화로를 허공에 띄우며 앞장섰다.
“가든이 무너지고 있다. 전원 탈출하는 중이다.”
누군가가 운사에게 손을 대면 가든을 흔들어 위협하고, 운사가 화로에서 완전히 분리되면 가든이 무너지는 구조였나 보다.
흑막이 준비할 법한 함정이라고 생각하며 황지호의 뒤를 따랐다.
평소보다 발이 무거워 난감해하고 있을 때, 전무영이 부축했다.
이계 공략에서 성국언이 크게 부상당하면 전무영이 부축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해서 그런지 아주 익숙해 보였다.
“이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가죠.”
가든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인데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성국언이라면 순순히 ‘하핫! 미안하게 됐다, 무영아.’라고 호탕하게 웃으며 받아들였을 거다.
실컷 성국언 시늉을 했지만 지금 그걸 흉내 낼 자신은 없었다.
그것보다 지금은 더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무사할까?’
내가 둔 수 때문에 이 가든에 들어온 사람들이 많다.
그 사람들이 위험에 처했는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마음은 쓰이지만, 크게 불안하지는 않았다.
황지호의 존재 덕분이었다.
‘황지호가 지켜 줬을 거야. 이쪽에서 힘을 크게 쓰지 못했다는 건, 다른 곳에서 싸웠다는 증거잖아.’
그 생각 덕분에 탈출에 전념할 수 있었다.
황금의 길을 따라 무너지고 일그러지는 구름을 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의 걱정 대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였다.
그 앞으로의 일은 대부분 운사와 관련되어 있었다.
마침내 가든의 출구에 가까워졌다.
“출구 주변에 에너미들이 보이는군요. 가든의 소멸을 감지해 밖으로 탈출하려고 날뛰는 중인가 봅니다.”
전무영이 질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흑막의 집요함과 간악함을 이번 건으로 맛보았으니 질릴 만도 했다.
황지호는 출구가 가까워져서 그런지 다소 태평하게 말했다.
“걱정할 것 없다.”
황지호가 나서서 해결하겠다는 뜻인가?
에너미의 수가 좀 많긴 하나 황지호가 나선다면 문제없을 거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어지는 황지호의 말은 달랐다.
“가든과 현실의 경계에서 아군이 기다리고 있다. 너희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더군.”
황지호 혼자서 해결할 생각은 아닌가 보다.
그런데 아군이란 호족을 칭하는 걸까?
전무영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황지호에게 되물었다.
“아군? 호족을 말하는 겁니까?”
“호족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 경계에 있는 자들 중에서 호족은 한 명도 없다. 아니, 이 몸의 분신이 있으니 호족이 있다고 할 수도 있겠군.”
황지호가 아리송한 말을 했다.
어느덧 출구가 가까워졌다.
출구에 운집한 에너미들은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 앞을 가로막은 이들이 있었다.
황지호가 말한 아군이었다.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함근형 선생님의 화살이 에너미의 급소를 꿰뚫었다.
여러 가든에서 나온 에너미들을 모아 둔 것처럼 계와 종이 제각각이었는데, 함근형 선생님은 각 에너미들의 급소를 하나하나 파악해 활시위를 당겼다.
파생 스킬을 사용해 힘이 빠진 듯한 맹효돈도 있었다.
맹효돈은 앞에 나서서 싸우는 대신 탁거산의 보조를 하는 중이었다.
탁거산은 제자의 성장에 관해 알게 되었는지 함박웃음을 지으며 싸우고 있었다.
다행히 큰 부상을 입은 사람은 없었다.
“출구가 곧 무너질 거야. 괜찮을까?”
주수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자리에는 주수혁과 김철도 있었다.
주수혁이 왔다는 건 황지호에게 들었지만, 이 자리에 있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저 둘은 황지호의 분신 근처에서 싸우는 중이었다.
가든에서 황지호의 분신과 주수혁 일행이 합류했었나 보다.
말을 놓는 걸 보니 주수혁은 저 20대 모습의 황지호가 누구인지도 알아차린 것 같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다들 황지호의 정체를 알게 되는 거 아니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은광고의 교직원인 함근형 선생님이나 탁거산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탁거산은 명예교사직이라 그렇다 쳐도 함근형 선생님은 괜찮으실까.
주수혁의 말에 출구 쪽에 있는 황지호의 분신이 답했다.
“물론이다. ‘전원’ 다 왔으니까.”
황지호의 말에 주수혁이 이쪽을 돌아봤다.
길을 열고 있는 황지호, 나를 부축하고 있는 전무영에 이어 주수혁의 시선이 내 사라진 왼눈 위에 멈췄다.
무언가 깊게 생각하던 주수혁이 탄식했다.
“아…….”
주수혁은 국회의원이자 학교 선배를 보는 눈을 하고 있지 않았다.
친구를 걱정하는 눈을 하고 있었다.
성국언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도 저런 눈이라니, 아직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바로 깨달았다.
‘주수혁은 지금 나를 알아봤어.’
플마고의 주수혁은 나보다 훨씬 더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흑막의 계획을 인지하고, 저지하기 위해 움직인다.
주수혁이 우수한 통찰력을 발휘한다면 내 능력이나 정체를 알아봐도 이상하지 않았다.
주수혁이 자신의 능력을 친구를 위해서 발휘하는 데 맹효돈 건이 방아쇠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콰아아아!
주수혁이 내게서 시선을 떼고 검을 휘둘렀다.
주수혁의 쌍검이 날갯짓을 하듯 움직여 에너미를 갈랐다.
광림을 사용해 두빛나래에 바람 속성을 부여한 것인지, 에너미가 소멸한 자리에 선풍이 불었다.
“자, 밖으로 나가자!”
마침 황지호가 길을 완성했다.
주수혁을 따라 경계를 넘어 현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