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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863화 (863/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63)

106. 혼 (1)

어둠 속, 나비령은 오랜 시간 그자의 곁에 있었다.

사흉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사라진 후부터 줄곧 그의 옆에서 대기하는 중이었다.

기뻐 마지않는 얼굴로 그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나비령은 냉철하게 판단했다.

‘나를 의심하고 있구나. 이건 일종의 시험이야.’

그자에게 있어서 총애와 의심은 종이의 앞면과 뒷면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자는 능력을 높이 사고 아낄수록 더욱 의심했다.

나비령은 실패한 적이 없지만, 그녀가 개입한 사건이 완벽히 그자의 뜻대로 흘러가는 일이 없었으니 의심할 법했다.

그렇기에 그자는 이번 작전을 앞두고 나비령에게 어떤 정보도 주지 않았고, 딴짓을 하지 못하도록 옆에 붙들어 두었다.

‘오늘 그분의 작전이 무사히 마무리된다면 의심이 커지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중요한 일에 나를 찾는 일이 늘어날 거야.’

현시점에서 나비령이 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였다.

어떤 초조함도 내색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

그자는 나비령을 곁에만 두고 방치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오감 중 하나를 이용해 계속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나비령은 겉보기에 의심스러운 구석을 남기지 않도록 숨을 고르는 것도 신중하게 행했다.

그러던 중, 나비령은 그자가 진을 다루는 것을 보았다.

‘지금 그분께서 다루는 건 연락용 진이야. 보고를 받고 있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자는 진을 더듬어 피부로 정보를 인식했다.

진을 다루는 방식을 보아하니 혼돈의 보고를 듣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 해도 혼돈의 보고만을 믿진 않겠지. 혼돈은 오래도록 현세에서 자리를 비워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을 거야. 모든 정보를 혼자 쥐고 있게 할 리가 없어.’

나비령의 생각대로 그자는 다른 방식으로도 보고를 받았다.

그자가 이능파를 흘리니 진이 글자의 형태로 변했는데, 그건 혼돈의 방식이 아니었다.

나비령은 이번 건에 몇 명이나 개입했을지 가늠해 보며 생각에 잠겼다.

‘도철에게만 맡기지 않은 건 확실하구나.’

처음부터 그자는 도철만 부릴 생각이 아니었을 것이다.

굳이 도철에게만 맡기는 것처럼 명령을 내린 건 나비령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자는 나비령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의심의 덫을 여러 개 놓은 듯했다.

‘꽤 중요한 사건인가 봐. 이런 건 꼭 망쳐 두고 싶은데 개입할 방법이 없네. 하지만 내가 나서지 않아도 분명…….’

나비령은 용궁에서 보았던 이들을 떠올리며 즐겁게 소식을 기다렸다.

길게 느껴졌던 기다림 끝에 그자가 말했다.

“나비령, 사흉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

나비령이 명을 받들겠다고 답하기 전, 그자가 덧붙여 말했다.

“가져올 것이 있다.”

그자는 사흉을 안내하는 것 외에도 명령을 하나 더 내렸다.

나비령은 무슨 의도로 그자가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바로 파악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나비령은 두말없이 그 말을 따랐다.

“명을 따르겠나이다.”

나비령은 깊게 허리를 숙여 보이지 않게 웃었다.

두 개의 명령을 듣는 것만으로도 나비령은 사흉이 실패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비령은 허락을 받아 사흉을 마중하러 직접 움직이고, 그자가 명령한 물건을 가져오도록 권속을 부렸다.

사흉의 상태는 영 좋지 않았다.

도철은 굴욕과 안도, 불안 등으로 마음이 복잡해 보였고, 도올은 그보단 덜했으나 비슷해 보였다.

멀쩡해 보이는 건 미소 짓고 있는 궁기와 도통 속을 읽을 수 없는 혼돈뿐이었다.

“보고하라.”

그자가 긴 손가락을 들어 궁기를 지목했다.

이번 임무를 맡기로 한 건 분명 도철이었을 텐데, 그자는 도철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궁기는 저번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바로 중요한 내용에 관해 보고했다.

“성국언에 관해 보고합니다. 호족과 결탁한 게 확실합니다. 황호와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호족 외에도 성국언에게 협력한 진족이 있습니다.”

궁기는 그자의 명령을 받아 따로 움직였던 듯했다.

궁기의 보고가 계속되었다.

