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864화 (864/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64)

106. 혼 (2)

도철의 화로가 타고 있는 와중, 그자가 친히 남은 사흉들에게 진을 새겼다.

진은 화로에 새겨진 것과 같은 형태였다.

진의 획이 추가될 때마다 화로의 불이 크게 타오르고 내부에서 무언가가 연결된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나비령은 은은하게 미소를 띠며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도철과 화로가 연결되는 중이구나. 또, 진이 새겨질 때마다 화롯불이 거세지고 있어. 다소의 고통이 따를 테니, 소용없는 저항을 하는 중이겠지.’

나비령은 도철의 고통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나비령이 마음에 두는 건 남아 있는 사흉들이었다.

‘저들은 이제 떨어져 있어도 사흉이 함께 행동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을 거야. 그분의 진으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그자가 가장 힘이 부족한 도철을 작전의 중심으로 사용한 건 지금을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이번 건으로 그자는 호족의 수를 떠보았고, 남은 사흉들이 어디에서나 상징성이 주는 힘을 갖추도록 만들었다.

성공했으면 그건 그것대로 좋고, 실패하면 이렇게 이용하기 위해 수를 둔 셈이다.

“물러가라.”

진을 부여한 후, 그자는 사흉과 나비령에게 물러갈 것을 명했다.

도철이 들어간 화로는 다른 부하에게 맡길 생각인 듯했다.

나비령은 도철의 관리를 맡지 못한 것을 아쉽게 여겼으나 그자의 의심을 덜어 자리를 비킬 수 있는 것은 기쁘게 여겼다.

‘우선 이번 사건의 전모를 파악해야겠어. 그 뒤에 누가 도철을 관리할지, 남은 사흉이 어떤 명령을 받을지 지켜봐야겠지.’

나비령은 나비를 어떻게 배치해야 할지 바삐 계산했다.

물론, 그런 도중에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나비령은 애수가 묻어나는 얼굴로 마치 그자의 곁에서 멀어지는 게 슬픈 것처럼 가장했다.

사흉에게 예의를 갖추기 위해 시선을 낮추고 몇 걸음 떨어져서 걷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물어볼 게 있습니다. 고개를 들어 주시겠습니까?”

그자가 머무는 어둠에서 벗어난 후, 궁기가 나비령에게 말을 걸었다.

궁기는 그자를 대할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비령을 상냥하게 대했다.

나비령에게 특별한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자를 향한 충성스러운 태도와 그녀가 이룬 악의 어린 공적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비령이 공손한 태도로 천천히 고개를 들자 궁기가 말했다.

“성국언에 관해서 물어볼 게 있습니다.”

나비령은 어째서 궁기가 성국언에 관해서 묻는지 가늠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궁기는 가든 안의 성국언을 봤다.

도철을 제외하면 직접 그 성국언을 본 자는 궁기가 유일했다.

나비령은 그 점을 유념하며 궁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 *

이번 사건의 목표는 전부 달성했다.

성국언과 전무영의 암살을 저지했다.

옛 한국 지부장, 성형우의 시신을 수습했다.

화로에 묶여 있던 운사를 구했다.

가든에 전이된 모든 이들과 함께 탈출했다.

그래도 바로 쉴 수는 없었다.

‘마무리가 아직이야.’

가든의 밖은 탄래중 근처였다.

경기도 외곽이라고는 하나 수도권이고, 학교 주변이므로 그럭저럭 상권이 발달해 오가는 사람도 적지 않은 장소였다.

그런 곳이 초토화되어 있었다.

‘가든의 위치는 역시 탄래중 근처였어. 이 점은 예상대로인데, 흑막이 생각보다 일을 크게 벌였구나.’

맹효돈의 은사를 처리하며 감춰야 할 정보를 묻기 위해 과격한 수를 둔 모양이었다.

탄래중 쪽에 변수가 많을 거라곤 예측했지만, 이 정도면 배치해 둔 호족만으로 대처하긴 어려웠을 것 같다.

사상자는 없어도 거리에 피해가 미치는 건 어쩔 수 없었을 거다.

‘이곳에 천동하를 두길 잘했다. 모든 과정을 지켜봤을 거야.’

이 정도로 파괴 공작을 벌인 걸 보면 대단한 정보를 감춰 뒀을 거다.

파괴 후에도 수작을 벌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 점은 미리 대비해 두었다.

내가 둔 수 중 하나가 마침 나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성국언 국회의원, 괜찮으십니까?”

홍규빈이 나를 발견하고 이쪽으로 달려왔다.

스승의 날 불러냈다고 엄청 싫어하더니만, 와서 일은 잘하고 있었나 보다.

홍규빈에게는 탄래중 주변에 문제가 생기면 바로 협회 차원에서 개입해 달라고 요청했다.

시민의 안전을 지키고, 취재 중 발생할 문제를 막고, 흑막이 더 수작을 못 부리게 방지할 겸 추가적인 노림수도 더 있었다.

‘성국언을 발견하면 바로 와 달라고 했지.’

여기엔 황지호와 함근형 선생님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있는데도 홍규빈은 약속대로 성국언에게 제일 먼저 말을 걸었다.

성국언이 진족뿐만이 아니라 협회 쪽에도 줄이 닿아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협회 사람들과 호족이 있다고 하나 이곳은 개방된 장소고, 흑막이 꽉 잡고 있던 곳이므로 이 만남을 그들도 알게 될 거다.

나는 눈에 안 띄게 숨을 크게 들이켜고 가능한 한 성국언처럼 말했다.

“스승의 날에 이렇게 뵙게 되는군요. 홍규빈 팀장님의 선생님은 잘 계십니까?”

일부러 ‘선생님’이라는 말에 힘을 줘서 말했다.

홍규빈에게 있어 선생님은 아주 특별한 뜻을 가지고 있고, 내가 그걸 알고 있다는 걸 홍규빈도 인식하고 있다.

또한 홍규빈은 중앙 도서관 지하 서고 사건에서 내가 제갈재걸의 모습을 했다는 것도 안다.

사전에 성국언에 관해 언급했고, 이 모습을 한 내가 저런 말을 했으니 바로 알아볼 거다.

“아…….”

홍규빈은 바로 내 정체를 알아봤다.

그저 국회의원이 부상을 당한 걸 보고 놀란 듯했던 홍규빈이 아주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매번 야근 시키려고 연락을 하던 상대지만, 그래도 알고 지낸 지 꽤 돼서 걱정되나 보다.

홍규빈은 내 왼쪽 눈을 보고 탄식하다가 말했다.

내 의도를 알고 홍규빈은 나를 성국언 취급 해 줬다.

“선생님은 잘 계십니다. 지금은 본인 걱정부터 하는 게 좋겠군요.”

“성국언 의원님이랑 많이 친해 보입니다? 전에 연줄 있으면 사인 좀 받아 달라고 했을 때는 모르는 척하시더니만.”

은광고 출신 플레이어의 광팬인 정 사원은 성국언의 팬이기도 했는지 뭐라 말이 많았으나 홍규빈은 상대하지 않았다.

윤 대리가 나타나 정 사원을 끌고 가자 홍규빈과 대화를 나눴다.

홍규빈은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간략하게 설명해 줬다.

자연 이능파 방출 현상과 청소년 예비 플레이어 지원 센터를 중심으로 발생한 이능파 흐름 이상 사태, 숨겨져 있던 가든이 폭주하여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 등이었다.

‘탄래중 쪽은 문제가 심각했구나. 준비를 더 철저히 했어야 했는데…….’

홍규빈과 대화하는 사이, 주변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맹효돈은 가든에서 막 나왔을 때, 나를 보고 말을 걸까 말까 망설였다.

걱정은 되지만 지금 말을 걸면 내가 곤란해할까 걱정하나 보다.

주수혁에 이어 맹효돈도 나를 알아본 게 분명했다.

‘맹효돈을 파이트 클럽에서 구할 때, 다른 모습을 한 걸 봤어. 그걸 기억하고 있다면 바로 눈치챘겠지.’

맹효돈의 고민은 길게 가지 않았다.

흑마와 함께 먼저 밖에 나와서 성형우의 관 주변을 서성이던 중학교 은사가 맹효돈을 발견하자 한달음에 달려왔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침착해 보이던 중학교 은사는 맹효돈을 보자마자 미안하다면서 눈물을 보이셨다.

가든에 있을 때에는 동요한 모습을 보이면 사기를 떨어뜨릴까 봐 계속 참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맹효돈은 어쩔 줄 몰라 했는데, 다행히 주수혁이 중간에 끼어들어 중학교 은사를 안심시켜 주었다.