“성국언은 마족(馬族)과 포모르 마족(魔族)과도 결탁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말하라.”

“탈출할 때 흑마가 어느 인간과 함께 성국언의 조부인 성형우의 시신을 수습하고 있었습니다.”

궁기의 말에 다른 사흉들이 납득했다.

흑마가 그 난장판에 뛰어들어 위험을 감수하고 인간의 시신을 수습할 이유가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성국언이 흑마와 오래전부터 결탁한 상태였고, 이번 사건을 파악해 시신을 되찾을 계획을 세웠다면 납득이 가는 행보였다.

게다가 둘 사이에는 그럴싸한 접점도 있었다.

“흑마가 이끄는 마족(馬族)은 강원도의 홍천을 근거지로 삼고 있습니다. 그 지역은 성국언의 본가가 있는 곳입니다. 그가 주기적으로 방문하고 있습니다.”

흑마는 본거지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지만, 성국언이 고향에 돌아갈 때마다 접선했다면 긴밀한 관계를 다질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궁기는 포모르 마족에 관해 보고했다.

“누군가가 은광고에서 발생한 전이의 흔적을 추적하고 있었습니다. 확인해 보니 포모르 마족이더군요. 기록 기기의 소거된 영상의 일부를 복원하는 데에 성공했는데, 그자들이 은광고에 남은 가짜 성국언과 대화하는 장면이 찍혀 있었습니다.”

만약 성국언이 흑마와 연을 맺고 있다면 포모르 마족 쪽에 의문이 생길 법했지만,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흑마가 이끄는 마족(馬族)은 마족(魔族)의 습격에 시달리고 있어 그 둘을 동시에 포섭하는 건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으나 포모르 마족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들은 계속 한반도에 없었기에 흑마와는 대립할 일이 없었다.

또, 성국언은 홍천을 방문하는 횟수 수준 정도는 아니었으나 해외 출장을 몇 번 갔다.

성국언이 그때 포모르 마족과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나비령은 궁기의 보고 내용을 통해 그들이 벌인 사건과 성국언에 관한 정보를 파악하여 사고했다.

‘포모르 마족은 최근 한반도로 돌아왔지. 이유는 불명이었지만, 진족이 지력을 목적으로 한반도에 오는 건 흔한 일이라 주목은 하되 이유를 따지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어.’

궁기는 성국언이 포모르 마족을 부른 것이라 생각하는 듯했지만, 나비령의 다르게 생각했다.

성국언이 그렇게 오래전부터 암살 계획을 파악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비령의 그런 생각도 근거가 빈약한 짐작이긴 했다.

‘성국언은 진족을 좋아하지 않았어. 딱히 연기를 한 것 같지도 않아. 쉽게 마음을 바꾸기 어려웠을 텐데…… 목숨이 걸린 일을 진족에게 맡긴다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성국언의 정보력이 마음에 걸려.’

어떻게 성국언이 암살 사건을 간파하고, 성형우의 위치를 파악한 건지 의문스러웠다.

언급된 진족들을 움직일 만한 힘이 있다면 그 정도의 정보력이 있는 것도 납득이 되긴 했다.

그러나 나비령은 납득하지 못했다.

‘그런 정의롭고 곧은 인간에게 그만한 정보력이 쥐어져 있다면, 그동안 벌어진 사건에 개입하지 않고는 못 버텼을 텐데.’

나비령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흉은 달랐다.

정치인이 수많은 정보를 쥐고도 제 이익에 반하지 않는 한 모르는 척하는 건 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성국언이 그간 모르는 척하다가 암살 위험에 처하자 움직인 거라 생각하면 앞뒤가 딱 맞았다.

“국회의원은 암살 계획을 간파하여 가짜를 준비하고, 유력한 진족을 셋이나 끌어들여 자신을 보호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건으로 국회의원이 주오 그룹의 자제와 연이 닿을 것 같습니다.”

이들은 이번 수의 중심이 호족이 아닌 성국언 쪽에 있다고 여겼다.

그렇게 생각한 가장 큰 이유는 흑마가 나서서 성형우의 시신을 수습했기 때문이다.

호족이 중심이었다면 운사가 잡혀 있다는 걸 아는데 굳이 인간의 시신을 찾겠다고 힘을 낭비할 것 같지는 않았다.

호족의 성정상 맹효돈처럼 연이 닿은 인간이 죽지 않도록 막는 것 정도는 하겠지만, 죽은 인간을 위해 거기까지 할 리가 없었다.

“이상입니다.”

궁기가 보고를 마쳤다.

지금까지 궁기가 한 보고들은 전부 사실이었으나 사실에 덧붙인 추측은 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게 추측하도록 만든 게 조의신의 수였다.

다시 성국언을 건드리면 호족, 마족, 포모르 마족을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시키고자 했다.

조의신의 수대로 된다면 그자가 성국언을 노리는 게 매우 어려워질 것이다.

‘궁기는 저렇게 생각하는데, 그분께서는 어떨까.’

나비령은 호족과 함께 행동하는 어둡고 참혹한 별의 존재를 떠올렸다.

나비령은 이 수의 뒤에는 성국언이 아니라 까마귀 가면을 쓴 자가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한편, 그자는 궁기의 보고에 관해 어떠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듣기만 했다.

이번에 그자는 도철을 지목했다.

“보고하라.”

“그 국회의원에게는 강력한 상위 존재가 붙어 있습니다! 그놈의 눈을 빼앗을 때 말입니다…….”

도철이 기다린 듯이 허둥지둥 말했다.

자신이 실패한 건 제 능력이 부족한 탓이 아니라는 걸 변명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보고의 내용은 사실이었지만, 도철의 엄살이 잔뜩 섞여 있었다.

도철은 당장이라도 성국언을 죽이지 않으면 모든 계획이 무너질 것처럼 굴었다.

‘과연 도철이 상대한 자가 성국언일까…….’

도철의 말을 들을수록 나비령은 까마귀 가면에 관해 떠올렸다.

그 가면을 쓴 자라면 성국언 흉내를 내어 도철을 속이는 것쯤은 쉽게 할 것 같았다.

이윽고 도철의 매우 길고 장황한 보고가 끝났다.

“……이, 이상입니다.”

도철은 목이 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보고를 들었다.

성국언은 물론이고 맹효돈을 처리하는 것도 실패한 데다 운사까지 빼앗겼다.

마지막 탈출과 반격을 위해 운사에게서 뽑은 힘을 대부분 소모했고, 관리하던 가든이 전부 무너지고 말았다.

당장 불호령이 떨어지고 진에 묶여 벌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나 그자는 탓하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자는 도철이 아닌 나비령에게 말했다.

“나비령, 그것을 앞으로 가져와라.”

“명을 받듭니다.”

갑자기 보고를 듣다 말고 왜 나비령에게 심부름을 시키는지 알 수 없었다.

곧 나비 떼가 나타나 무언가를 내려놓고 사라졌다.

그것은 거대한 화로였다.

운사가 들어 있던 것과 같은 화로였다.

그자가 말했다.

“풍백, 우사, 운사는 모두 갖춰졌을 때 제힘을 발휘하나 운사가 그리되어 곤란해졌다. 그래서 만든 게 이 화로다.”

운사는 풍백과 우사와 뜻을 달리했다.

그러나 죽이면 상징성이 크게 훼손되고, 살려서 같이 움직이게 하면 위험이 컸다.

그렇기에 죽이지도 살리지도 않으면서도 풍백과 우사에게 힘을 실을 수 있는 방법을 고안했다.

운사의 힘을 이용하고, 풍백과 우사와 이어져 상징성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가 이 화로였다.

“사흉 중 남은 셋에게 화로와 이어진 진을 새겨 주겠다.”

도철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깨닫고 경악했다.

그자는 도철에게 운사의 역할을 맡기려는 것이다.

이미 그자는 도철을 없는 존재로 취급하고 있었다.

운사의 비명 소리처럼 거센 소리를 내며 타던 화롯불이 떠올랐다.

도철은 그자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다른 사흉에게 같이 선처를 부탁해 달라 요청하고자 했다.

“읍……!”

그러나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자는 도철의 긴 보고에 질린 듯, 진으로 입을 막아 버린 것 같았다.

도철은 버둥거리며 다른 사흉을 바라봤다.

애타는 시선을 사흉에게 보냈을 때, 그는 절망했다.

남은 셋은 기뻐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자의 악의와 도철의 절망을 즐기는 중이었다.

화르륵!

도철의 몸이 화로에 던져져 연결된 직후, 화롯불이 타올랐다.

도철의 비명 대신 무언가 타는 소리만이 들렸다.

운사가 화로 안에 있을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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