“국언이, 너…….”

“탁거산 선생님, 지금 국언이는 일하는 중입니다. 다음에 이야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탁거산이 내 눈을 보고 경악했으나 함근형 선생님이 막아 주셨다.

함근형 선생님께 부탁드린 게 있으니 내가 가짜 성국언이라는 걸 알아보셨던 건지도 모르겠다.

“저분은…… 한국 지부장이셨던 분 같습니다만.”

한편, 빠르게 브리핑을 마친 홍규빈이 물었다.

홍규빈의 시선이 성형우가 잠들어 있는 관 쪽으로 향해 있었다.

“네, 가든에 계시더군요.”

구형 시뮬레이터가 구현한 모습이 아닌, 실제 성형우를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멀리서 보면 성형우는 그저 깊게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일 만큼 온전한 상태였다.

구형 시뮬레이터를 통해 성형우의 AI와 대화했던 게 떠올랐다.

AI 쪽이 훨씬 생기 있게 보였는데, 진짜는 이쪽이라는 게 묘한 기분이 들었다.

감회에 젖어 있을 때, 분신을 하나로 정리하고 호족에게 보고를 듣고 온 황지호가 말을 걸었다.

“홍규빈과 이야기는 끝났나? 이만 가자. 마중이 올 거다. 이 몸은 물론이고 성국언을 보좌하는 너도 따라와야겠지.”

“당연합니다. 함께 가겠습니다.”

내가 대답하기 전에 줄곧 나를 부축하고 있던 전무영이 말했다.

어디로 가지?

마중은 누가 오는 건데?

굳이 따지면 행선지는 호랑이 저택, 마중하러 오는 자는 적호일 가능성이 클 것 같았다.

만약 흑막이 내 쪽을 전이의 대상으로 삼을 경우, 적호는 정보 조작을 할 예정이었다.

주변에 있는 기록 기기를 가공하여 흑막에게 보여 줄 부분만 남기는 게 그러했다.

성국언이 포모르 마족과 연이 있는 걸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었는데, 일 자체는 간단하니 곧바로 합류할 수 있을 거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마중 온 차량이 내가 생각한 것과 달랐다.

에어 리무진에 붉은 사자의 로고가 크게 박혀 있었다.

문이 열리자 시안색의 긴 머리카락이 보였다.

“안녕? 나 왔어.”

마중하러 온 자는 용제건이었다!

막 나타난 용제건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요새 실눈을 뜨고 다니더니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닌가 보다.

“……진짜 잃었네.”

용제건이 내 왼눈을 보고 한마디 했다.

그리고 내가 뭐라고 하기 전에 빠르게 말했다.

“국언이는 나와 염방열과 아주 친하잖아? 그러니 마중 와도 이상하지 않지.”

용제건과 아주 친하다는 말에 성국언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나쁜 일은 아니었다.

‘실제로 성국언은 염방열과는 가까워. 성국언이 붉은 사자와 용족과도 연이 있는 것처럼 보이면 더 안전해지겠지.’

붉은 사자 전용기를 타고 영국으로 향할 때 염방열이 직접 와서 성국언과 인사했었다.

거기에 용족과의 친분이 더해지면 더욱 효과가 커질 거다.

그런 것도 있어 용제건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리무진에 오른 후, 전무영이 물었다.

“용제건 선생님, 행선지는 어디입니까?”

“의신이 소유의 공간.”

용제건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리무진 안이라고 막말을 해도 되는 건 아닌데.

지금 리무진을 끌고 기숙사로 가겠다는 뜻인가?

아니, 기숙사는 엄밀히 따지면 황명 재단의 것이므로 내 소유의 공간이 아니다.

용제건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의신이가 용궁에 지분이 있거든.”

용궁을 말하는 거였나!

설마 백룡궁, 적룡궁, 흑룡궁을 진심으로 떠넘긴 건가?

대체 용족들은 무슨 생각을 하길래 저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용궁은…… 상당히 멀지 않습니까?”

“아니야, 가까워. 황호 씨가 용궁의 입지가 별로라고 해서 용족의 은인을 위해 이것저것 많이 생각했거든.”

“호족의 은인에게 쓸데없는 것을 떠넘기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거늘, 도통 듣질 않는군.”

황지호는 아주 불쾌해했지만, 용궁에 가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용제건은 황지호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용궁 이사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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